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옥상에서의 점심
* * *
룸미러를 흘끗거린 나는 테츠야가 미유키와 담소를 나누고 있자 인상을 구겼다.
병문안도 안 와놓고 염치가 없네.
하... 이 거머리 같은 새끼.
방해하는 기술 하나만큼은 경지에 올랐다고 인정해주마.
그녀들의 동네에 차를 대어놓은 나는,
“고마워, 마츠다 군.”
“고마워, 마츠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저리 말해오자 히죽 웃었다.
“들어가라, 미우라. 미유키도 잘 가고.”
테츠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삐걱삐걱 돌아가며 미유키에게로 향하는 고개.
내가 방금 부른 호칭에 어지간히 놀랐나보다.
그런 테츠야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인 미유키가 말했다.
“우리 많이 친해졌잖아.”
“.... 아... 음... 그렇긴 하지. 조금 놀랐을 뿐이야.”
너는 지금 석 달이 안 되는 시간임에도 미유키와 급속도로 가까진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미유키를 유일하게 이름으로 부르던 남자였는데, 한 명 더 생겨버려서 어떡하냐? 꿀꿀하지?
한 방 먹이니까 기분이 그나마 나아지네.
조수석 창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미유키가 날 불렀다.
“마츠다 군, 혼자 갈 수 있겠어?”
“방금도 혼자 운전했는데?”
은연중으로 나만 쏙 빼놓고 대화한 두 사람에게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런 내 반응을 눈치챈 미유키의 낯빛에 미안함이 서렸다.
슬쩍 테츠야를 살핀 그녀가 가방에서 메론 맛 우유를 꺼내 조수석에 놓았다.
“얼마 안 걸리겠지만... 가면서 마셔. 혹시 집에서 어지러우면 나한테 바로 전화해. 알았지?”
나는 말없이 우유갑을 까서, 그것을 한 번에 들이켰다.
쭉쭉 없어지는 달달한 액체.
순식간에 그것을 해치운 나는, 벙 찐 미유키의 손에 빈 우유를 들려주었다.
“맛있네. 간다.”
“아, 응...”
그렇게 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 상처에 닿지 않게 조심스런 샤워를 마치고 벌러덩 누우니 잠이 솔솔 온다.
오늘 너무 피곤한 일들을 하긴 했다.
우우웅!
충전기를 꽂아놓은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미유키겠지.
조금 텀을 둔 나는 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마츠다 군,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먹고 싶은 거?
혹시 지금 따로 만날 생각인 건가?
배는 딱히 고프지 않지만... 미유키와의 데이트는 무조건 참가해야지.
[튀김.]
[튀김? 그러면 텐동 괜찮아?]
[텐동 좋지.]
[알았어. 내일 텐동으로 가져갈게. 점심 같이 먹자.]
도시락을 싸가겠다는 소리였구나.
데이트보다 더 기쁘다.
얼굴이 대번에 밝아진 나는 열정적으로 키패드를 두드렸다.
[나도 준비할 거 있어?]
[아니, 괜찮아. 오늘 미안했어, 마츠다 군.]
아까 뒷좌석에서 테츠야와 둘만 쑥덕댄 것이 마음에 걸렸나보다.
[농담 한 번 한 거야. 나 잔다.]
[벌써 자? 혹시 막 머리가 띵하거나 그래?]
[그런 거 없어. 조금 피곤해져서 자려고.]
[그래...? 알았어. 푹 쉬어.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해.]
아까 했던 말을 또 하며 당부를 하는 미유키... 너무 사랑스러워...
[알았다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 미우라한테 미리 나와 있으라고 전해.]
[응.]
원래라면 여기서 방학 때 배웠던 것들을 복습하라고 닦달했을 텐데.
오늘은 내가 고생한 걸 잘 알아서 그냥 넘어가주네.
미유키와의 문자를 마친 나는 내일을 기대했다.
미유키의 도시락, 그리고 렌카가 있는 검도부에 입부...
같은 아카데미 소속 히로인 두 명을 동시공략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힘들겠지만 할 수 있다.
비중은 미유키에게 많이 두자.
어렵게 그녀의 호감도를 쌓아놨고, 지금 물이 콸콸 들어오고 있다.
이때 노를 저어놔야 맞는 거지.
**
드르륵.
미유키, 테츠야와 함께 교실로 들어온 나는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동급생들의 시선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묻어나와 있었지만, 어제 1교시 시작 전만큼은 아니었다.
내가 서클을 탈퇴했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인데...
퍼뜨린 사람은 미유키인가? 아니면 학생회인가?
“마츠다.”
생각에 잠겨있는 나를 부르는 테츠야.
그를 바라본 내가 대답했다.
“왜.”
“오늘 미유키 손에 들린 거 봤어?”
“봤지. 도시락 같은 거던데.”
