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야릇한 데이트 #3
* * *
유부와 두부, 파, 양파, 미소... 그리고 조미료.
일본식 된장국인 미소시루에 들어가는 재료를 망설임 없이 카트에 담아놓은 미유키가 날 돌아보며 장난을 쳤다.
“집에 쌀은 있지?”
“있지. 없으면 간장계란밥을 어떻게 먹냐?”
“그렇긴 하네. 근데 마츠다 군. 혹시 쌀벌레도 같이 넣어서 만들어먹은 거 아니야?”
“어쩐지 요즘 속이 덥수룩하더라. 내장에서 알 깠나봐.”
“아 뭐래...! 징그럽게...”
내 어깨를 가볍게 밀친 미유키.
마트에서 카트를 끌 때부터 지금까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는데, 나와 쇼핑을 하는 게 즐거운가보다.
카트에 딱 붙어있다시피 한 우린, 미소시루 재료 외에도 우동 재료를 샀다.
맥주와 주전부리를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맥주는 세 캔.
밥을 먹고 난 후, 함께 TV를 보며 마시기 적당한 양이었다.
계산대 앞에 선 미유키는, 내게 양해를 구하더니 화장실 용품 코너로 후다닥 달려갔다.
1분 정도 뒤에 돌아온 그녀의 손엔 새 칫솔이 들려있었다.
식사 후에 양치질을 하려는 모양인데... 미유키도 알고 있구나.
집에서 밥만 먹고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음 고객님!”
마트 직원의 상큼발랄한 목소리에 내 등을 떠민 미유키는,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배시시 웃었다.
그런 미유키를 배려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계산대 롤러 위에 재료를 올려놓던 나는,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려는 그녀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뭐 하냐 지금?”
“응? 같이 먹을 건데 나눠서 내야...”
“우리 집 밥하는데 네가 내냐? 내가 내야지. 까불지 말고 다시 집어넣어라.”
“그래도...”
남의 집에서 밥을 해주는데 돈을 달라고 하지는 못할망정 스스로 내려고 하다니.
물론 이젠 ‘남’은 아니긴 한데, 마음씨가 넓어도 너무 넓다.
미유키를 만류하고 계산을 마친 나는, 묵직한 비닐봉지를 들고 입구 앞에 섰다.
밖을 보니 빗줄기가 여전히 굵었다.
아까보다 더욱 거세진 것 같은데... 이러다 홍수라도 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마츠다 군, 거실 문은 닫아놨지?”
우산을 펼 준비를 하던 미유키의 말.
아차 한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을 끔벅였다.
이런 내 반응을 본 미유키가 벙 찐 채로 물었다.
“.... 설마 그냥 나왔어...?”
“그런 것 같은데.”
“비는 아침부터 왔는데...? 그런데도 안 닫았다구...?”
“까먹었어. 처마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바람을 내뱉은 미유키가 날 타박했다.
“마츠다 군, 진짜 바보야...? 바람 불면 안으로 다 들어올 텐데... 게다가 거실 바닥은 다다미잖아...! 빗물 들어가면...”
“평상에만 조금 묻고 끝났겠지 뭐. 별 일 있겠냐?”
“대체 왜 그렇게 태평한 건데...? 일단 빨리 돌아가자.”
우산을 쫙 편 미유키가 내 팔을 잡고 흔들었다.
모든 게 귀찮은 사람마냥 하품을 하던 나는, 미유키가 잔소리에 시동을 걸 때쯤 걸음을 옮겼다.
**
“아이 씨...”
평상과 붙어있는 여닫이 창문과 가장 가까운 다다미를 떼어내 마른수건으로 닦던 나는, 투덜거리며 수건을 휙 던졌다.
내 행동을 지켜보며 요리를 하고 있던 미유키가 혀를 찼다.
“욕하지 마. 그러게 왜 문을 안 닫아서... 제대로 닦아. 곰팡이랑 벌레 꼬이는 거 싫으면.”
