〈 20화 〉 미유키의 실수
* * *
“오늘 뭐냐? 예쁘게 입고 왔네?”
수업을 하러 찾아온 미유키를 향한 칭찬이었다.
그 말마따나 미유키의 오늘 패션은 평소의 답답한 모습과는 달랐다.
무릎 위쪽까지 덮는 진청색의 하이 웨스트 5부 반바지.
거기다 그 안으로 흰 티셔츠를 넣었고, 흰색 스니커즈를 신었다.
여기서 아우터 전용으로 만들어진 밝은 크림색 반팔 셔츠로 마무리.
저 큼지막한 검은색 가방이 옥의 티긴 하지만, 여름에 딱 걸맞게 청량한 패션이었다.
미유키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청순한 패션이기도 했다.
곧게 뻗은 저 새하얀 다리를 보니 독점욕이 확 솟구친다.
빨리 무릎에 멍이 들게 하고 싶다.
그나저나 내게 잘 보이고 싶어서 코디를 바꿨다고 행복회로를 돌려도 되는 부분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고마워, 마츠다 군.”
발랄하게 감사인사를 한 미유키가 집 안으로 들어온다.
옆으로 비킨 나는, 미유키의 뒤를 따라온 테츠야가 날 대단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걸 보았다.
자신은 못하는 얘길 서슴없이 하는 내가 부러운 거다.
테츠야는 방금 내가 한 칭찬 같은 건 때려 죽어도 못한다.
그냥 속으로만 찌질하게 ‘미유키... 예뻐...’ 라고 생각하지.
아니면 미유키가 ‘오늘 어때?’ 라고 물어보면, 그제야 ‘예쁘다.’ 라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는 것이 끝이었다.
“넌 왁스 발랐네?”
놈의 눌린 옆머리를 본 내 물음이었다.
테츠야가 머리를 조심조심 만지며 반문했다.
“응. 괜찮아 보여?”
“저번보단 낫긴 한데, 옆머리를 누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밀면서 눌러야 된다.”
“이렇게?”
“어. 대충 그런 식으로. 그리고 너무 많이 바르지 마라. 지금 약간 떡 져 보인다.”
“알았어. 고마워, 마츠다.”
호의라고 생각하지 마라.
단둘이 있었으면 이런 건 단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을 거다.
미유키는 거실에 들어가기 전, 으레 그렇듯 식물들의 상태를 체크했다.
슬슬 활기가 살아나고 있는 식물을 보며 좋아라하던 그녀가 말했다.
“조만간 영양제 더 사와서 꽂아놔야겠다.”
“영양제는 너부터 먹어야하지 않을까?”
“왜?”
“아냐. 그냥 걱정돼서 그러지.”
내가 키를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미유키의 입가가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다.
키에 대해서 놀리는 건 적당히 해야 한다.
미유키의 콤플렉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민감하게 여기는 만큼, 계속 언급하면 기분이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딱 적당한 수준.
혼자 낄낄거린 나는 미유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방이나 줘봐.”
“됐어... 지금 들어갈 거야.”
“벌써? 조금 쉬어야 되는 거 아닌가? 네가 좋아하는 식물도 챙기고 그래야지?”
“벌이야. 바로 시작할래.”
“미우라는 뭔 죄냐?”
“마츠다 군 같은 친구를 둔 죄야.”
테츠야와 나는 친구가 아니라 경쟁관계지.
포식자와 피식자 정도로 급 차이가 나긴 하지만.
테츠야야, 너는 어떻니? 날 친구라고 생각하냐?
“마츠다 덕분에 공부도 더 하고 좋지 뭐.”
여전히 어벙하네. 그게 네 단점이지.
투덜거린 나는 원탁에 앉아 책을 폈다.
그러자 미유키가 테츠야와 내 사이에 앉더니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날이 지날수록 더 더워지네... 어제 먹었던 그 망고 아이스크림 또 먹고 싶어...”
망고 아이스크림은 어제 영화를 마저 보고 나서 먹었던 거다.
뒷자리 여자가 쏟은 콜라 때문에 손님들이 소곤거려서 미유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었지.
그때 일을 생각하는구나. 근데 너 지금 실수했어.
“망고 아이스크림?”
테츠야의 의문 섞인 물음에, 미유키의 얼굴이 하얘졌다.
테츠야는 미유키가 나와 데이트를 한 것을 모른다.
솔직하게 얘기할 생각이 아니라면 빨리 머리를 굴려서 변명을 해야 하는데, 어떡할래?
흥미진진한 눈으로 미유키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녀가 눈동자를 데굴 굴리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너랑 오락실에서 헤어졌을 때 사먹었었거든... 엄청 맛있었어.”
