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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43화 (43/313)

〈 43화 〉 야릇한 데이트

* * *

끽­! 끼긱­!

접지력이 좋은 신발과 체육관 코트가 마찰을 일으키며 내는 소리.

체육관 한켠에 놓인 낮은 뜀틀 위에 앉아있던 나는, 여학생들이 배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수비!!”

“응!”

어떤 여학생의 다급한 외침에, 리베로를 맡은 미유키가 자신의 방향으로 날아오는 공을 살려냈다.

파앙­!

느릿하게 튕겨 올라가는 배구공.

세터가 토스를 하기 딱 좋은 속도와 높이다.

공부도 잘해... 운동신경도 좋아...

우리 미유키는 못하는 게 뭘까?

소꿉친구 히로인의 완성형이다.

“나이스 디펜스!”

내 옆에 앉아있던 테츠야의 응원에, 미유키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한손을 들어 올려 흔들었다.

얼핏 테츠야를 향해 화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저건 분명히 날 향한 인사다.

“마츠다, 오늘 미유키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아?”

만면에 웃음기를 띤 테츠야의 물음.

그러려니 한 내가 대답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오늘 차 안에서도 말 많았잖아. 좋은 일 있는 것 같은데?”

시도 때도 없이 이마를 만지작거리면서, 평소보다 더욱 오지랖을 떨긴 했지.

“난 모르겠고, 슬슬 잘라니까 넌 가서 농구나 해라.”

“날씨가 꾸덕꾸덕해서...”

내가 테츠야를 진심으로 싫어하긴 하지만, 지금 놈이 한 말은 공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장대비가 주륵주륵 쏟아지는 날이라, 습해서 땀을 흘리기가 싫었다.

늦은 장마라도 온 건가?

짜증나지는 않지만 옆에 테츠야가 있어서 싫다.

뜀틀에서 내려온 나는 체육관 구석에 대충 누웠다.

원래 이런 체육관 안에선, 눈 먼 공이 날아와 날 맞추는 게 클리셰인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선 내 눈치를 보는 학급 학생들...

헐레벌떡 다가와 내 상태를 살피고, 화내지 말라고 하는 미유키...

마음에 들진 않지만, 미유키의 말을 듣고 성질을 죽이는 나...

럽코식 갱생 이벤트 한 편 뚝딱이네.

체육관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는 공소리가 희미해지고, 왁자지껄 떠들던 학생들의 소란이 잦아들 즈음,

이런저런 망상을 하던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

“마츠다 군.”

청순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잠이 많은 편인데, 날 부르는 미유키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다니 말이다.

콕. 콕.

나는 뾰족한 무언가가 내 어깨를 찌르자 아직 깨어나지 못한 척 몸을 뒤척였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등진 채 옆으로 누운 나는,

후우욱...

귓가에 따스한 바람이 훅 하고 들어오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머리를 마구 털어낸 나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방글방글한 얼굴을 하고 있는 미유키를 어이가 없는 듯 바라보았다.

“뭐 하냐 지금?”

“마츠다 군 귀에 바람 불었어. 깨우려구.”

태연하게 철판을 까는 모습... 많이 발전했구나.

날 닮아가고 있는 건가?

손가락으로 귀를 마구 털어낸 내가 말했다.

“점심시간인데 왜 깨워.”

“점심시간이니까 깨우지. 체육관 비워야 된대. 얼른 일어나고 밥 먹으러 가자.”

너 때문에 발기하려고 하잖아.

이 상태로 어떻게 일어나냐?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 빠져나간 모양.

기다란 숨을 내뱉음으로서 피곤함을 날려버린 내가 투덜거렸다.

“정도 없는 것들이네. 나만 놔두고 가버리고...”

“깨우면 화낼까봐 무서워서 놔둔 거야. 방금도 나한테 성질부리려고 했잖아.”

“그건 네가 이상한 짓을 하니까 그렇지.”

“일부러 그렇게 깨웠어. 주먹부터 날아가는 마츠다 군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보려고.”

그거 참 편한 변명이네.

“미우라는 어디 가고 너 혼자 있냐?”

“테츠야 군은 교수님이 부르셔서, 잠깐 교무실에 갔어.”

