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40화 (40/313)

〈 40화 〉 문화제 예고편

* * *

다음 날 아침.

미유키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간 나는, 집 앞에서 몸을 배배 꼬는 그녀를 발견했다.

어제 일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는지, 내 차를 발견했음에도 올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삑.

미유키의 앞으로 간 내가 클락션을 아주 짧게 울리자, 그녀의 어깨가 크게 달싹였다.

조심조심 조수석 문을 연 그녀가 어색한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 마츠다 군... 오늘 일찍 왔네...?”

“일찍 간다고 했잖아. 근데 애가 왜 이렇게 축 쳐졌냐? 얼른 타라.”

“응...”

천천히 올라타고는 무릎 위에 조신하게 손을 올리는 그녀.

헛웃음을 켠 나는 미유키의 앞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 이거 하지 말라니까아...!”

자그마한 목소리로 응석을 부리는 모습이 뭐가 이리도 귀여운지 모르겠다.

“어제 집엔 잘 들어갔고?”

“집에...? 잘 들어갔지...”

“열쇠 못 찾던데.”

“.....”

미유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 상태에서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는데, 어제 날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 어지간히 부끄러웠던 듯했다.

어제처럼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미유키를 보며 낄낄거린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동네를 뱅 돌아 곧장 학교로 가는 도로에 진입하자, 미유키가 의아한 투로 묻는다.

“테츠야 군은...? 안 태워?”

“어.”

“왜...?”

“가끔은 이렇게 둘이서 가자.”

은연중으로 마음을 드러내자, 미유키가 숨을 훅 삼키더니 입술을 오므렸다.

잠깐 그러고 있던 그녀는,

“하, 하지만 테츠야 군한테는...”

그놈 혼자만 덩그러니 놔두는 게 미안한가보다.

나중엔 가끔이 아니라 매일 둘이서만 가게 될 텐데, 지금부터라도 적응해둬라.

온갖 짓을 다 할 거니까 각오도 해두고.

테츠야를 쓰윽 지나치면서, 미유키의 가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는 그림도 괜찮겠네.

몸이 달아오른 미유키가 테츠야를 발견하고는 흠칫하면서, 왠지 모를 배덕감에 더욱 흥분하는 장면...

이거 나쁘지 않네.

“말해놨어. 오늘 아침에 들를 데 있으니까 따로 가라고.”

“나랑 같이 들를 데 있다고 말한 거야?”

“아니.”

“그래...? 그러면 연락이 와야 될 텐데...”

우웅­!

미유키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테츠야겠지.

좋아라하면서 미유키에게 같이 가자고 할 게 뻔하다.

미유키를 흘끔 바라본 내가 말했다.

“톡이야? 아니면 전화야?”

“톡...”

“뭐래?”

“일어났냐고 물어보는데...”

미유키가 휴대폰에 손을 대려다가 멈칫했다.

테츠야에게 댈 핑계거리를 생각하고 있는 듯한 모습.

얼마간 깊은 고민에 빠진 그녀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하아...”

이윽고 미유키의 입에서 기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거짓말로 답장을 보내서 죄책감이 느껴진 모양.

이번만큼은 내가 미리 거짓말을 해놨기에 솔직하게 설명할 수도 없어서 곤란했지?

그 마음 다 이해한다.

지금은 미안한 마음이 크겠지만, 나중엔 거짓말에 무감각해지게 될 거야.

오히려 짜릿한 기분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고.

큰 용기를 낸 네 고백을 거절한 놈이야.

그놈은 당해도 싸니까, 죄책감 같은 건 느끼지 마.

나는 몸을 뒤척이는 미유키의 가슴팍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 잡아봐.”

“왜...?”

“왜긴. 잡고 가려고 그러지.”

“.....”

단도직입적인 내 말에, 미유키가 머뭇머뭇 내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제 스스로 깍지를 껴왔다.

그 상태에서, 나는 미유키의 허벅지 위에다 우리가 깍지 낀 손을 툭 내려놓았다.

내 손등이 허벅지에 닿자마자 꿈틀하는 그녀의 몸.

당황한 듯했지만, 딱히 치우려는 기색은 없다.

운전을 하는 도중에 잠깐 그녀를 돌아본 내가 말했다.

“들고 있으면 힘드니까 이렇게 놔두는 거다.”

“.... 누, 누가 뭐래...?”

“괜한 오해하지 말라고.”

“오해는 무슨 오해...! 그, 그런 거 안 해...! 혼자 막... 이상한 생각을 하고 그래... 진짜 변태 같아...”

