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1화 (21/313)

〈 21화 〉 여름방학의 끝

* * *

“차고증명서는 가지고 오셨나요?”

“예, 여기요.”

발급받은 서류를 딜러에게 내밀자, 그것을 꼼꼼히 확인해본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인했습니다. 결제는 말씀하신대로 일시불 맞으시죠?”

“네. 지금 주문하면 8월 말에 나오는 거 맞나요?”

“맞습니다. 고객님께서 주문하신 색상이 인기가 많아서... 더 빨리 나오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개학 전까지만 받으면 되니 상관없다.

내가 주문한 건 미유키의 취향이 2, 내 취향이 8정도 들어간 차였다.

반반 정도로 들어간 차를 구입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되면 미유키가 부담스러워할 것이 뻔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질리면, 연인으로 발전한 뒤에 바꾸면 되지.

편하게 생각하기로 한 나는 결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이라 미유키를 만날까 싶었으나, 오늘은 주중에 배웠던 것들을 복습하기로 했다.

빠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어야 미유키도 좋아하지.

나는 가장 싫은 과목이라고 할 수 있는 수학 문제집을 펴고,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무더위가 조금 날아가면서 주변이 어둑해질 즈음,

우우웅­!

휴대폰이 진동을 울려댔다.

허겁지겁 휴대폰을 집어든 나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미유키의 선톡... 너무 좋아...

[오늘 날씨 좋지 않아?]

[더운 건 똑같아.]

[우리가 아이스크림 먹으러 갔을 때보다는 덜 덥잖아. 나가서 놀고 그래.]

[그럼 나오든가.]

[이미 밖이야.]

밖이라고? 누구랑 노는데?

테츠야기만 해봐라.

[뭐하는데.]

[하루카라고 알아? 나나세 하루카.]

나나세라면 저번에 테츠야가 말했던 그 동성 친구구나.

다행이다. 파이즈리 10회 추가할 뻔했잖아.

[예쁘냐?]

[어떻게 내가 예상한 대답을 그대로 하지? 이렇게 보면 변한 게 없는 것 같기도...]

[아니지. 변한 날 기준으로 예상한 대답이라고 생각해라. 아 그래서 예쁘냐고.]

[응. 예뻐.]

보통 여자들이 예쁘다고 하면 그 반대라던데.

솔직한 미유키가 하는 말이니만큼 정말 예쁘겠지.

그러면 나중에 초대해서 쓰리섬하자.

[근데 하루카는 마츠다 군 같은 남자는 안 좋아해.]

곧바로 이어서 온 문자.

뭔가 미유키의 속내가 담겨있을 것 같은 문장이지만, 진심으로 저리 말했을 수도 있다.

나는 대외적인 이미지가 좀... 쓰레기긴 하니까.

[누가 뭐래? 그냥 예쁘냐고 물어본 건데. 오늘 뭐 입었냐?]

[어제랑 비슷하게 입었어.]

[찍어서 보내봐.]

[뭐래... 싫어. 오늘 공부했어?]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풀었던 문제집의 사진을 찍어 전송했고, 으스대는 듯한 메시지를 보냈다.

[이정도?]

[열심히 했네? 칭찬해줄게.]

[그러면 옷 사진 찍어서 보내줘.]

[마츠다 군, 변태야?]

[아니, 내가 속옷 사진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코디만 보겠다잖아.]

[싫다고 했어. 나 커피 나왔으니까 이만 끝낼게. 공부 열심히 해.]

지금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줄 줄 알았는데 너무하네.

나중엔 진짜 속옷 사진으로 받을 테니까 그리 알아라.

라고 생각하며 문제집으로 눈을 돌린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에 사진 한 장이 전송되어오자 입꼬리를 히죽 올렸다.

꼭 보내줄 거면서 틱틱대요.

그나저나 오늘은 흰색 블라우스를 입었구나.

안이 잘 비치지 않는 재질의 상의지만, 저 거대한 맘마통은 가릴래야 가릴 수가 없다.

뺨 옆에 커피를 가져다댄 채로 활짝 웃는 사진을 보니, 빨리 미유키를 독점하고 싶다.

바지가 보이지 않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사진을 보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자.

[예쁘네.]

간결한 답장을 보낸 나는 다시 공부에 집중하려다가 이벤트를 생각했다.

