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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5화 (25/313)

〈 25화 〉 개학 #2

* * *

“마츠다 군은 부활동 뭘로 할지 정했어?”

차 안에 있던 미유키의 물음이었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내가 대답했다.

“검도부.”

그러자 테츠야가 흠칫하더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 나도 검도부에 갈 생각이었는데...”

알아 새꺄. 네가 검도부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니.

지긋지긋한 놈...

“그러냐? 부활동 입부 신청이 내일인가?”

“맞아.”

“수업 끝나면 같이 가자.”

“알았어.”

우리의 대화를 듣던 미유키가 돌연 물개박수를 쳤다.

“잘 됐네? 둘이 쭉 붙어 다니면 되겠다.”

미유키는 분명히 타카시를 의식하고 있었다.

양아치인 그가 내 곁에 있으면 다시 질이 나빠질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쭉’이라는 부사까지 붙여 강조할 정도면 확실했다.

“뭐래...”

“그런데 왜 하필 검도부야? 테츠야 군은 예전부터 검도에 관심이 많았는데... 마츠다 군도 그랬어?”

“그냥 멋져보여서 신청하려고 했는데.”

“그, 그래...? 그 이유가 끝이야...?”

아니, 렌카를 꼬시는 게 목적이야.

“어.”

“마츠다 군 답네...? 검도부 면접을 볼 때 그런 얘긴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왜? 떨어져?”

“그건 확답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한테 첫인상은 좋게 가져가야하지 않을까...?”

아니지.

나쁜 새끼가 갱생하는 모습이 시종일관 순진하고 착한 사람보다 임팩트가 큰 법이란다.

네 경우를 보면 답이 나오잖아.

그래도 걱정해줘서 고마워. 네 조언은 한 번 생각해볼게.

“너는? 부활동 할 거냐?”

미유키의 대답은 잘 알고 있다.

“나는 부활동은 안 하구, 학생회에 신청서를 내볼까 생각 중이야.”

그래, 학원물에 학생회가 안 나오면 쓰나.

학생회, 풍기위원회의 히로인이 주인공과 엮이면서 꽁냥대는 건 러브 코미디의 국룰이지.

야겜이나 19금 만화의 경우는 주인공의 마수에 걸려들어 점점 빗치화되거나.

“너랑 딱 어울린다.”

“고마워. 꼭 합격하고 싶어.”

무조건 합격하게 될 거야.

넌 1학기동안 선배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쌓아왔거든.

네가 신청하지 않는다고 해도 먼저 스카웃하려고 할 걸?

도키아카에선 학생회가 풍기위원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나중에 미유키가 정문을 지키며 지각생들에게 경고를 주거나 훈계하는 날이 있다는 뜻.

그때 일부러 지각해야지.

날 타박하는 미유키에게 은근슬쩍 스킨십을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에게 씨익 웃어주면서 봐달라고 하는 거다.

교칙과 사랑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다음부터는 꼭 제 시간에 오라고 그냥 넘어가주는 미유키...

그러면서 내 손가락 하나를 남들 몰래 꼬옥 잡는 상황...

이거 바로 풀발기 가능하거든요?

두 사람과 담소를 나누며 운전을 한 나는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차를 정문에 댄 내가 말했다.

“여기서 내려. 차량 등록하러 가야 돼.”

“아, 그래? 미리미리 좀 하지...”

“개학 첫날부터 잔소리냐?”

“마츠다 군이 잔소리를 하게 만드는데 어떡해... 그러면 여기서 기다릴까?”

“아니. 먼저 가.”

아까보다 약간 진중해진 내 태도에, 미유키가 당황스러워하더니 대답했다.

“아, 알았어...”

**

부자들이 많이 다니는 아카데미가 아니라서, 학생 주차장은 한산했다.

차량 등록을 마친 나는 좋은 자리에 차를 대어놓았다.

가방끈을 한쪽 어깨에만 매고 정문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미유키 쨩! 잘 지냈어?”

같은 학년 여자들이 미유키에게 삼삼오오 모여드는 것을 보았다.

역시 인기가 많아. 미유키에게 연심을 품은 남자들도 한 트럭이 넘어가겠지?

근데 저 ‘쨩’이라는 요비스테는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

모두에게 환영을 받는 미유키와 쩌리 테츠야를 흘끔거린 나는, 경로를 후문으로 바꾸고 혼자 교실로 향했다.

이후 복도에 진입했을 즈음, 저 멀리서부터 타카시가 달려오자 질색을 했다.

“켄! 켄!”

“아침부터 재수 없게...”

“말 존나 심하게 하네? 저번에 구해준 은혜는 잊었냐?”

“구해주긴 무슨... 내가 다 쳐맞을 때까지 쫄아선 아무 말도 못하던 놈이.”

“흐흠... 그래도 집까지 데려다줬잖냐.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 네 기대치에 비해서 아주 만족스런 일이긴 했다.”

