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9화 (29/313)

〈 29화 〉 이노오 렌카 (Sub : 나나세 치나미)

* * *

“입부 신청서는 썼어?”

미유키의 물음에, 테츠야가 밝은 낯으로 종이 한 장을 흔들어보였다.

점심에 떨거지 용 도시락을 처먹고 기분이 좋아졌나보지?

나는 미유키랑 옥상에서 은밀한 데이트를 하며 먹었단다.

고개를 주억거린 미유키는 이번엔 날 쳐다보았다.

“마츠다 군 거는?”

“써놨어, 엄마.”

“엄마라니...?”

“준비 다 했는데 자꾸 뭘 챙겼냐고 물어보는 거... 엄마 맞잖아.”

“.....”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미유키.

그러려니 하던 그녀는, 내 음흉한 표정을 보고는 자신의 고운 미간을 좁혔다.

“무, 뭔데...?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봐?”

“뭐가?”

“이상한 말... 하려고 했지...!?”

응. 맘마는 안 주냐고 물어보려고 했어.

“이상한 말? 어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마냥 뻔뻔한 태도를 보여주자, 미유키가 손부채질을 하며 날숨을 뱉어냈다.

“후... 됐어...!”

너 나랑 같은 생각했구나?

조교가 잘 진행되고 있군.

그렇게 점점 야해지면 되는 거야.

“마츠다... 미유키가 곤란해 하잖아.”

테츠야가 옆에서 꼽사리를 껴온다.

눈치 챙겨라. 넌 지금 도키아카의 주인공이 아니야.

그런 대사는 나만 할 수 있다고.

“아니,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자기 혼자 넘겨짚은 거잖아. 난 억울하다고.”

“그래, 그래. 얼른 검도부에 가자. 이러다가 늦겠다.”

등을 떠밀려는 테츠야를 가볍게 뿌리친 나는,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키고 있는 미유키에게 진중한 투로 말했다.

“학생회 꼭 붙어라.”

“.... 응, 고마워.”

“붙으면 나중에 교문 지킬 때, 나 지각해도 봐줘.”

“그럴 일은 절대 없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츠다 군은 죽어도 안 봐줄 거야.”

과연 그럴 수 있나 보자고.

미유키의 앙칼진 대답에 실소를 터뜨린 나는, 테츠야와 함께 검도부실로 향했다.

드디어 두 번째 히로인을 볼 시간이다.

이노오 렌카.

그녀는 아카데미 내에서나 집에선 머리를 묶고, 제복이나 검도부 도복만 입고 다니는 수수한 사람이다.

그러나 밖에서는 굉장히 세련된 사람으로 변한다.

헤어 모델처럼 여러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양한 패션을 보여준다.

웬만한 어중이들은 말도 제대로 못 걸 정도의 냉기를 풍기는 여자,

싸늘한 태도로 인해 접근하기가 어려운 여자.

겉으로 보이는 렌카는 약간 그런 쪽이었다.

하지만 속내는 따뜻하다.

온화한 미유키와는 전혀 다르게, 친해지기만 하면 츤데레처럼 틱틱거리며 잘 챙겨주는 츤데레 타입이다.

그리고 렌카에겐 비밀이 있다.

바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무지 좋아한다는 것.

코믹콘 참가, 굿즈, 피규어 수집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야애니까지 거리낌 없이 본다.

모든 장르를 가릴 것 없이 전부 섭렵하고, 집에서 자신이 모은 피규어를 보며 행복해하는 진성 씹덕.

도키아카 세계관에서 무척 큰 애니 커뮤니티 사이트에 리뷰글을 올리면 천 단위 추천은 기본으로 받을 정도로, 그쪽 세계에선 애니 분석가로 유명했다.

수수, 도도 츤데레, 씹덕.

삼중적인 모습을 선보여주는 극도로 희귀한 환상종.

지금부터 그 이노오 렌카를 보러 간다.

**

학원물의 동아리 필수요소는 뭘까?

열정적인 태도? 재능? 노력? 땀내 나는 우정? 라이벌?

아니면 열혈청년 같은 선배?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는 매니저라고 본다.

외모가 아주 빼어난 여자 매니저가 주인공을 좋게 봐서 따로 챙겨주는 그림...

그리고 히로인은, 주인공과 매니저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고 은근한 질투심을 느끼는 거지.

도키아카의 검도부에도 그런 매니저가 있었다.

이름은 나나세 치나미.

2학년이고, 미유키보다 더 쬐그만한... 아주 귀엽게 생긴 활기찬 매니저였다.

“안녕하세요! 검도부에 입부하러 오셨나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우릴 맞이하는 치나미에게, 테츠야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우왓! 목소리 커...!”