여름방학의 마지막 이벤트는, 오봉이라 불리는 일본의 명절이자 긴 휴일인 8월 중순에 일어난다.

그때까지 미유키와 친목질을 가장한 데이트를 하며 관계를 더 발전시켜놓자.

**

“마츠다 군은 오봉에 뭐해?”

에어컨 바람을 쐬며 부채질을 하던 미유키의 물음이었다.

달력을 살핀 내가 대답했다.

“심심해서 바다라도 가려고.”

“아 진짜? 바다 어디?”

눈을 크게 뜨며 관심을 보이는 미유키.

그녀 또한 내일부터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바다에 가기 때문이었다.

“잇시키.”

“어...? 나돈데...?”

“그렇게나 놀랄만한 일이냐? 잇시키는 가까운데다 물도 맑아서 휴일 날 자주 가잖아. 아카데미 학생들도 몇 명 만날 수 있을 걸?”

“그, 그렇긴 해도... 혹시 와타나베 타카시랑 가?”

“아니. 혼자 가려고.”

“아... 그래...?”

묘하게 안도하는 것 같다.

타카시랑 함께 가지 않아서 안심한 건지, 아니면 여자랑 함께 가지 않아서 안심한 건지는 미유키만 알겠지만...

난 그녀가 후자를 생각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러면 테츠야 군이랑 같이 가는 건 어때? 테츠야 군도 잇시키에 온다는데.”

혼자인 나를 챙겨주려는 건 고맙지만, 테츠야랑 가는 건 때려 죽어도 싫어.

“미우라도 가족들이랑 가지 않을까?”

“그렇기는 한데... 음... 혼자 가면 엄청 심심할 것 같은데... 그럼 마츠다 군만 괜찮으면 우리 집에 들러서, 우리 가족들이랑 같이 갈래?”

이건 뭐지?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미유키가 날 가족들과의 여행에 동행시킨다고?

물론 잇시키까지만 같이 가고 따로 놀게 되겠지만... 놀랍다.

새로운 주인공이 된 내게 가족들이 없고, 미유키와의 관계도 상당히 쌓아놔서 추가 이벤트가 발생한 건가?

뭐가 됐든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찾아온 건 맞다.

이참에 도키아카를 플레이할 땐 실루엣만 보였었던 장모님과 처형의 얼굴도 봐야지.

그녀들한테 점수도 따고.

“어... 너희 가족들이 부담스러워하시지 않을까?”

“신사에서 있었던 일 기억해? 네가 보육원에 선행했던 거.”

“내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께서 하신 거지.”

“이럴 땐 되게 겸손하네? 마츠다 군이 아니었다면 그 꼬마를 그냥 도둑이라고만 생각했을 테니까, 마츠다 군이 선행을 한 게 맞아.”

“그렇다고 치자. 근데 그게 왜?”

“저번에 가족들이랑 식사할 때, 우리 아빠가 마츠다 군에 대해서 말했거든. 애가 참 속이 깊다고... 내가 새 친구를 잘 사귄 것 같다고. 불량한 학생이었는데 점점 고쳐지고 있다는 얘기까지 하니까 엄마랑 언니가 궁금하다고 했었어.”

장인어른, 이렇게 절 도와주시면 어떡해요.

패배자위... 넣어두겠습니다.

“그래서 괜찮을 거다?”

“응.”

“혹하기는 한데... 진짜 괜찮겠냐? 너도?”

“나도 전혀 상관없어.”

“그럼 잇시키까지만 부탁할게.”

“알았어. 우리 집은 어디 있는지 알지? 내일 오전 아홉 시까지 오면 돼. 늦잠 자면 그냥 갈 거야.”

장난스런 경고를 한 미유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테츠야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요즘 우리 집 화장실을 자주 쓰네. 저놈 집에 화장실이 막혔나?

예의 없는 것.

**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미유키의 집 앞에 도착한 나는, 네 사람이 오손도손 서있자 걸음을 빨리했다.

짐이 무거웠기에 숨소리가 절로 거칠어져있던 나는, 짐을 내려놓자마자 미유키의 가족들을 살폈다.

와타루는 신사에서 한 번 봤으니까 넘어가고...

미유키의 언니는 순하기 그지없는 미유키의 눈매와는 다르게, 끝부분이 살짝 올라가있었다.