화를 냈다가, 혼자 꿍얼거렸다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쑥스러운 마음을 표현한 미유키는, 자신의 반대쪽 손을 가져와 내 손등 밑으로 집어넣었다.

자신의 양손으로 내 손을 감싼 형태로 만든 그녀는,

“하, 한손으로 운전하면 위험한데... 장롱면허였다고 그랬으면서...”

학교로 가는 내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내 손을 마치 인형을 다루듯 쓰다듬어댔다.

**

“다음 주부터 슬슬 문화제 준비에 들어가야지?”

1­A반 담당교수의 말에, 학급 전체가 흥분으로 들떴다.

문화제.

러브 코미디에서 지겹게 우려먹는 대표적인 행사다.

메이드 카페, 귀신의 집, 연극, 밴드, 댄스 같은 활동 중 하나를 골라 반 대항전이 펼쳐지게 되며, 행사가 끝나면 히로인과 함께 문화제를 즐기는 건 대표적인 클리셰 중 하나.

히로인들 간의 캣파이트가 펼쳐지는 이벤트이기도 하다.

여러 히로인들 중에서 진히로인을 선택하게 되는 중요한 분수령이지만... 그건 일반적인 러브 코미디에서나 나오는 클리셰.

나는 3명 모두와 사랑을 나눌 거다.

다만 현재의 나는 관계를 유의미할 정도로 쌓아놓은 사람이 미유키밖에 없다.

때문에 이번 년도 문화제 같은 경우엔 그녀와만 즐겨야겠지.

1­A반의 경우는...

“너희들 저번에 귀신의 집 얘기 나왔을 때 눈 반짝였지? 이번 기회에 해봐라.”

교수의 말마따나, 만장일치로 귀신의 집을 운영하게 된다.

미유키는 메인 히로인인 만큼 미모와 흰 피부를 부각시킬 수 있는 유키온나... 즉, 설녀를 연기한다.

따뜻하던 그녀의 이미지가 정반대로 뒤바뀌게 되는 서비스 컷도 있고, 거기서 작은 해프닝도 발생한다.

나중에 내 식대로 즐겨줘야지.

테츠야의 경우는 나름 멋지다고 할 수 있는 슈텐도지로 분장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넌 무조건 갓파로 만들 거다 이 새꺄.

렌카는 치나미, 그리고 검도부와 함께 꼬치집을 운영하게 되는데, 한 번 들러줘야겠다.

우리 미유키가 좋아하는 야키토리를 사줘야하니까.

“문화제 관련해선 반장, 부반장이 애들 통솔하고... 수업 시작하자.”

우우우우­!

이구동성으로 튀어나오는 야유.

교수의 벗겨진 머리 혈관이 불룩하게 튀어나오면서 사거리 마크를 만들어내고, 그 모습을 본 학급의 학생들이 조용해진다.

다혈질로 보이지만 마음씨는 따뜻한 열혈 선생... 아니, 교수.

이것도 클리셰 중 하나지.

빠직! 하는 소리는 안 나와서 다행인가?

조용히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 나는 수업에 집중했다.

그렇게 1교시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미유키가 부반장과 함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종이와 펜을 들고 나와 테츠야 쪽으로 다가왔다.

“미우라 군은 슈텐도지로 하면 되겠다. 호리호리해서 잘 어울릴 것 같아.”

멍청해보이는 테츠야의 면상을 바라보던 부반장의 말이었다.

아까 대화한 건 귀신 컨셉에 관한 토론이었구나.

“슈텐도지는 덩치가 조금 있어야하지 않아? 상대방한테 위압감을 주는 게 이미지에 맞는다고 생각해.”

곧바로 반박하는 미유키.

그녀의 시선은 테츠야가 아니라 날 향해있었다.

“그런가?”

“응.”

시큰둥하게 있던 나는, 이어지는 미유키의 말에 미간을 구겼다.

“마츠다 군도 분장할 거지?”

“아니. 귀찮아.”

“참여 안 할 생각이면 거절할게. 중요한 일이 없는 이상은 반 애들 전부 필참이야.”

“누가 안 한대? 나는 입구에서 표나 확인하면서, 진상 손님들 오면 잡을게. 이게 더 낫지 않냐?”

그 말에 부반장이 일 리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마츠다 군은 믿음직하니까... 입구에 있으면 사고를 치려는 손님들이 없을 것 같아.”

학급 학생들의 날 향한 평가가 뒤집혀지고 있다.

