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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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마츠다가 미유키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푹 쉬어라.”
“응...”
마음만 같아선 마츠다와 함께 밤의 해변가를 거닐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중엔 테츠야도 불러서, 3명이서 같이 야키토리를 먹으며 친목을 더 다지고 싶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하기엔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을 것 같았다.
가뜩이나 구해줘서 고마운데다, 집에 가려는 걸 배고프다는 이유로 잡았었는데... 또 부탁을 한다면 자신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리라.
근데 꼭 가야하나?
자신의 가족들이 호텔까지 잡아준다고 했는데 한사코 거절을 하다니.
사고가 일어나서 오늘 제대로 놀지도 못했는데... 뭔가 서운하다.
아니면 기껏 던져준 튜브 대신 마츠다의 머리통을 잡아서 물에 빠뜨리려고 한 그 일 때문에, 자신에게 정나미가 완전히 떨어져버린 것일지도...?
아니, 그건 아니다.
그랬다면 마츠다의 성격상, 자신과 밥도 먹지 않고 돌아갔을 테니까.
이런저런 망상에 빠져있던 미유키는,
“그럼, 집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신세 한 번만 더 질게요, 아저씨.”
마츠다가 와타루에게 예의 바른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부탁하는 언변이 좋다.
예전에 거지한테 욕까지 곁들어가며 마구 화를 냈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
그렇게 생각하니 마츠다가 달라져도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게 와 닿는다.
“신세는 무슨... 당연히 해줘야하는 건데... 피곤할 텐데 얼른 가자.”
“예.”
마츠다는 미유키를 향해 밥을 먹는 시늉을 했다.
기름이 많은 음식 대신 담백한 건강식으로 잘 챙겨먹으라는 의미였다.
미유키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얕은 미소를 흘린 마츠다가 와타루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나도 가고 싶었는데...’
더 놀지 못한다면, 차선책으로 마츠다의 집까지라도 같이 가고팠다.
어른 앞이라 장난을 최대한 자제하는 마츠다를 놀리고 싶었다.
하지만 병원에서 긴 외출은 금지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다.
슬쩍 입맛을 다신 미유키는 병실로 돌아가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미유키, 자고 있어?]
테츠야의 메시지가 와있다.
시간은 한 시간 전쯤.
그에게 미안함을 느낀 미유키가 답신을 보냈다.
[연락 늦게 해서 미안해. 마츠다 군이 간다고 해서 배웅하느라 늦었어. 나 아직 안 자.]
[그러면 잠깐 나와서 산책할래? 네가 좋아하는 야키토리 사갈게.]
야키토리라... 먹고 싶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은 늦은 시간이고, 결정적으로 마츠다가 기름진 것을 먹지 말라고 했다.
자신의 몸을 생각해줘서 하는 말이었으니만큼, 오늘은 자제하자.
[야키토리는 안 먹을래. 병원 근처에서 잠깐 산책하는 거라면 괜찮은데... 올래?]
[바로 갈게. 조금만 기다려.]
[응.]
테츠야와의 대화를 마친 미유키는 상체를 일으켰다.
왠지 힘이 나지 않는다. 만사가 다 귀찮은 느낌이다.
놀리고 싶은 마츠다가 없으니까 그런 것일지도.
그래도 테츠야가 자신을 생각해서 오는 거니까... 힘내자.
미유키는 슬리퍼를 좀비처럼 질질 끌면서 병실을 나섰다.
**
미유키에게 사고가 일어난 지 이틀이 지난 아침.
“.... 다 군!”
잠결에 요에서 뒤척이던 나는,
“마츠다 군! 집에 있어?”
딩동!
카랑카랑한 미유키의 목소리와 초인종 소리가 귀에 확 꽂혀오자 벌떡 일어났다.
거실에서 나와 신발을 대충 우겨 신고 정문으로 향한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문을 열었다.
철컥.
문틈으로 날 보며 방긋 웃는 미유키가 눈에 잡힌다.
완전히 괜찮아진 듯한 모습을 보니 기쁘다.
나는 최대한 졸린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에게 턱짓했다.
“뭐냐...? 지금 몇 신데...?”
“일곱 시.”
“아침 일찍부터 잔소리하러 왔냐...?”
“두 시간 뒤에 수업 시작할 건데, 일곱 시면 일어날 때 됐잖아.”
“수업...? 내일부터 한다고 합의했었지 않았나?”
“개학이 2주도 채 안 남았는데 스퍼트 올려야지. 안 그래?”
“그렇다고 연락도 없이 오냐...?”