그래도 순둥순둥한 건 똑같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농염한 매력을 풍겼다.

미유키의 엄마는 막내딸인 그녀와 굉장히 닮아있었다.

액면가는 20대 후반처럼 보이는데, 이 가족들은 무슨 유전자에 축복이라도 있는 건가?

히로인의 가족들이니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하긴 해도 너무 사기잖아.

특히 날 향해 짓고 있는 저 인자한 미소... 반할 것 같다.

와타루는 전생에 무슨 짓을 했길래 저런 사람들이 곁에 있는 거지?

질투가 난다. 패배자위... 다시 꺼낼까?

아니, 쓰레기 같은 생각은 그만하자.

오늘만큼은 미유키에게 어울리는 착한 남자로 변신하는 거다.

재빨리 스캔을 완료한 내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마츠다 켄입니다.”

기합이 꽉 잡힌 목소리에, 와타루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서 와라. 일찍 도착했구나.”

이들이 벌써 나와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냐만, 20분 정도 일찍 도착하게끔 시간을 맞추길 잘했다.

미유키의 가족들과 통성명을 마친 나는, 갖고 온 짐을 들고 자신을 미도리라고 소개한 미유키의 엄마에게 다가갔다.

“아주머니, 이거 선물인데...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오봉이기도 해서... 오츄겐 같은 느낌으로 사왔습니다.”

미도리와 그녀의 첫째 딸인 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미유키도 마찬가지.

그런 반응으로 말미암아볼 때, 그녀들은 이 짐이 내가 사용할 물건인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거 우리 선물이니?”

미도리의 말에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은 내가 대답했다.

“예... 맥주랑 제철 과일이랑 이것저것 사왔어요. 잇시키에서 드시라고...”

부담스럽겠지만 미래의 사위가 시댁 생각해서 주는 거니까, 그냥 받아라.

소녀처럼 입을 가린 미도리가 감사를 전했다.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는데... 정말 고마워. 잘 먹을게, 마츠다 군.”

“아닙니다.”

“마츠다 군은 해수욕장에만 있을 예정이니?”

“맞아요.”

“그러면 같이 먹자. 우리끼리만 먹으면 미안하잖니.”

미유키의 가족들이라면 저렇게 말할 줄 알고 먹거리로만 사왔지.

손사래를 친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그냥 잇시키까지 신세만 지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같이 먹자. 혼자 가는 거라면서? 계속 수영만 하고 놀진 않을 거 아니야.”

“그래도 가족들끼리 가는 여행인데...”

“혹시 우리가 부담스러운 거니?”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럼 됐지?”

“아, 그게...”

나는 어찌해야할 바를 모른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연기였다. 미유키가 먼저 나서서 같이 먹자고 하도록 만들려는.

예상대로, 카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미유키가 다가오더니 괜찮다는 듯 방긋 웃어보였다.

“그렇게 하자, 마츠다 군. 언니도 괜찮대. 방금 아빠도 좋다고 했어.”

계속 거절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가식은 그만 떨자.

나는 미도리와 와타루를 쳐다보며 아까처럼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와타루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박수를 짝 하고 쳤다.

“결정됐네. 이제 출발할까?”

“짐 싣는 거 도와드릴게요.”

“그래줄래?”

“예.”

그렇게 와타루와 함께 짐을 실은 나는, 그의 세단을 타고 잇시키로 향했다.

내 자리는 왼쪽 창가였다. 그 옆에 미유키가 앉았고.

오늘 미유키의 샴푸냄새는 체리인가? 향기로워서 좋다.

나는 미유키,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벤트가 일어날 때 취할 행동강령을 되새겼다.

이번 이벤트는 해수욕장에서 일어나고, 테츠야와 경쟁이라고 봐도 좋았다.

놈이 깝치기 전에, 내가 먼저 달려드는 게 핵심이다.

그리고 나는 그럴 준비가 되어있다.

테츠야는 이번에도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손가락만 빨게 될 것이다.

놈이 이벤트가 시작되는 타이밍을 정확히 꿰고 있는 나보다 먼저 선수를 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난 도키아카의 주인공 자격이 없지.

아니 근데 이 양물은 왜 이러지? 미유키와 다리를 맞대고 있어서 그런가?

시도 때도 없이 꼴리려 하고 지랄이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고. 진정해 새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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