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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41화 (41/313)

〈 41화 〉 점점 높아지는 수위

* * *

동아리 활동이 끝난 나는, 도복 수거함을 들고 부원들의 도복을 회수했다.

그러다가 샤워실에서 나온 렌카를 발견하고, 냅다 그녀의 앞으로 향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물을 마시고 있던 그녀는, 기세 좋게 다가오는 날 보고는 움찔했다.

“무, 뭐야...?”

“도복 주세요.”

“.... 여자 탈의실 수거함에 넣어놨어. 나중에 치나미가 갖고 올 거야.”

그거 아쉽군.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말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갑자기?”

“네.”

“그래... 말해봐.”

나는 도장 한켠에서 양팔을 머리 위까지 든 채 머리치기를 연습하는 남자 선배를 가리켰다.

“저 선배는 지금 뭘 하는 건가요? 저것도 겨눔세에요?”

그곳을 바라본 렌카가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맞아. 상단세라고 하는 자세인데, 불의 자세라고도 불려. 쓰는 사람은 드물어.”

“드물다고요?”

“공격력은 뛰어나지만 수비엔 약하거든. 기본적으로 배우게 되는 중단세보다 자세를 유지하기도 힘들고, 연격으로 이어가기도 어려운데다 찌르기, 그리고 근접전에 아주 취약해. 동작 수습도 느려.”

단점이 너무 많아 보인다.

쓰는 사람이 드물다는 건 효율이 좋지 않다는 뜻이니... 이해는 간다.

“장점은 없나요?”

“사거리가 엄청 길지. 편수치기도 장점이고...”

편수치기, 한손으로 죽도를 휘두르는 것을 말함이었다.

렌카의 말끝이 흐려지는 것을 보니, 장점은 단점에 비해 별로 없나보다.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쾌한 한 방에 매력을 느끼고 저 자세를 주력으로 삼아. 기백이 좋은 사람들이 상단세를 취하면 위압감도 대단하고... 선수들 중에서도 상단세로 두각을 드러낸 사람들이 몇몇 있어. 치나미도 상단세를 주력으로 쓰고.”

“예...? 나나세 선배가요?”

“응. 몰랐어?”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 하긴... 초보는 중단세에만 신경을 써야 하니까 딱히 알려줄 이유는 없었겠지.”

자그마한 몸뚱아리로 죽도를 높게 든 채, 폴짝폴짝 뛰어다니면서 상대방의 머리를 치는 치나미...

상상하니까 뭔가 귀엽다.

“혹시 다른 겨눔세도 있어요?”

“있기는 해. 하단세, 어깨칼, 옆자세, 그리고 이도.”

“이도(二?)? 죽도를 두 개 쓴다고요?”

“응. 괜찮은 겨눔세이긴 하지만, 학생들 간의 대회에선 이도는 금지야. 가르쳐주는 감독님들도 아카데미엔 없어. 그리고 하단세, 어깨칼, 옆자세는 격자부위가 정해져있는 검도에선 정말 비효율적이라서, 공식 대회에서 쓰는 사람을 못 봤어. 친선경기에서나 재미로 쓰는 정도?”

“그러면 상단세, 중단세가 현 검도의 주류 겨눔세네요?”

“맞아. 중단세가 대다수이긴 하지만.”

종합하자면 상단세는 마이너한 겨눔세다.

공격일변도의 전술이고, 불의 자세라는 이명도 있다.

타격감도 호쾌하다.

‘좋아.’

그럼 난 상단세로 해야겠다.

마이너로 메이저를 이기는 것만큼 뽕 차오르는 일이 없잖아?

축구로 따지자면 어디 3부 리그 언더독이 1부 리그 팀을 잡아내는 거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인공은 특별해야하고, 내 스승인 치나미가 상단세를 사용하니까...

저걸로 간다.

“저도 배울 수 있나요?”

그 말에 렌카가 가소롭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기본이 되어있지 않은 상단은 반쪽짜리만도 못해. 쓸데없는 생각은 말고 중단부터 익혀.”

“예.”

심드렁한 대답에, 렌카의 고운 이마가 구겨졌다.

“너... 내 말을 듣지 않고 있구나?”

“듣고 있는데요.”

“표정이 음흉한데... 치나미를 구슬릴 생각이라면 꿈 깨. 걔도 나랑 같은 생각일 걸? 중단을 제대로 배우기 전엔 절대 가르쳐주려하지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본은 중단이야.”

“기본은 중단... 예.”