“평소 미유키가 먹는 양을 생각하면 보따리가 크잖아. 아무래도 우리 건가봐. 미유키가 만든 도시락은 처음 먹어보지?”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는 것 같은데... 같잖은 도발이다.
테츠야야, 넌 이래서 안 된다.
남자답지 못하잖아.
“뭐... 처음이기는 하지.”
사실 방학 때 먹었었단다.
그것도 너 몰래.
그리고 오늘도 널 쏙 빼놓고, 미유키와 단둘이서 먹을 예정이지.
“진짜 맛있으니까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아.”
“그러냐? 지금 미유키한테 말해줄까? 네가 도시락을 엄청 기대하고 있다고?”
“그건 좀... 제발 참아주라.”
순식간에 안절부절 못하는 태도로 변한 테츠야에게 피식 웃어준 나는, 교수가 큰 상자 하나를 안고 들어오자 책상에 엎드렸다.
상자를 교탁에 내려놓은 교수가 말했다.
“어제 심각한 사건이 하나 있었지? 사건의 주인공은... 자는 건지, 아니면 자는 척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보이진 않지만 느껴진다.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꽂히는 것이.
“반장.”
“네, 교수님.”
“이거 애들 시켜서 나눠줘라. 마츠다가 사는 거다.”
“네...? 마츠다 군이요?”
의자가 조용히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약간 든 나는 미유키가 교탁 앞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어제의 테츠야마냥 입을 벌리는 그녀.
속으로 끅끅댄 나는 다시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음... 앞자리에 앉은 학생들은 이거 뒤로 전달해주세요.”
미유키의 목소리 속에 뿌듯함이 담겨있다.
내가 사온 선물인 노트와 잉크 볼펜 세트를 보고 기뻐하는 모양.
하나에 몇 만 엔이나 하는 고급 브랜드는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브랜드의 상품을 심사숙고해서 골랐지.
학생들이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후,
툭.
내 머리 위에서 약간 묵직한 느낌이 일었다.
설마 앞자리 돼지가 내 머리 위에 노트를 놓아둔 건가?
감히 내게? 넌 뒤졌다.
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은은한 살구 냄새가 흘러들어와 코를 간지럽혔다.
이건 오늘 미유키의 머리카락 냄새다.
고개를 슬쩍 옆으로 들어보니, 과연 미유키가 날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한테만큼은 특별히 직접 전달해주러 왔구나.
쑥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에 검지를 올리자, 그녀의 눈가가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다.
“고마워, 마츠다 군. 잘 쓸게.”
대놓고, 제법 큰 소리로 감사를 표하는 미유키.
나는 자포자기한 척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이 머뭇거리더니, 날 향해 고맙다고 전해왔다.
이런 거 너무 오글거려서 싫어. 난 미유키의 호감도만 있으면 된단 말이야.
어색하기 그지없는 사람인 양 인사를 받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는데, 미유키가 내 책상에 노트를 올려놓더니 총총걸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향해 갔다.
저 음탕한 뒤태... 너무 좋아.
의외라는 듯 날 쳐다보고 있는 앞자리 통통남에게 인상을 팍 구기고 있던 나는,
“2교시 때 수업 방해해서 미안했던 거지?”
옆에서 테츠야가 저런 말을 하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넌 그걸 꼭 직접적으로 물어봐야겠냐?
“마음대로 생각해라.”
“고맙다, 잘 쓸게.”
대충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자 교수에게 집중했다.
**
옥상에서 히로인과 함께 먹는 점심은 러브 코미디의 대표적인 클리셰다.
오늘 그 클리셰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기쁜 마음으로 먼저 올라와 미유키를 기다리려고 했다.
근데... 옥상 문이 잠겼다.
입구에 표지판이 세워져있었는데, 어제의 불미스런 일 때문에 잠깐 잠궈놓는다고 쓰여 있었다.
곤란한 상황. 그러나 타개책은 얼마든지 있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나는 복도 옆 벽에 있는 창문을 열어보았다.
부드럽게 열리는 창. 잠겨있지 않을 줄 알았다.
왜? 주인공이 여길 타넘는 것도 클리셰거든.
폴짝 점프하여 창문턱에 손을 짚고, 힘을 주어서 올라가려고 하는데,
“마, 마츠다 군...! 뭐하는 거야...! 당장 내려와...!”
도시락 통을 들고 계단을 올라오던 미유키의 경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인 나는 잽싸게 창문을 넘었다.
아슬아슬하게 난간을 타고 옥상 바닥에 발을 내딛은 나는 옥상 문을 열었다.
철컥.
그러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유키가 내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미쳤어...? 그러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그리고 이거 들키면...”
“안 떨어졌으니까 됐고, 우리만 조용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 그러니까 그만 때리고 들어오기나 해. 그러다가 들키겠다.”
