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야릇한 데이트 #2
* * *
“따로 보충수업 같은 걸 받는 거야?”
샤워를 끝내고 나온 테츠야의 물음에, 치나미와 함께 부실 가운데에 있던 내가 대답했다.
“어. 오늘도 너 먼저 가야겠다. 우산 있냐?”
“부실에서 빌리기로 했어. 그럼 난 미유키랑 같이 돌아간다?”
미유키랑 돌아간다고?
불가능할 걸?
너는 비 오는 날 혼자 쓸쓸이 파전에 막걸리... 가 아니라,
오코노미야키에 사케나 처먹을 운명이란다.
“그래라.”
“수고해. 나나세 선배님도 수고하십시오.”
공손히 입례를 하는 테츠야.
치나미가 밝은 낯으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미우라 후배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테츠야가 사라지고, 남은 몇 명의 부원들이 마저 빠져나간 부실 안.
감독실을 염탐한 치나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창고에서 내가 쓰던 죽도를 들고 왔다.
“바로 연습을 시작해보도록 할까요?”
죽도를 받아든 나는, 칼자루부를 알맞게 쥐며 말했다.
“그 전에 물어볼 게 하나 있습니다.”
“뭔가요?”
“이노오 선배가 스승님은 상단세를 주로 쓴다고 그랬는데... 맞죠?”
“맞아요.”
“저한테도 가르쳐주세요.”
“으응...?”
큼지막한 자신의 눈을 깜박이는 그녀.
얼마간 그러고 있던 그녀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요.”
“왜요?”
“중단세를 먼저 배우지 않으면 상단세는 배워봤자에요. 그러니 안 돼요.”
“그래도 가르쳐주세요.”
“안 돼요.”
“돼요.”
“.... 마츠다 후배님, 저와 말장난을 하시는 건가요? 재미있긴 하지만, 안 돼요.”
“된다니까요.”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치나미를 향해 서서히 다가가자, 내 발걸음에 맞춰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고개를 거의 끝까지 든 그녀가 돌연 팔짱을 꼈다.
“억지를 부리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제자가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게 이상한 일인가요?”
“마음은 기특하지만, 상단세를 배우면 자세가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말 거예요.”
“그건 중단을 배웠을 때의 가정 아닌가요? 첫 걸음마를 상단으로 시작하면 이야기는 다르죠. 저는 상단의 대가인 스승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사탕발린 말씀을 하셔도 소용없어요. 그런데 조금 떨어져주시면 안 될까요? 후배님의 키가 너무 커서, 목이 아파오려고 해요.”
“제가 주물러줄까요?”
“으음...! 아니요.”
약간 솔깃했던 것 같은데?
감정이 솔직해서 미유키보다 알기 쉬운 사람 같다.
어쨌거나 여기서 더 강짜를 부려봤자 소용이 없을 듯하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음에 생길 기회를 노리자.
치나미에게서 멀어진 나는, 부실 한켠에 붙은 거대한 대형거울을 쳐다보며 자세를 잡았다.
**
쏴아아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비를 보던 치나미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우산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우산은 후배님께서 사용하세요. 저는 택시를 타고 가야겠어요. 대신 정문까지만 같이 쓰고 가요.”
“택시? 집이 어딘데요?”
“차타고 15분 거리에요.”
“그래요? 그럼 제가 태워다줄까요?”
“네에에...?”
입을 떡 벌린 치나미.
저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보고 싶다.
“마츠다 후배님, 혹시 자동차를 가지고 계신가요?”
“예. 오늘도 타고 왔습니다.”
“그, 그래요...?”
“같이 주차장까지 가죠. 우산은 제가 들게요.”
말을 마친 나는 곧장 우산을 편 뒤 문 밖으로 나갔다.
투두두둑! 투두둑!
캐노피를 때리는 굵은 빗줄기.
소리가 썩 나쁘지 않다.
