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데이트 이벤트
* * *
치나미와 함께 매니저를 하게 된 나는, 물개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그녀와 함께 비품실로 이동했다.
“마츠다 후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치나미한테는 어떻게 맞춰줘야 하지?
텐션이 너무 높아서 따라가기가 힘들다.
일단은 지켜보자.
“잘 부탁드립니다, 나나세 선배... 님.”
“네! 자, 오늘은 호구를 청소하는 방법부터 알려드릴 거예요. 호구는 들어보셨죠?”
“예.”
“그럼 검도에서 사용하는 호구의 각 부위 명칭은 뭘까~요?”
갑자기 퀴즈를 낸다고?
깜찍하네.
호구에 대해선 조사를 해서 알고 있긴 하다.
하지만 치나미가 무언가를 알려주고 싶은 티를 내는 것 같으니까...
한 가지를 빼먹어보자.
“호면, 호완, 갑요.”
“오...? 잘했지만 한 가지를 빠뜨렸네요. 힌트를 드릴게요. 호구 중에서 가장 먼저 착용하는 부위인데...?”
“잘 모르겠습니다.”
“음! 모르면 알려드려야지요!”
내가 모르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치나미가 가장 구석에 있는... 허리와 국부를 보호하는 갑상을 꺼냈다.
그리고는 갑상을 내게 보여주며 설명했다.
“이건 갑상이라는 건데요. 허리와 허리 아랫부분을 보호해주는 장비랍니다.”
무게가 제법 있을 텐데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는다.
힘이 좋다는 뜻. 그렇다면 조임도 좋겠군.
“중요한 장비네요?”
“암요! 중요하죠! 초보자에겐 특히나 중요한 장비에요. 서투른 대련을 하다가 실수로 급소를 찌르게 되면... 아프겠죠?”
그거 끔찍하군.
갑상을 다시 제자리에 놓은 치나미가 손가락을 하나하나씩 접으며 말을 이었다.
“호면, 호완, 갑, 그리고 갑상... 이렇게 네 부위가 검도의 장비에요.”
“알겠습니다. 익혀둘게요.”
“좋은 자세에요, 마츠다 후배님. 이 호구를 매일, 꼼꼼하게 청소해주는 게 저희의 일과 중 하나랍니다.”
“매일이요?”
“그럼요. 검도를 하다보면 조금이라도 미루면 호구에서 냄새가 나게 돼요. 호면을 착용했는데 퀴퀴한 냄새가 풍긴다면... 엄청 짜증나겠죠? 히힣.”
헤픈 웃음을 터뜨리는 치나미.
냄새 페티시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 예.”
“아카데미 내에서 무료로 지급해주는 것이지만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소중히 관리해줘야 다음에 호구를 물려받을 사람들도 같은 마음을 먹는 거예요.”
대충 알았다. 네 레벨... 이 아니라 성격.
철저하게 맞춤 교육으로 조교해주마.
“이해했습니다.”
“좋아요. 이제 호구를 청소하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일단은 약한 알콜을 솜에 묻혀서...”
**
“아... 그래서 마츠다 군은 매니저로 입부하게 된 거야?”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내 설명을 전부 들은 미유키의 말이었다.
“그렇다니까.”
“어떡해? 운동부 매니저는 진짜 힘들다던데...”
“오늘 신나게 호구만 닦았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 좀 하지...”
“내려. 너 걸어가라.”
“싫어. 다리 아파.”
새초롬하게 대답한 미유키가 테츠야에게 물었다.
“테츠야 군은? 오늘 뭐 배웠어?”
“예법이랑 죽도 파지법.”
“예법? 그 검도 인사법 같은 걸 말하는 거지?”
“응. 앉는 방법이랑 이것저것 배웠어.”
“무도가 분들이 예의 차리는 거 엄청 절도 있지 않아?”
“절도라기보다는... 기합이 들어간 거지.”
“나중에 보여줘. 왠지 멋져 보일 것 같아.”
테츠야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멋지다는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모양.
저 새끼 혹시 미유키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생각하면서 막... 발기하는 건 아니겠지?
헤벌쭉한 면상을 보니까 약간 그런 쪽인 것 같긴 한데...
“그럴게.”
“마츠다 군이 문제네. 얼른 순해져야할 텐데... 그 선배 매니저분한테 실례라도 저지르진 않을까 걱정이야.”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
이제는 주제도 모르고 깝치는 경지까지 왔구나.
장하다, 테츠야.
[미유키 잉태 기록]이라고 적힌 비디오가 보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해봐.
나는 테츠야의 집에 들러, 놈을 먼저 내리도록 했다.
“고맙다, 마츠다.”
“빨리 사라져.”
“내일 보자. 미유키, 나중에 연락해줘.”
이제는 이 정도 도발엔 꿈적도 하지 않고 제 할 말을 하는군.
