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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6화 (26/313)

〈 26화 〉 하나자와가 아니라, 미유키.

* * *

‘야마구치’라는 성씨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적어도 나는 각진 얼굴, 그리고 남자다운 눈매가 생각난다.

다만 주연 급 이름은 아니다.

조연, 혹은 단역이 딱 적당해.

나는 지금 그 단역인 야마구치를 보고 있었다.

높은 철창이 둘러진 옥상 난간에 앉아있는 그.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심한 표정이다.

몸 한 번 장난 아니다.

만드는데 5년은 걸렸겠는데.

그의 주위엔 서클에 소속된 양아치들이 꽤나 많았다.

개중에는 날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타카시와, 이빨을 뿌드득 갈고 있는 사모야마도 있었다.

건들건들한 팔자걸음으로 야마구치의 앞으로 가자, 발끈한 사모야마가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야마구치가 입을 열자, 이도저도 못한 채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츠다 켄.”

목소리는 평범하다.

나처럼 중저음이 아니어서 다행이군.

질투 날 뻔했잖아.

“예.”

“서클을 탈퇴하고 싶다고?”

제대로 전했구나. 장하다 타카시.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왜지?”

야마구치는 좋게 말하면 패기가 있는, 나쁘게 말하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기어오르는 사람들을 기개가 있다며 좋게 본다.

솔직한 사람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핑계거리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말하자.

“다른 아카데미랑 패싸움이나 하는 짓들을 보니까 한심해서 그냥 탈퇴하려고요. 우리 고딩 아니잖아요.”

내 말에 발끈한 사람은 야마구치가 아니라, 사모야마였다.

“뭐 이 개새끼야?”

야마구치의 옆에 있던 놈이 내게 다가와 주먹을 들었다.

당장에라도 한 대 갈길 것 같은 모습.

야마구치가 그런 사모야마를 조용한 목소리로 말렸다.

“그만.”

“.... 예, 선배.”

깨갱하는 모습이 볼만하다.

“가족을 등지겠다는 건가?”

이어서 질문하는 야마구치의 말.

가족은 무슨... 이라고 말하며 코웃음을 치고 싶지만 자중하자.

“예. 등지고 싶습니다. 더 이상 이런 애들 장난은 하기 싫어요.”

이 말을 할 때, 나는 눈을 부릅뜨고 야마구치를 쳐다보았다.

내 진심이 그에게 전해지도록 말이다.

이런 내 마음을 느꼈을까?

얼마간 굳게 닫혀있던 그의 입이 열렸다.

“탈퇴 룰은 알고 있겠지?”

알고 있다.

소지 하나를 자르라는 것.

옛날 야쿠자들이나 할 법한, 고리타분하기 그지없는 족쇄다.

“손가락 하나를 자르라는 게 말입니까? 똥입니까? 솔직히 이것 때문에 탈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꽤나 있을 걸요?”

“그런가?”

“그런 셈이죠. 손가락 자르긴 싫고요. 그냥 먼지 나게 맞을 테니 이걸로 봐주십시다.”

생각해봐라, 야마구치.

너도 이런 야쿠자 놀이가 한심하잖아.

다만 여태까지 쌓아온 정, 그리고 서클에 소속된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서 못 나가는 것뿐이잖아.

기회가 있으면 탈퇴를 긍정적으로 고민해볼 사람이 너지?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

슈프리 서클은 오늘부로 완전히 해산.

네가 어떤 처분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양아치 기가 조금은 남아있는 만큼 달게 받아라.

“흐음...”

고민을 하는 듯한 야마구치.

왠지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것 같다.

“신나게 얻어맞는 걸로 끝내자고 네가 그랬겠다?”

“예.”

“그럼 그렇게 하지. 단, 서클에서 활동했던 모든 것들은 발설하지 않는 조건이다.”

“좋습니다.”

그래, 내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서클에 소속된 놈들의 입장도 살피지 않을 수 없겠지.

제안을 받아들여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서, 선배...!”

사모야마의 당혹스런 외침이 들려왔다.

이어서 서클 소속의 모든 엑스트라들이 술렁거리기까지...

단단한 돌덩이 같은 야마구치가 1학년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고깝나보다.

꼬우면 니들도 야마구치의 성격을 분석하고, 어떤 식으로 공략할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든가.

“사모야마.”

“예...?”

“네가 때려라.”

그 말에 사모야마의 입꼬리가 대번에 올라갔다.

이놈은 고까운 게 아니라, 그냥 날 조지고 싶은 거였어.

마침 나도 사모야마가 날 때려주길 바라니 불만은 없지만...

넌 진짜 아웃이긴 하다.

“얼마나 조질까요?”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알겠습니다.”

그림은 다 그려졌다.

이제 쳐맞기만 하면 돼.

“방학 때부터 말도 존나게 안 듣더니... 너는 씨발 뒤졌다고 복창해라.”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사모야마의 말.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저번 아지트 때처럼 고개를 숙이면서 맞진 않을...

뻐어억­!