“그건 미안해. 몇 번이나 전화해도 안 받길래 그냥 왔어. 마츠다 군한테 주고 싶은 것도 있어서...”
주고 싶은 거? 뭔데? 몸?
그러고 보니 미유키의 손에 큼지막한 보따리가 하나 들려있다.
날 위한 선물인가?
“미우라는 나중에 온대?”
“일어나면 오라고 톡 남겨놨어. 근데 머리 엄청 뻗쳐있다... 잠꼬대가 심하나보네?”
마음껏 놀려라. 선물 가져왔으니까 봐준다.
대신 마음에 안 드는 선물이면 다리 벌려라.
미유키와 함께 거실로 간 나는, 흐느적흐느적 움직여 원탁을 설치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는 요와 이불을 본 미유키가 날 나무랐다.
“요 좀 똑바로 펴고 자지...”
“자느라 흐트러진 거야. 잔말 말고 선물이나 뜯어봐.”
심술을 부리는 내게 무어라고 투덜거린 미유키가 원탁에 보따리를 올려놓았다.
음식 냄새가 은은하게 퍼진다.
이거 설마... 내가 고대하던 그건가?
미유키가 잘 묶인 보따리를 풀자, 그 안에서 큼지막한 벤또 상자가 나왔다.
“도시락 싸왔어. 오늘 아침은 이걸로 먹어.”
나만을 위한 도시락! 드디어...!
여태까지 해왔던 일들이 빛을 발하는구나!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애써 꾹꾹 눌러 담은 내가 물었다.
“도시락?”
“또 간장계란밥 먹을 것 같아서.”
통을 열어보니 볶은 당근, 브로콜리, 시금치 같은 야채류와 함께 데리야키 소스가 곁들어진 고기와 쌀밥이 보였다.
이 외에도 여러 밑반찬이 박스를 꽉꽉 눌러 담고 있다.
쌀밥 위에 캐릭터가 그려져있지 않은 게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선물이다.
미유키, 오늘은 다리 오므리고 조신하게 있어도 돼.
나는 놀란 얼굴로 미유키를 쳐다보았다.
“이거 만들려면 엄청 고생했겠는데...?”
쑥스럽다는 듯 시선을 피한 그녀의 입이 우물거렸다.
“집에 있는 게 대부분이야... 아, 그리고 엄마가 언제 한 번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식사하쟀어. 꼭 왔으면 좋겠대.”
그랬어? 메인요리는 너랑 카나랑 미도리겠네?
들어갔더니 세 명이 에이프런만을 입은 채로 다리를 벌리고 주인님을 맞이하는 거지.
관계 장소는 미도리와 와타루가 쓰는 안방이 좋겠다.
배덕감이 장난 아닐 것 같아.
“날 잡아서 갈게.”
“그거 기약 없는 말 아니야? 언제 올 건지 확실하게 정해야지.”
너도 내가 빨리 조교해줬으면 좋겠나보구나.
“네가 정해 그럼.”
내 이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미유키가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러면 내가 날짜 정할게. 도시락 식기 전에 얼른 먹어.”
미유키가 가져온 귀여운 젓가락으로 밥과 반찬들을 입에 넣고 씹은 나는,
“어때...?”
조마조마한 것 같은 미유키를 보면서 음식물을 삼켰다.
그리고는 다시 입 안으로 밥을 가져가며 물었다.
“내일도 싸와 주냐? 이거 엄청 맛있는데...”
만족스런 표정을 지은 미유키가 눈동자를 위로 향하게 했다.
고민을 하는 듯한 모습.
얼마간 그러고 있던 그녀가 대답했다.
“생각해볼게.”
생각 같은 소리하네.
한 번 도시락 맛을 보면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단 말이야...!
“싸와.”
“마츠다 군, 누누이 말하지만 부탁을 해야지. 싸주라고 해봐.”
그건 네가 해야 할 말 아니냐?
얼싸, 입싸, 질싸... 말만해.
“우리 착한 하나자와라면 싸올 거라고 믿어.”
‘우리’ 라는 말에, 미유키가 흠칫하더니 입을 앙다물었다.
묘하지? 내가 무슨 의미로 저런 말을 한 건지 막 상상되고 그러지?
나중에 개학하면, 네 동성 친구들한테 넌지시 하소연해봐.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미유키의 반응을 구경하면서 도시락을 먹었다.
**
미유키는 개학을 코앞까지 앞두게 된 날까지 네 번의 도시락을 더 싸와주었다.
매일매일 받고 싶었으나 새벽녘에 일어나야하는 고충을 이해하기에, 난 칭얼대지 않고 미유키가 도시락을 가져올 때마다 아주 맛있게 먹기만 했다.