“거 봐. 오늘 서클 회의에 참석할 거지?”

참석? 죽어도 안 해.

미니 야쿠자 놀이는 이제 니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복도에 우뚝 멈춰선 내가 타카시를 불렀다.

“타카시.”

“엉?”

“회의에 야마구치 선배도 오냐?”

타카시가 무슨 당연한 이야기를 하냐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지. 서클 보스신데.”

야마구치.

내가 저번에 생각했듯, 3학년이 되고 나서 정신을 일부 차린 놈.

난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성격을 갖게 된 이놈을 이용해서 서클을 탈퇴할 예정이다.

“보스는 개뿔... 야, 너 오늘 회의에 가면, 야마구치 선배한테 내가 서클을 탈퇴할 거라고 전해.”

내 기억 상, 개학 후에 있는 서클 회의는 1교시가 시작되고 나서 열릴 거다.

그러면 대충 점심시간쯤엔 불려가려나?

“....?”

두 눈을 끔벅거리는 타카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회의, 가면, 야마구치한테, 서클, 탈퇴, 한다고, 전해, 알았냐?”

또박또박 선명하게 재차 말을 해주자,

“무, 뭐어어어!?”

타카시가 기겁을 하며 굉장한 리액션을 했다.

‘에에에에~?’ 같은 일본 특유의 리액션이 아닌 게 어디냐.

귀에 팍 꽂히는 어마어마한 목청에 귀를 후비적거린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타카시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꼭 전해줘. 부탁한다.”

그리고는 입을 떡 벌리고 있는 타카시를 놔두고, 라커에 가방을 대충 집어넣은 뒤 책을 몇 권 꺼내고 1­A반에 들어왔다.

여기도 오랜만이구나.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은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안엔 열댓 명의 학생들이 해후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교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분위기가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심지어는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려는 학생들도 보였다.

방학 전날까지 바뀌려는 태도를 보였고, 사고도 치지 않았음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전부 잊힌 거다.

이거 참 슬프구나. 내가 얼마나 열심히 화장실 청소를 했는데.

미유키만큼은 날 알아주니까, 그거면 된 거지.

좋게 생각하기로 한 나는 책상 서랍에 책을 집어넣었다.

우리 양호선생님의 치료주머니는 그대로일까?

서클을 탈퇴한 뒤에 가서 확인해봐야겠다.

세상에 초연한 눈빛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던 나는,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자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미유키가 테츠야와 함께 들어오고 있다.

학생들이 날 컨트롤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자 반장인 그녀에게 밝은 인사를 건넨다.

그들의 인사를 모두 받아준 미유키는, 표정을 살짝 굳인 채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마츠다 군, 아까 정문에서 우리 보지 않았어? 왜 무시하고 그냥 가?”

태연스럽게 내 곁으로 다가와 온화한 목소리로 따지는 미유키.

교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미유키가 먼저 사근사근 말을 걸어줘서 놀랐냐? 이 새끼들아?

방학 때 그렇고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주변 눈치를 본 나는 미유키에게 작게 속삭였다.

“오늘은 아는 척하지 마라.”

“응?”

“하지 말라면 하지 마.”

그리 말한 나는 테츠야에게 미유키를 데려가라는 눈치를 주었다.

의외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놈은, 미유키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유키. 오늘은 마츠다의 말대로 하는 게... 일단 자리에 앉자.”

하지만 미유키는 나와 테츠야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거 때문이지? 서클...”

그래도 목소리는 낮춰줘서 다행인가?

“맞아. 그러니까 좀 가라고.”

“교수님들한테만 말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마음만 같아선 지금 바로 말씀드리고 싶지만... 마츠다 군이 당부했으니까 참고 있는 거야. 아는 척하지 말라는 건 너무 나갔어.”

서클 탈퇴는 기존에 없던 이벤트다.

오늘만으로 딱 끝낼 자신은 있다.

하지만 내가 전부 주도하는 이벤트가 아니어서 뒷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 자그마한 후폭풍 하나라도 미유키에게 주기 싫은 것이 내 바람이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로 미유키를 쳐다보고 있자, 그녀가 물었다.

“탈퇴만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누가 탈퇴한대?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저번에 눈으로 말했잖아.”

“무슨 독심술사도 아니고... 니들 엮이는 거 걱정해서 이러는 거니까 내 말 들어. 저번에 나 믿는다고 했지? 그러면 오늘은 내 말대로 해줘.”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일까?

미유키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한층 누그러진 태도로 한 발 물러났다.

“.... 좋아. 하지만 저번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가만 두고 본다고는 못하겠어. 마츠다 군이 우릴 걱정하듯이, 우리도 마츠다 군을 걱정하니까.”

지금의 미유키의 입장 상, 저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예상은 했지만 감동이야...!

지금 당장 화장실로 와.

한 판 하자. 못 참겠어.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미유키가 꺼림칙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안도했다.