“그래? 망고 아이스크림은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 다음에 같이 먹어보자.”
“그, 그러자...”
거짓말을 했다는 건, 아직 미유키의 테츠야를 향한 마음이 더 크다는 증거다.
솔직하게 말을 했을 때 테츠야가 질투 같은 것을 할까 걱정스러웠겠지.
동시에 미유키의 마음속에 내 존재가 슬슬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뜻도 됐다.
나를 그냥 친구라고만 생각했다면 대수롭지 않게 영화를 봤고, 아이스크림까지 먹었다고 말했을 테니까.
이런 줄다리기는 서운하다기 보단 오히려 환영할만한 일이다.
이런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되면, 미유키는 이후에 큰 근심에 빠질 것이다.
왜 테츠야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날 만나는지 번민하겠지.
그러다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오게 될 거고.
나는 슬쩍 내 눈치를 보는 미유키를 향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흐흠...”
헛기침을 하더니 가방에서 책을 꺼내는 미유키.
몇 차례 목을 가다듬은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영어지? 시작하기 전에 어제 배웠던 문법 검사할 거야.”
**
오늘따라 미유키를 그냥 보내기가 너무 아쉽다.
처음으로 내 앞에서 청순한 코디를 선보였는데, 이대로 돌려보내면 절대 안 된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휴대폰을 보는 척하며 미유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아이스크림 또 먹으러 갈래? 미우라랑 같이.]
우웅!
다다미에 놓여있던 미유키의 휴대폰에서부터 울리는 진동.
메시지를 확인한 그녀의 고개가 숙여진 채로 내 쪽을 향해 약간 움직였다.
그러더니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테츠야 군은 내가 집 근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은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은데...?]
[가게가 집 근처에 있긴 하잖아.]
[혹시 점원이 두분이서 또 오셨네요? 라고 물어보면 어떡해?]
네가 이렇게 온갖 걱정을 할 줄 알고 테츠야를 들먹인 거란다.
어차피 놈과 같이 안 갈 것을 알고 있으니까.
[정 불안하면 너 혼자만 와.]
[생각해볼게.]
[조금 늦게 출발할 테니까, 미우라랑 헤어지고 가방 놓은 뒤에 바로 나와.]
[생각해본다니까?]
[기다리고 있을게.]
막무가내 식으로 보낸 메시지에, 미유키가 기가 막히다는 듯 날 흘겨보았다.
노려보는 게 섹시하다. 그 표정으로 펠라치오 해줘.
“둘이서 뭐해?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네?”
나갈 준비를 마친 테츠야의 말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내가 태연스레 대답했다.
“자동차 보고 있었어.”
“아직도 못 고른 거야?”
“내가 아무리 생각 없이 다닌다지만, 차는 신중하게 사야지.”
자조적으로 농담을 곁들이자 미우라가 가벼운 실소를 터뜨렸다.
“맞는 말이네. 미유키는 뭐하고 있었어?”
“어...? 나는... 친구랑 대화하고 있었어.”
“누구? 나나세?”
“아니, 테츠야 군이 모르는 애야.”
“내가 모르는 네 친구도 있었어? 아카데미에서 새로 만난 사람인가보네?”
“그, 그런 거지... 가방 다 쌌지? 이제 가자.”
무거운 가방끈을 어깨에 짊어진 미유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테츠야가 물었다.
“만화 카페라도 들렀다 가지 않을래?”
저 새끼는 왜 자꾸 미유키한테 어딜 가자고 하는 거야.
소수나마 있는 동성 친구들이랑 플스나 쳐 해.
어찌할까 아주 잠깐 고민하던 미유키가 말했다.
“음...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미안해.”
이번엔 거짓말은 안 하고 그냥 거절하기만 했네?
다른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말하지 않은 건 아쉽지만, 그래도 나와 만날 생각인 것 같으니까 넘어가주자.
“그래? 알았어. 마츠다, 우리 갈게.”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테츠야가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미유키가 보지 못하는 사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놈이 실실 쪼개며 나가자 옷장으로 향했다.
뭘 입을까. 셔츠에 반바지, 그리고 벨트에 로퍼?
댄디한 느낌이 강해서 싫다.
그냥 미유키와 어울릴 정도로 캐주얼하게 입자.
**
“왜 이렇게 덥냐... 짜증나게...”
신호를 기다리던 내 불평에, 미유키가 날 올려다보았다.
“짜증날 정도야?”
“어. 비도 안 오고... 이 상태로 8월 되면 길 걷다가 쪄죽을지도 모르겠다. 신호는 왜 이렇게 안 바뀌고 난리야...”