“식물은 안 들여? 쟤네 익사하는 거 아니냐?”
“담장이 비를 일부 막아주고 있어서 괜찮아. 그리고 식물들은 빗물을 먹으면 더 잘 자라.”
“왜?”
“설명해줘도 모를 테니까 안 알려줄래.”
새침한 투로 말하는 미유키의 뒤로 다가간 나는, 은근슬쩍 그녀의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미소시루를 젓고 있던 미유키가 흠칫했다.
국자 손잡이를 집은 그녀의 손가락 끝이 하얘진다.
힘이 빡 들어갔다는 방증.
입술까지 잘근 깨문 그녀가 날 나무랐다.
“마츠다 군... 나 요리 중이잖아...”
“누가 뭐래?”
“.... 다다미는 왜 안 닦아...”
“알아서 마르게 두자. 연어는 다 됐나?”
“아직 3분 정도 남았어...”
“그럼 슬슬 상 세팅해?”
“아, 응... 지금... 히야악!”
돌연 간드러지는 소리를 내뱉는 미유키.
내가 그녀의 허리를 꾸욱 눌렀기 때문이었다.
온몸을 움츠리며 턱을 바짝 세우는 미유키를 보고 킥킥거린 나는, 거실 구석에 옆으로 올려놓은 탁상 다리를 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유키가 상 위에 연어구이와 미소시루를 올려다놓았다.
이어서 우엉볶음과 예쁘게 말린 계란말이까지 가져다놓은 그녀가 맞은편에 얌전하게 앉았다.
“밑반찬이 별로 없어.”
“내 입장에서 밑반찬 두 개면 많은 거지. 잘 먹을게.”
“많이 먹어.”
열어놓은 창밖에서 들려오는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 그리고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간간히 대화를 나누는 식사자리.
마치 신혼부부 같은 느낌이다. 미유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왜 그렇게 쳐다봐...?”
젓가락으로 토막을 낸 계란말이를 조신하게 입으로 가져가는 그녀.
쑥스러움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를 듣자하니, 그녀도 이 자리를 설레어하는 것 같다.
“아무것도 아냐. 음식 맛있다.”
“응...”
**
덜컥.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미유키의 뺨은 빨개져있었다.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맥주 때문이었다.
“남은 과자는 다 정리했어...?”
상쾌한 표정을 지은 미유키의 물음.
나는 주방 옆 쓰레기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미유키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조심조심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요는 언제 폈대...?”
“방금.”
“칫솔은 일단 세면대 위에 놔뒀어... 나중에 갈 때 가져갈게.”
“여기 뒀다가 다음에 올 때도 써.”
“아... 그럴까...?”
“어.”
심드렁하게 대답한 나는 창밖을 보았다.
밖은 이미 어스름했다.
비는 여전히 주륵주륵 내리고 있는 상태.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히 깜깜해지겠지.
스윽.
자연스럽게 배개에 머리를 대고 눕자, 약간의 알코올이 들어가 대담해진 듯한 미유키가 돌연 내 이마에 손을 올리더니, 머리를 위로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언제나 따뜻한 손길이다.
마음이 절로 푸근해지고, 몸이 나른해질 만큼.
잠깐 눈을 감고 미유키의 손길을 느끼던 나는, 그녀를 그윽하게 올려다보았다.
평소와는 다른 눈빛에 애가 탔을까?
미유키가 투정이 약간 섞여있는 콧소리를 냈다.
“왜 그렇게 보는데...”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아주 오랜 시간동안 미유키와 눈을 맞추었다.
이후 습한 공기가 살짝 가라앉는 것 같을 때쯤 입을 열었다.
“미유키.”
“응...”
“나 술 마셔서 운전 못해.”
“그래서...?”
“집에 못 데려다줘.”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택시타고 가야 되겠다... 근데 마츠다 군, 나 데려다주기 귀찮아서 맥주 마신 거였어?”