“어떤 교수?”

“님 자 빼먹었어.”

헛웃음을 켠 나는 체육관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배시시 웃은 미유키가 내 옆에 앉더니, 자신의 제복 치마 주름을 펴기 시작했다.

갓 샤워를 하고 나온 미유키 특유의 살구 향이, 체육관의 습하고 퀴퀴한 냄새를 날려주고 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그녀의 머리에서는 민트 향이 풍겨와, 코는 물론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투둑. 툭.

체육관 창문에 닿는 빗소리는, 점점 낮아지는 분위기를 더욱 가라앉게 만들어주고 있다.

“비 많이 온다... 그치?”

“어. 많이 오네.”

이럴 때 집에서 빗소리를 자장가삼고 자면 딱인데.

먹구름으로 인해 태양이 가려져 흐릿해지는 것도 좋고...

“나 기다릴 거야...?”

다리를 한데 모아 감싼 미유키의 물음.

고개를 돌린 내가 반문했다.

“비도 안 그칠 것 같은데, 오늘 뭐할래?”

질문 속에 대답이 섞여있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을까?

미유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나도 잘 모르겠어. 오락실 갈까...?”

“아니.”

“어제처럼 카페 갈래?”

“아니.”

“.... 영화 보자.”

너는 가장 먼저 생각나는 데이트 장소가 그런 곳들뿐이냐?

맨날 테츠야랑 놀다 보니 뇌가 절여졌네.

실내인 건 좋은데, 야하지가 않아.

빨리 취향을 개조시켜줘야지 안 되겠다.

“싫어.”

“뭐야... 그러면 마츠다 군이 정해.”

약간 삐친 듯한 미유키의 말투.

피식한 나는 미유키 옆에 붙어있는 다리를 세워, 그녀의 손목을 잡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후 그녀의 매끈한 손톱을 살살 만지작거렸다.

“아 뭐해애...”

애교가 약간 묻어나오는 앙탈.

빼려는 기색은 전혀 없다.

말없이 미유키의 손톱을 쓰다듬으면서 분위기를 한층 묘하게 만든 나는,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이마로 손을 가져가려고 할 때쯤 입을 열었다.

“늦게 끝나면 배고플 텐데... 저녁부터 먹어야 맞지 않나?”

“.... 응... 뭐 먹을래...?”

“집에서 밥 먹자.”

“집...?”

뜻밖의 제안에 놀랐는지, 미유키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리 집에서 밥 먹고, 어디 놀러갈지 생각해보자. 어때?”

“.....”

미유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우리 집에 혼자 자주 왔었다.

방학 때 도시락을 싸오기도 했고, 더워지기 전에 일찍 와선 에어컨 바람을 쐬고는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다.

내가 먼저 둘이서 공부를 빨리 시작하자는 제의를 하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미유키는 흔쾌히 수락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미유키는 무척 부끄러워하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는 관계가 발전됨으로 인해 생긴 일이었다.

미유키와 나는 여러 스킨십을 한 상태.

어제까지만 해도 밀폐된 공간 안에서 키스를 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낯뜨거운 분위기를 자아냈었다.

이런 상황을 겪은 상태에서 집에 단둘이 가자고 하니, 같은 말이라도 받아들이는 기분 자체가 다르겠지.

감성이 풍부해지는 날씨 또한 한몫했겠고.

이럴 땐 등을 조금만 떠밀어주면 될 것 같다.

그리 생각한 나는, 미유키의 손을 뒤집어 마주잡았다.

“건강 생각하라며. 난 요리할 줄 몰라.”

“.... 지금 나한테 밥을 해달라는 거야...?”

“무조건 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어떠냐고 물어보는 거지. 싫으면 밖에서 먹고.”

“시, 싫은 건 아닌데...”

“집에 재료 없으니까, 마트에서 쇼핑하고 가자.”

“아니... 나 아직 갈지 말지 결정하지도 않았거든...? 생각해보고 말해줄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내가 뭐 야한 짓을 하겠다고 말한 건 아니잖아?

생각만 했지.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아, 응...”

**

“으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널어놓은 호완을 살피는 치나미.