그 말에 미유키가 뒤를 홱 돌아보더니, 우물쭈물해하다가 안으로 들어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진짜 속편하게 산다... 도시락 괜히 싸온 것 같아...”
벽에 등을 기대고 철퍼덕 주저앉은 내가 말했다.
“스릴 있고 좋잖아.”
“스릴은 무슨... 불안하기만 한데...”
나중엔 여기서 떡도 칠 건데, 미리미리 적응해두렴.
콧방귀를 낀 나는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미유키가 자신의 허벅지로 손을 가져가, 제복 치마를 정리하며 조신하게 자리에 앉았다.
쌓아놓은 2단 도시락 통을 바닥에 내려놓기 시작하는 그녀.
문득 테츠야가 뭘 하는지 궁금해진다.
미유키가 알아서 잘 핑계를 대고 처리하긴 했겠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말자.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오긴 했는데... 물렁해졌을 거야.”
도시락을 연 미유키의 말이었다.
분홍색 젓가락을 집어든 나는, 통을 집어 들고 단호박 튀김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미유키의 말마따나 튀김 특유의 바삭함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맛있다.
밥까지 입으로 가져가 씹어 삼킨 내가 말했다.
“맛있네. 내일도 만들어와. 아니... 만들어줘.”
“싫어. 또 창문 타넘을 거잖아.”
“밥 다 먹고도 한 번 더 타야 되는데? 문을 다시 잠그려면 어쩔 수 없잖아.”
“잠그지 말고 나가. 내가 어떻게든 열쇠 받아와서 처리할게.”
“그럼 앞으로는 열쇠로 열고 오면 되겠네.”
“안 돼. 이건 오늘로 끝이야.”
위험한 짓을 한 내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유키가 눈썹을 좁히며 날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아주 맛있게 밥을 먹어대기 시작하자, 힘없는 실소를 터뜨리며 자신 또한 텐동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도시락을 다 먹은 우린, 통을 잘 정리해놓고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이 예쁘다. 날씨도 오늘따라 정말 좋고, 바람도 선선하게 분다.
미유키가 다 먹었으면 내려가자고 말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시원하다...”
맞바람을 맞으며 눈을 지그시 감는 미유키.
기다란 속눈썹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는, 아주 조용히 몸을 움직여 미유키에게 완전히 달라붙었다.
팔과 팔이 맞닿자 놀랐을까?
미유키가 눈을 번쩍 뜨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뭐하는 짓이냐고 묻거나, 몸을 빼지는 않았다.
그냥 가만히, 내 옆모습을 쳐다보기만 했다.
태연한 척 하늘로 시선을 돌리며 미유키의 반응을 살피던 내가 지나가듯 말했다.
“다음에도 오자.”
“.... 싫다고 했어.”
“너도 여기 마음에 들잖아.”
“아닌데...”
누가 봐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인데 아니긴 무슨.
“그럼 매일은 아니더라도, 가끔 정도는 괜찮지?”
“.... 옥상... 문 안 잠겨있으면... 가끔... 엄청 가끔은 괜찮을 것 같아.”
유혹에 홀라당 넘어간 자신이 창피했을까?
미유키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일단 오늘 잘했다고 해줄게... 옥상 넘은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교실에서 동급생들한테 사과의 선물을 준 일을 말하는 거야. 내용물도 마음에 들더라. 노트랑 펜... 오래 쓸 수 있는 거고, 공부할 의욕도 솟아나게 해주는...”
억지로 말을 늘려가는 미유키에게 피식한 나는 미유키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근데 돈 많이 썼겠...”
앙다물어진 그녀의 입.
그 틈을 탄 나는 그녀의 머리를 아주 살살 헝클어뜨리며 반응을 살폈다.
“.....”
얌전하다.
이정도 스킨십은 괜찮은 듯한 모습.
안심한 나는 미유키를 어린아이 다루듯 칭찬했다.
“쪼만한 게 어른을 칭찬하네?”
“마, 마츠다 군이 너무 큰 거야... 멀대같아가지구...”
망가진 앞머리를 정리하며 툴툴대는 모습을 보니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미유키의 앞으로 가서 양손을 뻗었다.
“더 시원한 곳 알아. 거기서 조금만 쉬다가 내려가자.”
“.... 응.”
스스로 일어날 수 있었음에도, 미유키는 그러지 않고 천천히 손을 뻗어 내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내 힘에 이끌려 바닥에서 엉덩이를 뗀 미유키의 얼굴은 붉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약간 상기되어있었다.
‘이대로만 가자.’
이대로 단둘이 있는 시간과 스킨십 횟수를 늘려가면서, 적응이 됐다 싶었을 즈음 수위를 높이자.
그런 식으로 미유키의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는 내 크기를 불리면서, 테츠야는 지워나가는 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