“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열의가 넘치는 것 같아서 보기가 좋네요! 저는 2학년 나나세 치나미라고 해요. 검도부의 매니저랍니다!”

발랄한 거 봐.

끝부분이 안쪽으로 조금 말려있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분홍색 머리가 매력적이야.

저기다가 사정 마렵네.

도키아카를 플레이할 때도 서브 히로인으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참에 제대로 노려볼까 싶다.

히로인이 많으면 공략하는데 힘이 들지만, 치나미는 렌카를 공략할 때 자주 만나게 돼서 접점도 꽤 있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저는 1학년 미우라 테츠야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배꼽인사를 하는 테츠야를 향해, 상체를 30도 정도로 숙이는 검도식 입례를 한 치나미가 날 바라보았다.

“얼굴에 상처가 많으신 그쪽 분은...?”

“마츠다 켄요. 1학년.”

“마츠다 켄...? 어디서 많이 들어봤... 아!!”

혼자 중얼거리다가 손뼉을 짝! 하고 치는 치나미.

테츠야와 내가 움찔하자, 그녀가 날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제 그 사건!! 징계위원회!!”

2학년들한테도 퍼졌구나.

하긴, 아카데미 내에서 문제가 많은 서클이고, 사건도 컸고, 게시판에 징계결과가 붙여졌으니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치나미를 내려다보았다.

“징계절차는 다 밟았는데, 혹시 입부에 문제가 있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 그냥 놀랐을 뿐이에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입부 신청서는 제게 주시고 얼른 들어가세요! 가장 앞자리에 있는 빈 방석에 착석하시면 돼요!”

테츠야와 나는 치나미에게 신청서를 주고 그녀를 지나쳤다.

“그, 글씨를... 못 알아보겠어... 엄청 악필...!”

내 신청서를 본 치나미의 자그마한 목소리.

그것을 들은 테츠야의 입에서 큽! 하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런 놈의 어깨를 팔꿈치로 찌른 나는 검도부 안으로 들어갔다.

검도부실 안은 무거운 분위기를 자랑했다.

새 학기 때 이미 입부를 한 1학년들이 몇 명 보였는데, 반 년 사이에 이곳에 적응했는지 말 한 마디 없이 무릎을 꿇은 채 정면을 보며 앉아있었다.

검도부의 총 인원수는 남녀 포함 서른 안팎.

그중 1학년은 별로 없었다.

1학기 때 입부신청을 한 학생들이 많았을 텐데, 아마 중간에 그만둔 모양이다.

새로 입부를 희망하는 학생들은 나와 테츠야를 포함해서 일곱인가?

2학기인 것을 감안하면 많은 숫자다.

빈 방석을 찾아 나란히 앉은 우린, 대충 주변 사람들을 따라 정좌를 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대기하길 얼마 후, 바깥에 있던 치나미가 들어오더니 부실 안에 따로 마련된 문에 노크를 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털복숭이 중년인 한 명과, 기다란 머리를 뒤로 묶어 포니테일을 한 여자가 나왔다.

‘렌카다.’

뽀얀 얼굴 안에 오밀조밀 들어간 이목구비.

새침한 눈과 짙고 기다란 속눈썹과 굳게 앙다문 입술...

훤칠한 키와 평범한 가슴...

내가 알던 이노오 렌카였다.

미유키를 보았을 때보다 두근거림은 덜하다.

하지만 그건 내가 이 도키아카에 적응을 했기 때문이지, 렌카가 아름답지 않다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렌카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나는,

“환영한다. 난 예보니 아카데미의 검도부 고문 겸 감독, 도지마 고로라고 한다. 감독님이라고 불러라.”

털복숭이가 입부 희망자들 앞에 서서 자신을 소개하자 정신을 차렸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이구동성으로 포효하듯 인사를 하는 입부 희망자들.

나만 쏙 빼놓고 말이라도 맞춘 건가?

인사할 타이밍을 놓쳐버렸잖아.

슬쩍 렌카의 눈치를 보니 엄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지가 깎였구나. 근데 지금의 내게 더 깎일 이미지가 남아있기는 한가?

“패기가 좋군. 여기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검도부장인 이노오 렌카고, 나와 함께 너희들을 지도해줄 믿음직한 사람이다.”

2학년임에도 부장이라.

실력이 빼어난데다 카리스마까지 있으니 모두가 인정을 해줬겠지.

렌카는 부상으로 인해 8월에 열린 전국 종합 체육대회에 참가하지 못해서 상태가 별로일 것이다.

그러니까 괜히 깝치다 공략불가 상태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잘 부탁드립니다! 부장님!””

씨발! 같이 좀 인사하자고 개새끼들아!

또 한 번 타이밍을 놓친 나는 반쯤 자포자기한 채로 고로의 환영사를 들었다.