자신의 손을 호완 안으로 쏙 넣어다 뺀 그녀가 손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쫙 펼치더니, 내 코앞에 가져다댔다.

“냄새를 한 번 맡아보세요.”

그 자그마한 손바닥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거린 내가 말했다.

“알코올 냄새가 약간 나네요. 다시 닦을까요?”

“아니요. 이정도면 합격이에요. 잘했다고 칭찬을 하는 거예요.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관리를 하면 돼요.”

그럴 거면 방금 인상은 왜 찌푸렸는데?

치나미의 정신세계를 알 수가 없다.

그러려니 한 나는 호구 보관실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치나미가 내 손목을 덥석 잡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왜요?”

“마츠다 후배님, 제가 비오는 날에 호구를 닦을 땐 뭘 하라고 했죠?”

“아... 제습기를 깜박했네요.”

“그렇죠, 그렇죠. 이렇게 칙칙한 날엔 제습기를 꼭 틀어줘야 해요.”

헤실거린 치나미가 보관실 구석에 놓인 제습기를 가동시켰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 걸음을 옮기려다가,

쿵­!

“으겍!”

가까이 다가온 내 가슴팍에 자신의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런데 비명소리가 ‘으겍!’이라니... 뭔가 웃기다.

일본 특유의 오버 액션이지만, 이곳에 적응이 돼서 그런지 이젠 귀엽게 느껴진다.

갑자기 신음소리가 궁금해지는구나.

자신의 코를 부여잡고 인상을 찡그린 치나미가 날 나무랐다.

“마츠다 후배님...! 길을 막고 서있으면 어떡해요?”

“제습기를 틀러 가고 있었는데요.”

“제가 트는 걸 보지 못하셨나요?”

“예, 못 봤습니다. 호구 상태를 살피고 있어서요.”

“한눈을 파셨다는 뜻이로군요...! 보관실에서 그러면 위험하니까, 다음부터는...”

말을 하던 치나미의 입이 꾹 다물렸다.

내가 그녀의 뒷목에 손을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걱정스런 목소리로 치나미의 상태를 살피는 척 그녀의 뒷목을 적당한 지압으로 살살 문지르자,

“흐아아아...”

치나미의 눈이 확 풀리면서, 입에서부터 나른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사지를 좋아하는 편인가?

앞으로 자주 해줘야겠다.

얼마간 내 손길을 느끼던 치나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낑낑거리며 팔을 뿌리친 그녀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더니 날 꾸짖었다.

“마츠다 후배님...! 남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시면 어떡해요?”

“아니... 스승님의 고개가 뒤로 확 꺾여서, 걱정되는 마음에 그랬습니다.”

“마음은 기특하지만... 먼저 물어보는 게 예의인 것을 모르시나요?”

“뚜둑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아서...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그, 그렇게 심하게 부딪쳤었나요? 어쨌든 꼭 주의하세요. 여기는 검도부실이에요. 예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을 감독님이나 부장이 본다면... 아주 혼쭐이 나고 말 거예요. 아시겠죠?”

예법은 무슨.

나중엔 이 보관실은 물론이고 여자 탈의실, 그리고 샤워실에서 렌카랑 너랑 물고 빨고 할 거다.

감독실 의자가 편하던데... 감독이 부재중일 때 그곳에서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예.”

“좋아요. 그러면...”

치나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

보관실 밖에서 우렁찬 부원들의 인사가 들려왔다.

부활동이 끝난 모양.

굳게 닫혀있는 문을 바라본 치나미가 입맛을 찹찹 다시더니 말했다.

“부활동이 끝났네요. 이제는 뭘 해야 할까요?”

“도복을 수거해야겠죠.”

“정답이에요. 자, 이제 나갈까요?”

“그럽시다.”

“아, 그리고 마츠다 후배님.”

“예.”

“수거를 다 끝내고 잠깐 남아계실 수 있나요? 오늘 비가 와서 연습을 못한 만큼, 부실 안에서 연습을 할 예정이어서요. 물론 바쁘시면 그냥 가셔도 돼요.”

미유키를 기다리는 시간을 이렇게 알차게 보낼 수 있다고?

나야 환영이지.

나는 치나미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안 바쁩니다. 남을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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