중단세엔 전혀 관심이 없는 척 대충 맞장구를 친 나는, 날 혼내려는 렌카에게서 벗어났다.

**

도심의 어느 복합 카페.

누워 다리를 꼰 채로 만화책을 보고 있던 나는,

덜컥.

문이 열리며 미유키가 고개를 빼꼼 내밀자 그녀를 반겼다.

“왔냐? 음식은?”

“응... 커플 세트 시켜놨으니까 조금 이따가 여기로 가져오실 거야...”

‘커플’이라는 단어를 강조한 미유키가 구석에 가방을 놓아놓고, 신발을 벗고 들어와 앉았다.

딱 봐도 불편해 보이는 자세.

밀폐되고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으니 묘한 기분을 느낀 듯했다.

“약속시간보다 1시간 늦었다. 알지?”

“미안... 문화제 회의 때문에... 테츠야 군은 집에 갔어?”

“어. 부활동 끝나자마자 태워다줬어.”

“잘했네...? 혹시 둘이 무슨 얘기했어?”

“네 욕.”

그 말에 긴장이 풀렸는지, 미유키가 벽에 등을 딱 붙였다.

자신의 다리를 오므리고 팔로 감싼 그녀는, 편하게 누워있는 날 바라보더니 내가 보고 있는 책의 표지를 살폈다.

“이마에 흉터가 있는 꼬마애가 칼을 들고 있는데... 무슨 만화야?”

“액션.”

“재미있어?”

“그럭저럭.”

“스토리가 뭔데?”

“주인공 가족이 오니한테 몰살을 당했어. 동생 빼고. 동생을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한 여행을 떠나는 만화야. 일단은.”

“모, 몰살...? 공포만화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1권 가져와줄 테니까 한 번 봐볼래?”

미유키의 고개가 도리도리 저어졌다.

“난 싫어...”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린 미유키는 수학책과 노트, 필기구를 꺼냈다.

그 모습에 잠시 벙 쪄있던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넌 여기까지 와서도 공부를 하냐...?”

“오늘 쉬는 시간에 문화제 토의 때문에 복습을 못 했잖아. 마츠다 군은 궁금한 거 없어? 수학 시간에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던데...”

“시끄럽고, 책 덮어라. 진절머리가 나려고 하네.”

“왜? 마츠다 군은 만화책 보잖아.”

“같이 영화라도 한 편 보든가 하자.”

“응.”

냅다 수학책을 덮는 미유키.

방 안에 있는 TV 리모컨을 든 그녀가 활짝 웃으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애초에 이럴 목적이었던 것 같은데...

방금 나... 당한 건가?

혼란스럽다, 혼란스러워.

나는 만화책을 휙 던져놓고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자 미유키가 카페 안에 있는 영화목록을 살피더니 물었다.

“뭐 볼 거야?”

“너 보고 싶은 거 봐.”

조금 있으면 영화 내용 같은 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텐데, 아무거나 봐도 상관없지.

로맨스 영화를 고른 미유키는, 내 옆으로 살금살금 다가오더니 자신이 가져온 담요를 펼쳤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신과 내 무릎 위에 덮었다.

“에어컨 때문에 추워질까봐...”

“누가 뭐래?”

“응...”

아까는 여우처럼 내 행동을 유도했으면서, 지금은 모기만도 못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볼을 부풀렸다가, 수축시켰다가 하고 있다.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다.

똑똑.

영화의 오프닝이 시작될 때쯤, 우리 방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벌떡 일어난 미유키가 문을 열고, 직원이 가져온 쟁반을 받아들고 조심조심 내려놓았다.

원래 저런 건 쏟아져서 제복 와이셔츠를 적시고, 서비스 신을 보여주는 게 국룰인데.

아쉬운 사람마냥 입맛을 쩝쩝 다신 나는 무슨 음식이 왔는지 확인해보았다.

딸기 요거트 스무디와 녹차 라떼, 그리고 푸짐한 감자튀김.

이게 그 커플 세트인 모양이었다.

“음료는 선택을 하는 건가보네?”

“응. 마츠다 군 거는 녹차 라떼야.”

“내가 왜 풀떼기를 먹어야하냐? 선택하는 거면 나한테 물어보기라도 하지...”

“푸, 풀떼기라니... 녹차 라떼를 고른 건, 마츠다 군이 점심에 녹차 이야기를 하길래... 그래서 사온 건데...”

얼굴이 팍 일그러지는 미유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서운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장난을 그만두고 그녀를 달랬다.