“마츠다 군은 성격이 너무 급해. 참고 기다려. 그리고 아까 집으로 돌아갈 때 테츠야 군이 그랬는데, 욕했다며?”
“언제.”
“그거 했잖아. 손가락 욕.”
그새 고자질을 쳐 하고 앉아있었네.
사실 고자질이 아니라 친구끼리 장난을 친 느낌으로 말했겠지만... 어쨌든 마음에 안 든다.
빼앗긴 히로인들을 생각하면서 바닥딸이나 치는 게 네 말로다.
“장난 친 거지. 친구끼리 이런 것도 못하냐? 아예 그냥 숨만 쉬고 살라고 하지 그래?”
“나도 장난이었어. 그 정도는 봐줄게. 농담으로 한 거니까...”
농담 아닌데? 진심으로 한 건데?
불만이 많은 듯 입술을 오물거린 나는, 미유키가 신호등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팔꿈치를 올려 기댔다.
그 상태로 한쪽 다리까지 꼬자, 미유키가 다시금 날 돌아보았다.
“마츠다 군, 무거워.”
뭐하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피하지도 않았고, 그저 무겁다고만 했다.
내 이런 행동이 거슬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앞으로 자주 할게.
환호성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낸 내가 말했다.
“팔 올려놓기에 딱 적당한 어깬데, 이걸 그냥 놔두는 건 그... 뭐냐... 죄악 같은 거야.”
“.... 키 작다고 놀리려는 거지?”
“그거 피해망상이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으니까 가끔씩 빌려주고 그래라.”
“싫어.”
“단호하네.”
“마츠다 군한테 배웠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신호가 바뀌었다.
파란불이 된 것을 본 미유키가 곧바로 걸음을 옮기자, 팔꿈치가 그녀의 어깨에서 확 떨어졌다.
무게중심이 그쪽으로 약간 쏠려있었기에, 나는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혼자 쇼를 하고 있는 날 흘끔거린 미유키는, 킥킥거리며 시선을 전방으로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옆까지 간 내가 불평했다.
“말도 없이 그냥 가? 넘어졌으면 어쩌려고?”
“마츠다 군은 운동신경이 좋으니까, 넘어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어.”
“하긴, 내가 운동을 좀 잘하긴 해.”
“빈말로 칭찬한 건데 좋아하네? 강아지 같아.”
“싸우자는 거냐? 너 의외로 전투적이다?”
“지금의 마츠다 군이라면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이게 죽을라고... 너 일로 와봐.”
내가 미유키의 셔츠 옷깃을 잡으려고 천천히 손을 뻗자, 그녀가 까르르 거리며 앞으로 도망쳤다.
심심한 테츠야보다는 나랑 있는 게 훨씬 재밌지? 그럴 줄 알았어.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그녀의 이런 반응을 보니, 아까 내 집에서 테츠야에게 상황을 얼버무린 것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듯했다.
괜히 언급하면서 곤란하게 만들지는 말자.
그냥 넘어가주면 나에 대한 평가도 아주 조금이나마 오를 것이다.
대신 다른 걸 물어보면서 분위기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야지.
다시 그녀의 보폭을 따라잡은 내가 물었다.
“너 근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 답답한 치마 대신 이렇게 입고 왔냐?”
“그냥... 기분 좀 내봤어.”
“계속 이렇게 입고 다녀라.”
“사실은 별로인데 사람들한테 비웃음 받으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농담 아니고 진짜로 잘 어울려. 아침에도 그랬잖아.”
내 가라앉은 말투에서 진정성을 느꼈을까?
미유키가 살며시 고개를 돌리더니 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내는 소음에 목소리가 묻힐 정도로 아주 조용히 말했다.
“.... 고마워. 마츠다 군도 오늘... 잘 어울려.”
어쩌면 나는 미유키의 칭찬을 듣기 위해 살고 있는 것 같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
나는 미유키의 말을 잘 못 들은 척 인상을 찌푸렸다.
“나한테 네 코디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놀리냐 지금?”
“그게 아니라... 하아... 됐어. 그냥 가자.”
한숨을 푸욱 내쉬며 걸음을 빠르게 가져가는 미유키.
부끄러웠나보다.
그녀의 뒤를 쫓던 나는 8월 달에 일어나는 여름방학 마지막 이벤트를 생각했다.
하나만 더 챙기고, 미유키와 단둘이 자주 만나면서 개학까지 기다리자.
그리고 서클을 탈퇴한 뒤에 마음을 드러내는 거다.
그때면 우리가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면서 관계를 쌓아간 지 세 달 정도 되는 시점이다.
이정도면 남녀 사이에 사랑이 싹트고 발화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잖아?
믿는다, 미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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