놈을 얕보고 있던 내 고개가 묵직한 사운드와 함께 돌아갔다.

한 방에 입이 터진 것 같은데... 아지트에서 맞았을 때보다 더 아프다.

그냥 비굴하게 엎드려서 맞을까?

아니다. 한 번 가오를 잡았으면 그대로 유지하자.

그러면 야마구치가 사모야마를 말려줄지도 몰라.

돌아간 고개를 원위치 시킨 나는 입을 오물거리면서 안에 고이기 시작한 피를 옆으로 뱉어냈다.

그리고는 최선을 다해서 씨익 웃었다.

피로 덧칠된 이빨을 본 사모야마가 더욱 분노하도록 말이다.

“이런 미친 새끼가 어디서 눈을 부라리고...”

뻐억!

예상대로 내 도발에 넘어간 사모야마는 본격적으로 날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뻐억! 뻑!

앞으로 부활동도 해야 하니까, 저번처럼 뇌진탕이 올 정도로 맞아주지는 말자.

사모야마가 타격감을 느낄수 있게끔 적당히 잘 맞는 거다.

라고 생각하던 나는,

턱!

사모야마가 와사바리로 속칭하는 모두걸기를 시전하자 좆됐다고 직감했다.

하긴... 세상만사가 내 생각대로 되라는 법은 없지.

근데 난 주인공 아닌가?

단역한테 굴욕이나 당하고... 물론 내가 자처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좀 너무하네.

쿵!

**

얼마나 맞았을까.

서른 대까지는 세어봤는데 그 이후는 잘 모르겠다.

꽤 오래 맞은 것 같은데 정신이 엄청 멀쩡하다.

사모야마가 물주먹은 아닌데... 주인공의 맷집 버프인가?

은근히가 아니라, 아주 많이 버틸만하다.

입이 터진 것만 빼고 말이다.

“허억... 허억...! 이 씨발 새끼가 자꾸 쳐막네...!”

때리는 것도 슬슬 지쳐가는지 거친 숨을 토해내는 사모야마.

흘끗 야마구치를 보니 슬슬 나서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야마구치보다 타카시가 더 빨랐다.

“이런 개새끼...! 야 이 씨발놈아! 그만 때려!”

더 이상 내가 맞는 걸 두고 보지 못했는지, 고래고래 욕을 쏟아내며 사모야마를 향해 달려들려고 했던 것이다.

욕지거리를 들은 사모야마의 표정이 마구 구겨지는 순간,

덜컹! 덜컹덜컹!

굳게 잠긴 옥상 문에서부터 큰 소리가 들려왔다.

끼릭...! 끼기긱...!

이어서 무언가를 따는 소리까지...

나는 교수진, 그리고 학생회가 달려왔다고 직감했다.

아마도 쉬는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날 걱정한 미유키가 저들에게 말했겠지.

우리 미유키는 오지랖이 넓으니까.

철컹!

모두가 당황함에 굳어버린 사이, 옥상 문의 문고리가 뜯겨나가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부터 학생회 마크를 가슴팍에 끼고 있는 몇 명의 학생들과, 체육교수를 필두로 교수진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것들이...!”

야마구치와 비슷한 덩치를 가진 체육교수가 으르렁거리다가, 일어나는 날 보고는 흠칫했다.

“너... 괜찮냐...?”

히죽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터진 입에서 게워져 나오는 피를 계속 삼키며 땅에 떨어진 휴대폰을 집었고, 야마구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작게 끄덕여지는 그의 고개.

탈퇴수속이 끝났음을 알리는 행동이었다.

드디어 마츠다 켄이 싼 똥을 치우고, 유치한 서클에서 벗어난다.

원래의 나와는 관계가 거의 없는 집단임에도 해방감이 장난이 아니다.

개고생을 하긴 했어.

나는 군중들을 헤치며 옥상을 나섰다.

중간에 어떤 젊은 교수가 부축해주겠다고 했지만 혼자 가겠다고 했다.

날 부축해주는 사람은 미유키여야 해.

그나저나 지금은 2교시 시간 아니던가?

수업을 해야 할 상황임에도 여러 교수진과 학생회가 같이 올라올 정도라면 사건은 제법 크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친다...’

정신은 괜찮지만 육체가 지쳤다.

누적된 데미지는 어디 가지 않아서, 가드했던 팔이 상당히 아려온다.

얼굴도 얼얼하고 말이다.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던 나는, 2층 복도에 그냥 주저앉았다.

그렇게 숨을 돌리고 있으면서 구경을 하러 오는 학생들을 눈빛으로만 물리고 있는데,

“꺄아아악!!”

허둥지둥 계단을 올라오던 미유키가 날 발견하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내 얼굴과 제복 상의에 묻어있는 피를 보더니 양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는 그녀.

아지트에서 얻어터진 다음 날 보여줬던 것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인상을 팍 구긴 나는 지친 기색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왜 이렇게 시끄럽냐... 고막 떨어지겠다. 조용히 좀 해라...”

목소리가 괜찮아보였을까?