“야... 뭔 농담을 못하게 하냐... 지는 맨날 나한테 잔소리하고 놀리면서...”

재빨리 라떼가 든 컵을 가져온 나는, 빨대에 입을 대고 쭈욱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3분의 1쯤 사라지는 녹차 라떼.

그 모습을 본 미유키가 아연실색해선 날 나무랐다.

“그, 그렇게 한꺼번에 마시면 어떡해...!”

입 안에 가득한 라떼를 한 번에 삼킨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배로 들어가면 다 똑같아. 근데 맛은 있네. 달짝지근한 게 마음에 들어.”

“진짜 바보 같아... 말투도 완전 아저씨야...”

아저씨? 그건 좀 충격인데.

“넌 할 줄 아는 욕이 바보뿐이냐?”

미유키에게 장난을 곁들인 딴지를 건 나는, 투덜거리고 있는 그녀의 어깨에 은근슬쩍 팔을 둘렀다.

내 손이 닿자마자 안으로 쫙 움츠러드는 미유키의 어깨.

눈을 데굴 굴리며 나와 손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는, 마치 요조숙녀처럼 빨대로 입을 가져가더니 스무디를 아주 약간 빨아먹었다.

그리고는 컵을 내려놓으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초조함, 설렘.

이러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녀.

나는 미유키의 방 안에서 키스를 할 때처럼,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어깨에 두른 팔을 움직여 그녀의 옆통수에 손을 대었다.

그 상태에서 약간 힘을 주자, 자그마한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 부근으로 서서히 내려왔다.

곧이어,

툭.

어깨에 그녀의 머리가 살짝 닿았다.

여기서 몸을 사선으로 조금 트니, 미유키의 머리가 내 승모근과 대흉근 사이로 조금 내려왔다.

후욱.

얇은 와이셔츠를 뚫고 들어오는 미유키의 콧바람.

틱. 트득.

담요 아래에선 무언가가 뜯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유키가 방 안에 깔린 시트를 손톱으로 뜯으면서, 자신의 부끄럽기 그지없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불편해?”

나긋한 목소리로 저리 묻자, 미유키의 고개가 스르륵 들려졌다.

“펴, 편해...”

“하나도 안 편해 보이는데.”

“편하다니까...?”

“안 그래 보인다니까?”

“편해... 편하다구... 내가 편하다고 하잖아...”

그렁그렁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투명한 눈, 그리고 앙칼진 입꼬리.

전혀 매치되지 않는 표정으로 내게 따지는 미유키의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비친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내 모습은... 진지하구나.

트득. 틱...!

계속해서 들려오는 시트가 뜯기는 소리.

이대로 놔뒀다가는 보상을 해야 할 판이다.

라고 생각하며 미유키를 말리려고 할 때쯤, 그녀가 자신의 쇄골 부근에 자리한 내 손가락을 꼬옥 잡았다.

잔뜩 힘을 주어 내 중지를 잡은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있잖아... 이번 주말에도 괜찮아...?”

“뭐가?”

“우리 집에서 밥 먹는 거... 텀이 너무 짧긴 한데... 다음 주부터는 문화제 준비 때문에 본격적으로 바빠질 것 같아서...”

가는 건 상관이 없지만, 고려해야할 요소가 있다.

그건 바로 스킨십 수위.

지금보다 더 진한 애정표현을 할 수 있을 때 가는 것이 낫다고 본다.

문화제가 끝난 이후면 괜찮겠지.

“문화제 끝나고 가면 안 돼?”

“아... 그래도 되기는 하는데...”

“그럼 그때 이후로 날짜 잡아봐.”

“알았어...”

트득. 특.

또 다시 시트를 뜯기 시작하는 미유키.

영화가 시작되었음에도, TV를 볼 생각조차 않고 애꿎은 시트만 뜯고 있다.

머리는 여전히 내 가슴팍에 댄 채였다.

피식한 나는 미유키의 다리를 잡아, 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히익...!”

그러자 미유키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경기를 일으키더니,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얼굴은 귀까지 새빨갛게 변한지 오래.

꼭 이런 낯부끄러운 분위기가 찾아오면 숙녀처럼 변한다는 말이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게 당돌하게 따지고, 날 혐오하던 애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런 그녀를 향해 시원하게 웃은 나는, 딸기 스무디를 가져와 빨대에 입을 대고 한 입 빨아먹었다.

그리고는 미유키를 향해 컵을 내밀었다.

“.....”

스무디에 꽂힌 빨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내가 입을 대었던 빨대 끄트머리를 삼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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