손을 흔드는 놈을 무시하며 악셀을 밟은 나는, 미유키의 집 앞에 차를 대어놓았다.
이후 차에서 내리려는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미유키.”
“응...?”
“학생회 붙었지?”
“아... 응. 붙었어. 일단은 서무부터 시작이야.”
“축하한다.”
갑작스레 진지해진 내 태도에, 미유키의 몸이 빳빳해졌다.
“고, 고마워...”
미유키는 분위기를 말랑말랑하게 바꾸면 항상 부끄러워한다는 말이지.
그러다가 막상 데이트를 하게 되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가, 끝무렵에는 또 다시 저렇게 몸을 배배 꼰다.
쑥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히죽 웃은 나는, 콘솔박스를 열어 미리 준비해둔 상자를 꺼냈다.
위에 손잡이가 달린, 윗부분이 아치형으로 뭉툭한 미니 케이크 박스.
그것을 미유키에게 내밀자, 그녀의 눈이 두어 번 끔벅거렸다.
“이게 뭐야...?”
“학생회 데뷔 축하선물. 열어봐.”
그 말에 미유키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박스를 열었다.
아주 조심조심 포장을 푼 그녀는,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감탄을 터뜨렸다.
“와아...”
내가 미유키에게 준 선물은 케이크였다.
층층마다 딸기가 들어가 있고, 생크림으로 꽃을 만들어 그 위에 큼지막한 딸기 하나로 데코를 한 미니 케이크.
미유키는 내가 이런 것을 사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촐한 선물이긴 해도, 지금의 그녀는 크다고 느낄 것이다.
직접 만들지 못해 아쉬운 게 흠이지만... 나중에 만들어주면 되지.
나는 케이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미유키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서무라... 나처럼 잡일을 도맡아하는 직책이네?”
“.... 어? 응? 뭐라구?”
감상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선 내 말도 듣지 못한 미유키.
장난을 치는데 실패한 나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맛있게 먹으라고.”
“나, 나는 아무것도 준비 못했는데...”
“바라지도 않았다. 얼른 들어가라.”
“지금 가...?”
선물은 잘 줬는데 그 이후의 무드가 없지?
내가 원래 그래. 너도 잘 알잖아.
“들어가서 혼자 몰래 먹어라? 너네 언니한테 뺏기지 말고.”
“아, 안 뺏기거든...?”
“들어가.”
“알았어... 그럼... 갈게, 마츠다 군.”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미유키가 느릿느릿 차에서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며 뒤를 흘깃거리는 그녀.
양손엔 케이크 상자를 아주 소중한 듯 들고 있다.
부우웅...
차를 출발시킨 나는 사이드 미러를 통해 멀어지고 있는 미유키를 살폈다.
현관문 앞에서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쪼그려 앉고 있는데, 열쇠를 떨어뜨린 것 같다.
덤벙대기는.
9월부터 슬슬 문화제 준비에 들어갈 텐데, 그 전에 이벤트 하나만 챙겨놔야겠다.
@@
책상 모서리에 팔을 괴고, 그 위에 턱을 올린 미유키의 입꼬리가 짜악 찢어졌다.
그녀는 지금 마츠다가 준 케이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제과사의 정성이 들어간 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케이크.
심지어 자신이 좋아하는 딸기가 듬뿍 들어가 있어 더욱 마음에 든다.
영화관에서 있었던 사고 대처나, 아니면 서클 탈퇴 전후에 보여주었던 사려 깊은 모습이나...
섬세한 면이 있는 건 알고 있긴 했지만, 이런 선물까지 준비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도 선물을 줘야 할 텐데...’
도시락은 너무 식상하고... 쿠키라도 구울까?
한동안 케이크를 보며 마츠다에게 할 보답을 생각하던 미유키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지금쯤이면 집에 도착했겠지.
그리 생각한 그녀가 카메라 어플을 켰다.
‘음...’
케이크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미유키는 케이크 주변에 있는 공책과 교과서를 정리하고, 후다닥 부엌으로 내려가며 다소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혹시 예쁜 접시 있어?”
그에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미도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예쁜 접시? 그건 왜? 아... 그 케이크 담으려고?”
“응. 있어?”
“콕 집어서 말하긴 힘드네. 내 눈으로 보는 모든 식기들은 다 예뻐 보여서.”
우문현답이었다.
무안한 듯 머리를 꼬며 접시를 찾아보려던 미유키는,
“2, 3년 전쯤 고등학교 수학여행 갔을 때인가? 그때 네가 사온 접시 예쁘던데 그거 쓰지?”
거실에서 TV를 보던 와타루의 말이 들려오자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테츠야와 함께 샀던, 가장자리에 벚꽃이 수놓아진 자그마한 접시.
그걸 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자주 쓰던 물건인데.
구석 선반을 연 그녀는,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그 접시를 꺼내 미도리 앞에서 머뭇거렸다.