치나미를 바라본 내가 손짓했다.
“뭐해요? 안 오고.”
“아, 네...!”
조심조심 움직인 그녀가 내 옆에 차렷 자세로 섰다.
다만 거리는 조금 둔 채였다.
그로 인해 빗줄기가 치나미의 한쪽 어깨에 닿았는데, 그녀의 제복 와이셔츠가 순식간에 젖어 들어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게다가 우산을 든 나와 치나미의 키 차이가 나서, 그녀와 우산 사이의 기다란 공간으로 비가 파고들어오기까지 했다.
이정도면 우산을 같이 쓰는 의미가 없을 정도.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 나는 치나미와 다리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고, 무릎을 약간 굽힌 뒤 우산을 머리카락이 닿을 정도로 내렸다.
이런 내 배려를 눈치챈 치나미가 어색한, 그리고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마츠다 후배님은 소문과는 다르게 무척 친절하시네요.”
2학년 검도부원들은 날 그럭저럭 잘 대해주는 편이긴 하나, 그건 내가 매니저 일을 꼼꼼하게 하니 마음을 연 것.
다른 2학년들은 날 양아치로 보고 있겠지.
그들에겐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접점도 없는 엑스트라일 뿐이니까.
옆머리를 살살 긁은 나는, 소문엔 관심 없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갈까요?”
“네...!”
우린 아이가 걸음마를 하듯 아장아장, 아주 느린 속도로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무릎을 굽힌 채로 걷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지만...
호감도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할까.
더욱이 치나미와의 이벤트는 오로지 내가 만들어가야만 하는 터라, 기회를 잡는 즉시 진도를 빼는 게 좋았다.
**
치나미와 함께 주차장 구석에 있는 처마에 도착한 나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미유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어 번 지나가고,
여보세요?
목소리를 잔뜩 낮춘 미유키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아직 멀었어?”
마침 나갈 준비하고 있었어. 마츠다 군은 주차장이야?“
“어.”
2분정도 걸릴 것 같아. 금방 갈게.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탈 사람이 더 있어서 그런데, 2, 3분 정도만 기다렸다가 가도 되죠?”
“물론이에요. 그런데 마츠다 후배님, 15분 거리는 기름 값이 얼마나 나오나요?”
“갑자기 기름 값은 왜... 설마 계산해서 주려고요?”
“네.”
말똥말똥한 눈을 보니, 내게 선을 긋는 건 아니다.
진심으로 저게 도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기가 찬 듯한 미소를 지은 내가 말했다.
“그냥 호의로 받아주세요.”
“그럴 수는...”
“아니면 저도 스승님에게 돈을 드려야겠네요. 도복 입는 법을 알려준 값, 호구 청소하는 법을 알려준 값, 검도 기술을 알려준 값...”
“자, 잠깐만요...! 그건 말이 안 되는데요...?”
“그렇게 따지면 지금 스승님이 한 말도 말이 안 됩니다. 기름 값은 됐고, 정 마음에 걸리면 나중에 음료수 하나만 사주세요.”
대수롭지 않은 듯한 말에, 치나미의 동글동글한 얼굴이 살짝 풀렸다.
내게 고개를 숙인 그녀가 말했다.
“알겠어요. 그러면 오늘은 감사히 얻어 탈게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멀찍이서 샌들을 신은 미유키가 우산을 쓴 채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내 차로 가려고 하다가, 처마 밑에 있는 나와 치나미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잠시 당황해하다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녀.
그녀를 향해 히죽 웃은 내가 치나미를 소개했다.
“여기는 나나세 선배라고, 검도부 매니저야.”
“아... 그... 저번에 말했던... 스승님...?”
“맞아.”
미유키의 고개가 느릿하게 주억거려졌다.
치나미를 향해 상체를 꾸벅 숙인 그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하나자와 미유키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나나세 치나미라고 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하나자와 후배님.”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을 본 나는, 둘에게 여기 있으라고 말한 뒤 차를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
치나미의 집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맨션이구나.