**

“다음은... 마츠다 켄 후배님!”

상냥한 목소리로 날 부르는 치나미.

그녀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간 내가 대답했다.

“예.”

“크다... 실례가 안 된다면 신장이 몇인지 물어봐도 돼요?”

“187입니다.”

“와...! 어렸을 때 우유를 많이 드셨나보네요?”

“그냥 뭐... 좋아하긴 했네요.”

“저는 우유라면 질색을 했거든요. 지금은 좋아하지만... 싫어도 많이 마셔둘 걸 그랬네요.”

성장 환경도 중요하긴 하지만, 유전이 조금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근데 나는 지금 네 모습이 좋아.

무릎을 조금만 굽히면 펠라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담이 많았죠? 자, 여기 도복이에요.”

두 손으로 치나미가 내민 도복을 받아든 나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아니에요. 그리고 저희 검도부에서는 목례가 아니라 입례를 해요. 자, 절 따라해 보세요.”

치나미가 입부신청을 받을 때 테츠야에게 보여주었던 예법을 그대로 다시 했다.

삐걱삐걱 치나미를 따라한 나는, 그녀가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머리를 긁적이며 창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거기서 렌카를 마주쳤다.

팔짱을 낀 채 무감정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던 그녀가 말했다.

“마츠다 켄.”

“예?”

“감독님께서 네게 할 말씀이 있으시다니까, 감독실로 따라와.”

으음... 저 냉랭한 목소리를 빨리 앙앙거리는 신음으로 바꿔버리고 싶구나.

너 지금 집에서 무슨 애니를 볼지 고민하고 있지? 다 알아.

그녀의 뒤를 따라간 나는, 고로가 분위기를 잡고 앉아있자 어정쩡하게 선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날 보고 온화한 미소를 지은 고로가 맞은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앉아라, 마츠다.”

“예.”

머뭇머뭇 자리에 착석하자, 고로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넌 매니저부터 시작한다.”

“.... 예?”

감독님, 맞을래요?

왜 지랄이시지? 난 검도가 하고 싶단 말이에요.

“제가 뭐 실수했습니까? 혹시 아까 인사를 못 드린 것 때문이라면...”

“그것 때문이 아니다. 예법도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벌을 주는 건 한심한 짓이지.”

“그러면 왜...”

“검도는 죽도를 들고 치고받기만 하는 무술이 아니라, 심기체 단련을 중시하는 무도지. 무도를 수련함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예의다. 상하불문 존중, 단정한 몸가짐, 품위... 이러한 예를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야 비로소 신성한 죽도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

“그런데 네겐 이러한 예가 없다시피 하지. 지금까지의 네 행동을 돌아보면 느껴지지 않나?”

그래도 화장실 청소를 꼬박꼬박 했고, 미유키를 만지려는 치한도 물리쳤고, 폭력서클을 탈퇴하기까지 했잖아요.

갱생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아직 모자란 건 인정하지만, 참작을 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몹시 서운하네.

근데 결혼반지 끼셨네요?

열정이 넘치는 털보 감독의 와이프가 예뻐서 모두가 놀라는 장면은 학원 스포츠물 국룰인데... 조심하세요.

“.... 예. 그러네요.”

“솔직하게 인정하는 부분은 보기 좋군. 네가 진정한 무도를 수련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겠다. 일단은 나나세를 도와 검도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봐둬라.”

이러면 몇 개의 초반 이벤트를 놓치게 되어버리는데...?

어쩌면 그 이벤트가 테츠야에게로 갈 수도 있다.

최악 그 자체. 렌카 공략은 존나게 힘들어질 것 같다.

하지만 치나미에게 일대일 과외를 받을 수 있는 건 장점.

그녀는 매니저임과 동시에 정식 검도부원이다.

스스로 매니저를 자처할 정도로 인품도 좋고, 실력도 꽤 좋아서 대회 단체전에 꾸준히 참가하는 멤버이기도 하다.

날 잘 케어해줄 테고, 렌카와의 사이도 좋으니...

내가 긍적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렌카에게 좋은 말을 해줄 수도 있겠지.

당분간 치나미와 시간을 보낼 일이 많을 것 같은데...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치나미도 메인 히로인으로 삼아버릴까?

심기체가 완벽한 처녀이고, 먼저 공략해두면 렌카를 함락시키는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안 삼을 이유가 없지 않?나?

“알겠습니다. 그러면 뭐부터 해야 할까요? 나나세 선배한테 가면 돼요?”

순순히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고로와 렌카의 눈이 약간 크게 뜨여졌다.

의외라는 얼굴이다.

저 반응을 보니, 잘하면 초반 이벤트를 챙길 수 있을 것도 같다.

미유키와 꽁냥대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삼되, 부활동도 최대한 열심히 하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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