그녀는 테츠야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듯싶었다.
매번 내가 도시락을 다 먹을 때마다, 빠르게 설거지를 하더니 따로 갖고 온 가방에 넣고 숨기듯 했던 것이다.
테츠야가 질투를 할까봐 걱정스러운 건지,
아니면 테츠야가 그걸 보면 자신에게도 도시락을 싸 달라 할까봐 일부러 숨기는 건지는 미유키만 알겠지.
‘오늘이 마지막 수업인가?’
달력을 본 나는 뿌듯한 마음에 기지개를 켰다.
미유키와의 데이트도 많이 했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기존에 있던 이벤트와 내가 만들어낸 추가 이벤트도 잘 해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연애를 향해 뛰어갈 시간.
그리고 부상에서 돌아온 렌카를 만나고, 그녀에게 일정량의 호감도를 쌓아놓을 때다.
“마츠다 군! 이거 뭐야!?”
저 밖에서부터 약속시간에 딱 맞춰 온 미유키의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터덜터덜 걸어 나와 문을 연 나는,
“와... 이거...”
어제 저녁에 도착한 자동차를 구경하고 있는 테츠야와 미유키를 흘겨보았다.
“니들 뭐하냐?”
닳을 정도로 자동차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테츠야가 물었다.
“마, 마츠다... 차 샀어?”
“산다고 했잖아. 계약했던 거 어제 왔어.”
“아무 말도 안 하길래 흐지부지된 줄 알았는데... 장난 아니네... 이거 비싼 차 아니야?”
“그냥저냥 하더라. 디자인 괜찮지?”
내가 산 자동차는 SUV였다.
트렁크가 커서 캠핑을 가기에도 좋고, 카섹스를 하기에도 좋고...
공간이 넓어서 미유키에게 은밀한 장난을 치기에도 좋고.
장점이 무척 많은데 일반 세단을 살 이유가 없잖은가.
“응... 디자인 예쁘다...”
“모레 아침에 여기로 와라. 학교까지 태워다줄게.”
일단은 친구들에게 선심을 쓰는 시늉을 하면서 똥찌꺼기 테츠야도 같이 태우고, 나중엔 갖다 버려야지.
“진짜? 그래도 돼?”
차의 색상을 유심히 보고 있던 미유키의 물음이었다.
네가 저번에 골랐던 색이지? 마음에 들어?
“어. 전철 타기 귀찮잖아.”
“딱히 귀찮아한 적은 없는데...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내가 이 중대사를 말하지 않아 서운한 듯하다.
“말했었다니까.”
“그래도... 계약했다는 말은 안 했잖아...”
“앞으로는 꼬박꼬박 보고할게. 됐냐?”
“.... 아니 뭐...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앞으로는 이런 큰 사건 같은 거 생기면 우리한테 언질 좀 해주고 그래... 놀랐잖아...”
우리가 아니라 너한테만이겠지.
무안한 듯하지만 은근히 기뻐하는 미유키를 바라보며 피식한 나는, 두 사람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뒤 안으로 들어가 차키를 가져왔다.
삑!
버튼을 누르자 청량한 소리와 함께 잠금이 해제되는 문.
운전석을 연 내가 말했다.
“타.”
“마츠다 군...! 우리 수업...”
“5분도 안 걸리는 건데 뭐 어때서 그래. 얼른 타라.”
통보하듯 말한 나는 운전석에 타고 문을 닫았다.
그러자 미유키와 테츠야가 허둥지둥하며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조수석에 누가 타야할지 고민하는 모양.
결국 두 사람은 양쪽 뒷좌석 문을 열고 차에 나란히 올라탔다.
쾅!
이런 개새끼가 남의 차 문을 세게 닫고 지랄이야.
족족 비호감 짓을 해대는데, 너 한 번만 더 그따구로 하면 니네 가족에 스며들어버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 여동생, 그리고 엄마한테.
반면 우리 미유키는 조신하게 문을 닫네.
너무 좋아... 너는 저런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랑 예쁜 사랑을 하자.
룸미러로 두 사람이 바짝 긴장한 모습을 본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전벨트 매라.”
“아, 알았어...!”
이구동성으로 저리 대답하더니 허겁지겁 벨트를 찾는 미유키와 테츠야.
둘에게 겁을 준 나는 사이드를 해제하고, 기어를 변경한 뒤 브레이크에 올려놓았던 발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부드럽게 출발하기 시작한 자동차.
나는 여유롭게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두 사람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주었다.
어때? 미유키?
이정도면 조수석에서 빨아줄 수 있을 정도는 되지?
기대하고 있을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