평범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
“고맙습니다, 마츠다 후배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가 맨션 입구에 도착하자, 치나미가 뒷좌석에서 상체를 숙였다.
그녀를 돌아본 나는 좌석 밑에서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우산을 가리켰다.
“우산 챙겨가세요.”
“네! 하나자와 후배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고,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활기찬 인사에, 조수석에 앉아있던 미유키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도 만나서 반가웠어요. 나나세 선배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차에서 내린 치나미는, 상대적으로 커 보이는 우산을 쓴 채로 우리에게 다시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맨션 입구로 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유키는,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았다.
“원래 저렇게 존댓말을 하셔?”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래.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꼬박꼬박 존대하더라.”
“그래...? 엄청 착하시다... 그리고 귀여우시네... 근데 마츠다 군.”
“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잖아.”
미유키의 목소리가 조금 스산하게 느껴진다.
차 안에서 나와 치나미가 해준 설명으로 인해 상황 자체는 이해하게 되었고, 치나미에게도 유감은 없었으나...
알게 모르게 은근한 질투를 하고 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 외의 여자는 껄끄러워하는 게 당연하다.
정상적인 취향을 갖고 있다면 말이지.
“너한테 전화했을 때 말하려고 했었어.”
“근데 왜 안 했는데?”
“네가 금방 온다길래, 만나서 하려고 했지.”
“.... 그냥 말해주는 게 어려워? 말하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마침 딱 걸린 신호.
여유롭게 브레이크를 밟아 정차한 나는, 미유키를 돌아보았다.
“화났냐?”
찔끔한 그녀가 내 시선을 피했다.
“내가 왜 화를 내? 그럴 이유 없...”
움찔.
미유키가 말끝을 흐리더니 입을 앙다물고, 마치 딸꾹질을 하듯 몸을 들썩였다.
느릿하게 다가간 내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말문이 턱 막힌 미유키를 물끄러미 바라본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손에 힘을 주어 안쪽으로 당겨왔다.
그러자 미유키의 몸이 살짝... 아주 살짝 나와 가까이 붙었다.
“글쎄... 생각해보니까 이유는 충분할 것 같기도 한데.”
“.... 무슨 뜻이야...?”
이해 못한 척하지 마라.
아무리 네가 이성 관계에 어설프다고는 해도, 지금 내가 한 말의 뜻을 모르지는 않잖아.
한쪽 입꼬리를 올린 나는, 미유키의 손을 끌어와 잡은 뒤 콘솔박스에 올려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후 그녀의 검지, 중지 사이의 움푹 패인 부분을 내 손가락으로 살살 긁으며 화제를 돌렸다.
“오늘 뭐 만들어줄 거냐?”
“.... 몰라.”
“그럼 마트에서 아무거나 사가?”
“내가 알아서 고를 거야...”
삐친 척을 하고 있지만, 볼살이 씰룩거리고 있다.
가볍지만 은근히 야릇한 스킨십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는 증거.
이렇게만 해도 반응이 적나라한데, 집에서는 무슨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한다.
미유키를 흘끗 살핀 내가 물었다.
“맥주도 사갈까?”
“맥주...? 건강에 안 좋아.”
“보리잖아. 맛도 좋고. 그러니까 건강에 좋은 거지.”
태연스럽기 그지없는 내 말에, 미유키가 헛웃음을 켰다.
“그러면 보리밭 한가운데에 떨어뜨려줄까?”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며 날 타박했을 텐데, 이번엔 맞장구를 쳐주는구나.
자꾸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것이 마음에 걸렸나보다.
그나저나 술을 마시면 운전을 못한다는 건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인데...
밥만 차려주고 혼자 돌아갈 심산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맥주를 핑계로 자고 가라고까지 해볼까?
분위기부터 보고 결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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