얌전히 수업을 듣는데다, 반장이자 학생회 소속인 미유키가 나를 편하게 대해주는 모습을 자주 보여줘서,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마음을 여는 모양이었다.

이제 슬슬 질투심 유발용 클리셰, 러브레터가 나올 때가 됐는데...

시간이 더 지나야하나 싶다.

“마츠다 군에게만 표 검사를 맡길 순 없는데... 혼자 있다간 표 검사도 내팽개치고 문화제를 구경하러 갈지도 몰라.”

옆에 있던 미유키의 방글방글한 농담을 묵살한 나는 의자를 드르륵 끌며 일어났다.

그러자 미유키가 물었다.

“어디 가?”

“매점.”

“그럼 나 딸기우유 하나만 사다줘. 마코토 것도... 돈은 갔다 오면 줄게.”

마코토는 또 누군데?

아... 옆에서 눈깔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는 부반장 이름이었구나.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내가 설렁설렁 교실 밖을 나가는데, 뒤에서 미유키와 마코토의 조용한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돼.”

“뭐가?”

“마츠다 군이 혼자 매점 가는 거... 원래는 막 애들 시켰었잖아. 심지어 오늘은 너랑 내 것도...”

“요새 많이 착해졌잖아. 사고도 안 치고...”

“응. 사람이 달라 보여.”

난 니들 생각보다 귀가 밝단다.

뭐라는지 다 들려.

**

점심시간에도, 방과 후 부활동에서도...

어딜 가나 문화제 얘기뿐이다.

1년에 한 번 있는 축제이니만큼 그럴 수밖에 없고, 나 또한 기대를 하고는 있지만...

‘지겹다.’

주변에서 같은 얘기만 해대니 질린다.

그냥 조용히 준비하면 되지, 꼭 호들갑을 떨어요.

물론 미유키나 렌카, 치나미가 얘기하는 건 예외다.

“마츠다 후배님께서는 문화제에 어디 소속으로 참여하실 건가요?”

자그마한 키 때문에 상대적으로 길어보이는 죽도를 든 치나미의 물음.

상하좌우 밀어걷기를 한 차례 시도한 내가 대답했다.

“저는 반 소속입니다.”

“그래요? 미우라 후배님께서도 반 소속으로 참여하신다고 하던데... 후배님의 반은 기획물이 뭔가요?”

“귀신의 집요.”

“오...?”

치나미가 흥미로운 눈동자로 날 올려다보았다.

키 차이가 30센티 이상이라, 고개가 올라가는 각도가 커서 웃기다.

그런데 문득 궁금한 게 생긴다.

치나미의 실력은 대단하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저 자그마한 체구로 어떻게 상대방을 압도하는 걸까?

중등부 이상 대회엔 혼성 시합이 없어서 이해는 하지만,

부활동 때 대련을 하면 3학년 남자 검도부원도 쩔쩔맬 정도라고 하던데...

기술이 좋은 건가? 한 번 제대로 보고 싶다.

“귀신의 집... 아주 재미있겠네요...! 흥미가 돋아요...! 마츠다 후배님도 귀신 분장을 하시나요?”

“아뇨. 저는 입구에서 표나 검사하려고요.”

“그래요? 덩치가 커서 귀신 분장을 하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쉽네요.”

“다른 선배들한테 물어보니까 검도부는 꼬치집을 한다고 하던데... 교대하고 구경하실 때, 이노오 선배랑 같이 오세요.”

“흐...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요. 아 참...!”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까 밀어걷기 자세가 굉장히 좋던데, 따로 개인적인 연습을 하신 건가요?”

“아뇨. 어제 이노오 선배가 잠깐 봐줬습니다.”

“그래요...? 언제?”

“스승님이 어제 비품을 체크하러 갔을 때요.”

“과연 그렇군요. 저보다 잘 가르치지 않나요?”

“아뇨. 이노오 선배의 가르침은 너무 혹독해요. 저는 착한 스승님의 가르침이 더 좋습니다.”

“흐힣.”

헤픈 웃음을 터뜨리는 치나미.

허리춤에 손을 올린 그녀가 날 꾸중했다.

“렌카는 저희 검도부의 부장인 만큼 엄한 태도를 보여주는 게 당연해요. 에이스이기도 하니 감사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맞죠. 안 그런가요?”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치나미의 입가엔 미소가 맺혀있었다.

기분이 퍽 나쁘지 않는다는 뜻.

렌카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그녀에게 약간의 라이벌 의식도 있어 보이는 듯한데...

잘 하면 이걸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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