접시를 씻고 싶은데 미도리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딸의 그러한 마음을 알아차린 미도리가 실소를 터뜨리더니 고무장갑을 낀 손을 뻗었다.
“줘. 씻어줄 테니까.”
그러자 멋쩍은 미소를 지은 미유키가 접시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마른 행주를 들고 까치발을 들었다 놨다 하며 자신의 다급한 속내를 표현했다.
이윽고 접시를 씻어 미유키에게 돌려준 미도리가 물었다.
“케이크는 테츠야가 준 거니? 아니면 하루카?”
“아니. 나 바쁘니까 이만 올라갈게. 고마워, 엄마.”
“알았어. 근데 마츠다 군은 언제 온대니? 네가 날짜 정하기로 했다며.”
부엌에서 나가려던 미유키가 멈칫했다.
“날짜 아직 안 정했는데...”
“빨리 정해. 미적대다간 흐지부지되겠다.”
“알았어... 나 올라간다?”
“그래.”
대화를 끝낸 미유키는 끄트머리에 토끼 캐릭터가 그려진 포크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후 케이크가 망가지지 않게 아주 조심조심 꺼내,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가장자리에 포크까지 걸쳐놓으니 모양이 그럴싸했다.
그 상태로 사진을 찍은 미유키는 마츠다와의 대화방에 들어가, 사진을 첨부해놓고 메시지를 입력하려고 했다.
[너무 예뻐서 못 먹겠어.]
뭔가 모자란데...
뒤에 그림 기호를 하나 넣어볼까?
[너무 예뻐서 못 먹겠어♥]
하트는 조금 그런가...? 경박해 보일 것 같긴 하다.
물결표나 느낌표는 심심해 보이고...
평소에는 하지 않던 고민을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미유키는, 그냥 기존의 문장을 보내놓고 추가로 캐릭터 이모티콘을 보냈다.
“.....”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답장이 오지 않는다.
샤워를 하고 있는 건가? 집으로 돌아가다 사고가 난 건 아니겠지?
극단적인 망상까지 하며 마츠다를 걱정하던 미유키는, 휴대폰에 진동이 울리자마자 냅다 잠금을 풀었다.
[미유키, 집에 잘 들어갔어?]
마츠다가 아니라 테츠야의 메시지였다.
그 안부 메시지를 본 순간, 미유키의 마음속에서 왠지 모를 실망감이 잠깐... 아주 잠깐 스쳐지나갔다.
그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말이다.
[응. 잘 들어갔지 그럼.]
[다행이다. 연락이 안 와서 걱정했잖아.]
그러고 보니 차 안에서 테츠야가 나중에 연락하라고 그랬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을 느낀 미유키는 가져온 접시의 사진을 찍었다.
케이크와 포크를 빼고, 가장자리만 보이도록.
[이거 뭔지 알아?]
[2년 전에 오키나와에서 수학여행 갔을 때 산 거 맞지?]
[맞아. 용케 맞췄네?]
[우리 추억이 깃든 물건인데 당연히 알아야지. 아직도 쓰고 있었어?]
[엄청 잘 쓰고 있어. 테츠야 군은 어때?]
[나도 가끔씩 반찬 덜어먹을 때 써. 저거 보니까 생각나는 게 있는데, 내가 초등학생 때 사줬던 목걸이... 그대로 갖고 있어?]
답신을 본 미유키는 방 문을 쳐다보았다.
윗부분에 오른발을 든 귀여운 고양이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복을 가져다준다는 마네키네코를 목걸이로 만든 것이었다.
[물론이야. 내 방 천장에서 열심히 복을 부르고 있어.]
[그거 받고 귀엽다면서 애지중지하던 네가 기억에 남네. 그리고 오늘 학생회 붙은 거 축하해.]
[이제 와서?]
[미안해. 용서해주라.]
슬쩍 장난을 쳐봤는데 반응이 심심하다.
마츠다에게 저런 식의 메시지를 보냈다면, ‘축하한다는 말을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라.’ 같은 식으로 시큰둥한 답장을 보냈겠지.
[특별히 용서해줄게. 고마워, 테츠야 군.]
마츠다와의 대화를 상상해보며 테츠야를 달래주던 미유키는,
우웅!
진동이 울리면서 마츠다의 메시지가 화면 위에 나타나자 냅다 그곳을 터치했다.
[늦게 먹으면 살찌니까 지금 먹어라. 그리고 양치 꼭 해. 이 썩는다. 싫음 말든가.]
테츠야와는 전혀 다른 온도차의 답장.
단순한 글임에도 마츠다의 성격이 드러나 있다.
예전이었다면 예의가 없다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아니다.
마츠다답다고 해야 할까?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츠다 군은 츤데레야?]
[까불래?]
시답잖은 답신임에도 벌써부터 재밌다.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편 미유키는 그렇게 마츠다와의 대화에 빠져 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