**

“방학들 잘 보냈지? 출석 부르고 바로 수업 시작한다.”

인자하게 생긴 영어교수의 말에, 학생들이 우! 하며 야유를 보냈다.

그에 너털웃음을 터뜨린 교수가 말했다.

“25분만 수업하고, 나머지 시간은 쉬게 해주마. 단, 모든 사람들이 수업에 집중했을 경우에만.”

그 말에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

음... 저 두려움이 섞여있지만 강렬한 눈빛을 보라.

너희들의 기대... 잘 알았다구?

“뭘 봐.”

인상을 팍 쓴 채로 학생들을 노려보자, 시선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만 미유키만큼은 예외.

온화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삭막하게 굴지 말라고 말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

뻘줌해진 척 머리를 긁은 나는 얌전히 책을 폈다.

그러자 교수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마츠다 군이구나. 일찍 왔네?”

“예, 뭐...”

“방학 전에 꾸준히 청소를 해서 그런지, 교수님들께서 놀랍다고 하시더군. 주말에도 청소를 했다고 들었는데 맞나?”

그 얘긴 누구한테 들었지? 미유키는 아닐 테고...

그때 방명록에 이름을 적으라고 했던 경비원인가?

아니면 교수?

어찌됐건 저 교수는 날 탐탁찮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목소리가 꽤나 나긋한 걸 보면, 교수진 사이에서의 내 이미지가 알음알음 좋아지고 있나보다.

역시 배운 사람들이라서 그런가, 청소해준 은혜도 다 까먹은 학생들과는 다르네.

남친, 남편 있는 젊은 여교수님들, 대물자지 여기 있습니다.

마음껏 다리들 벌리세요.

“주말에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몰랐지만, 방학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갔습니다.”

“좋은 자세야. 그러고 보니 책도 가져왔군. 이제 정신을 차리려는 건가?”

“수업 안 해요?”

껄렁한 내 말투를 웃어넘긴 교수가 말했다.

“알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도록.”

감히 날 무시해?

미유키와의 수업으로 다져진 내 실력을 보여주도록 하지.

라고 생각하던 나는, 출석을 다 부른 교수가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나름 열심히 했다고 자부했는데 따라가기가 힘들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으니 위안을 삼자.

내 수업태도가 마음에 들었을까?

수업을 하는 와중에도 날 계속 눈짓하던 교수는, 약속대로 25분을 채운 뒤 학생들에게 쉬는 시간을 주었다.

잡담을 할 거면 조용히 하라고 말한 그는, 머리를 싸매고 있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을 텐데?”

“하는 데까진 해봐야죠. 다른 애들 시간도 뺏기 싫고... 지금 하나만 알려주실래요?”

그 말에 교수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그러마. 어디가 이해가 안 가지?”

“여기 이 비문 찾기요. 죄다 비문으로 보여서 못 찾겠어요.”

“좋아. 하나하나씩 천천히 해볼까? 일단 이 문장에선...”

본격적으로 날 가르쳐주는 교수.

10분가량의 지도를 받은 나는 완벽하게 비문을 찾아냈고, 교수의 칭찬을 들었다.

“방학 동안 정말 열심히 했나보구나. 아주 잘했다.”

“제가 한다면 하는 편입니다.”

뿌듯한 얼굴로 거들먹거린 나는, 피식 웃은 교수가 다른 학생들에게로 다가가는 것을 보다가 미유키와 눈을 마주쳤다.

‘잘했어.’라고 입모양으로 말하는 미유키.

나처럼 뿌듯한 표정이다.

애써 그녀를 무시한 나는 책으로 눈을 돌려 남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종소리가 치며 수업이 끝나고, 교수가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드르륵! 쾅!

미닫이문이 큰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복도에서부터, 아지트에서 봤던 2학년 선배들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마츠다 켄! 이 새끼 어디 있냐?”

나는 속으로 만세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이놈들이 요란을 떨면 떨수록, 서클이 와해될 가능성과 내가 학교 측에게 용서받을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지금 뭐하는 건가? 아무리 쉬는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2학년이 1학년 교실에 와서 비속어를...”

인상을 구긴 교수의 엄한 말투에도, 선배들은 콧방귀를 꼈다.

교수를 완전히 무시한 그들이 날 발견하고는 말했다.

“당장 옥상으로 와라.”

점심에 시간이 많을 때 부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빠르다.

설마 쉬는 시간 10분 안에 탈퇴수속을 끝낼 건 아닐 테고...

그냥 2교시는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인 건가?

하긴, 교칙이란 교칙은 다 어기고 다니는데 수업 하나쯤은 관심도 없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태연한 걸음걸이로 선배들 앞까지 다가갔다.

“갑시다.”

일이 끝나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겠지?

미유키는 아직 학생회가 아니니, 그 자리에 없을 테고...

날 변호해주는 그녀가 보고 싶은데, 아쉽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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