미유키가 내게 천천히 다가오더니 말했다.

“마, 마츠다 군...?”

“왜.”

“괜찮아...?”

“괜찮지 그럼.”

“얼굴에 피가... 막... 옷에도...”

“그냥 찢어진 거야. 다른 데는 멀쩡해. 확인시켜줄까?”

벌떡 일어나려는 내 손목을, 미유키가 황급히 잡아챘다.

“아, 앉아있어...! 내가 양호선생님 데리고 올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그리고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다.

“가지 마.”

하지만 낮게 가라앉은 내 목소리를 듣고는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힘없는 미소를 지은 나는, 입 안에 모인 피를 한 번 삼키고 옆 계단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나랑 있어.”

“.... 그래도 피가...”

“나랑 있으라고.”

“.....”

점잖아진 내 태도에 당혹스러워하던 그녀는, 이내 다시 다가와 내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리고는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에 난 상처 주변을 닦아내주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네가 부른 거지? 저 사람들.”

“.... 맞아. 마츠다 군이 옥상으로 간지 5분이 지나도 안 오길래... 교무실에 말했어...”

“뭐라고 말했는데?”

“걔네들이 옥상에서 엄청 큰 사고를 치고 있다고...”

그랬어? 잘했네.

“고작 5분가지고 서클을 탈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냐?”

“나는 마츠다 군이 이해가 안 돼. 왜 굳이 불법 단체의 룰을 따르려고 해...? 나나 테츠야 군에게 불똥이 튈까봐 우려해서라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교칙 내에서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는데...”

“오늘은 날 믿어준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고작 5분도 채 못 참은 거면... 날 별로 믿지 않았다는 뜻이네?”

“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마츠다 군은 지금쯤 실려 갔을 거야.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너무 걱정돼서...”

“됐어. 잘 끝났으니까 이번엔 넘어가줄게.”

미유키의 고개가 확 들렸다.

“잘 끝났다구...?”

“어. 탈퇴했어. 만나자마자 쳐맞으면서 반격도 안 하니까, 날 좋게 봐줬는지 탈퇴시켜주더라. 나는 너와는 달리 약속 지켰다.”

“.... 무슨 약속...?”

“네가 싸우지 말라며. 그래서 안 싸웠어. 애초에 싸울 생각도 없었고.”

미유키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얼마간 가만히 있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날 향한 타박이었다.

“누가... 싸우지 말랬다고 15분이 넘게 맞고만 있냐고... 나도 그런 짓은 안 해...!”

15분이나 지났었어?

오래 맞았네.

“그럼 그렇게 말을 했었어야지.”

장난스런 내 농담에, 미유키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 미안해...”

미안해? 그러면 바니걸 복장이랑 망사스타킹 입어줘.

간호복이나 경찰복도 좋아.

미유키의 눈에 습기가 차는 게 보인다.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른 내게 정말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자신을 만나고 나서부터 빠르게 갱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고맙기도 하겠지.

손수건을 쥔 미유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저러면 피 묻는데.

나는 미유키의 주먹에서 삐죽하게 튀어나온 손수건을 손가락으로 튕겨댔다.

“야.”

“.... 왜애...!”

“나 잘했지?”

“잘했어... 잘했다구...!”

대답을 하는 톤이 마치 삐친 여자친구가 앙탈을 부리는 것 같다.

미유키의 반응을 보며 낄낄거린 나는, 미유키의 얼굴이 일그러지려고 하는 타이밍을 틈 타 말했다.

“그러면 이제 미유키라고 부른다.”

미유키라고 불러도 돼?

조금 더 편하게 호칭해도 돼?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냥 나답게, 통보하듯, 장난 식으로, 중의적인 표현을 했다.

이렇게 해도 진심은 전해질 것이다.

원래 나는 이랬으니까.

미유키도 내가 이런 사람인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렁그렁한 눈으로 한참동안 날 주시하며 침묵하던 그녀는, 이내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울먹이며, 날 나무라듯 대답했다.

“마음대로 해... 이 바보야...”

이런 상황을 빗대어 욕을 먹었는데도 기쁘다고 하는 건가?

승낙의 답변을 들으니 기분이 좋다.

나는 미유키를 향해 아주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러자 미유키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돌리며 픽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 이빨 좀 잘 닦고 다녀... 웃기잖아...”

새하얀 이빨 사이사이에 묻어있는 피가 분위기를 깬 것 같은데... 쪽팔리지만 뭐 어때.

지금처럼 본의 아니게 사고도 내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기 서툴러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헷갈려하고,

종국에는 서로를 향한 사랑을 깨닫고.

이런 게 청춘이고, 러브 코미디 아니겠는가.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학교 안팎에서 벌어지는 클리셰를 겪어나가며 사랑을 키울 시간.

렌카와의 관계도 발전시켜놓으면서, 미유키와 은근슬쩍 스킨십을 해나가며 그 수위를 높여가자.

요즘 애들 빠르잖아?

눈만 맞아도 서로 물고 빠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썸을 타면서도 그렇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법이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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