눈가에 호선을 그린 채 농담을 하는 미유키.
피식한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확 잡아당겼다.
“어헉...!”
놀란 탄성을 터뜨리며 그대로 내 옆에 누워버린 미유키.
황급히 내 요를 짚고 일어나려 해보지만,
“잠깐만 이러고 있자.”
노곤한 내 말투에 멈칫하더니, 내 배게 한쪽 끄트머리에 머리를 올려놓았다.
“말이라도 하지... 놀랐잖아...”
“미안.”
갈비뼈 부근에서 미유키의 가슴이 스쳐지나가는 게 느껴진다.
마음만 같아선 제복 치마 속에 들어가 있는 와이셔츠를 꺼내,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싶지만 참아야한다.
지금은 성욕에 삼켜지면 안 된다.
빳빳해지기 시작하는 자지가 보내는 신호를 그대로 따르는 건 망하는 지름길이다.
이성적으로 가되, 대신 자지의 의견도 묵살하지 않는 선에서 잘 조절하는 게 왕도다.
‘약하고 익숙한 것부터 시작하자.’
지금은 이런 스킨십은 처음인 미유키가 두려워하지 않게끔, 서서히 수위를 높여나가는 것이 마땅하다.
옆으로 누운 자세로 바꾼 나는 미유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어서 미유키가 기다란 콧바람을 내뱉는 타이밍에 맞춰,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
그러자 미유키의 눈꺼풀이 그대로 감겼다.
누워서 하는 키스는 처음임에도 평온한 표정이다.
틈 날 때마다 스킨십을 하며 적응을 시켜놓은 게 주효했구나. 뿌듯하다.
코가 피부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멈춘 나는, 잠깐 미유키의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서서히 뜨일 때쯤,
“.... 흡!”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들이댔다.
여기서 곧장 혀를 들이밀자, 미유키의 혀가 쭉 올라와 내 혀와 얽혔다.
놀랄만한 일이었다.
어제 카페에서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어설프긴 하지만 노력이 가상하고, 기특하다.
이어진 키스는 저번 카페에서보다 더 격렬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장소였기에, 우린 새어나오는 콧바람을 애써 감출 생각도 않고, 몸을 완전히 밀착한 채로 서로의 입 안을 탐했다.
“흐뭅...! 후으...”
미유키는 코로만 숨을 쉬는 게 힘들었는지, 일정한 시간마다 입으로 공기를 빨아들였다가 뱉어냈다.
내 뺨이 자신이 불어넣은 숨으로 약간 커지는 것도 모른 채로, 그녀는 오롯이 키스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맥주 향이 희미하게 섞인 치약 맛이 입 안에서 거의 사라져갈 때쯤,
나는 미유키의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가장 아랫쪽 갈비뼈에서부터 골반에 이르기까지 살살 쓰다듬었다.
그렇게 내 손이 미유키의 등허리 바로 밑에 닿는 순간,
“흐훕...!”
짤막한 숨을 터뜨린 미유키의 엉덩이가 뒤로 살짝 빠지면서, 그녀의 손이 내 손을 덥석 잡는다.
어지간히 놀란 듯한 모습.
그러나 내 손길이 부드럽다는 것에 안심했는지, 이내 자신의 손에 힘을 뺀다.
나는 그때 키스를 그만두었다.
첫 키스 때처럼 미유키의 아랫입술을 약하게 깨물며 얼굴을 떼어낸 나는, 미유키의 눈이 풀려있자 천장을 보고 있는 그녀의 한쪽 뺨을 어루만졌다.
“.....”
아무 말 없이 내 손길을 받아들이는 미유키.
나는 나긋한 목소리로 그런 그녀를 불렀다.
“미유키.”
그에 미유키의 몸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목소리가 듣기 좋았던 모양.
약간이나마 흥분도 한 것 같다.
“왜애...?”
“오늘 자고 갈래?”
내 입에서 튀어나온 갑작스런 제안에, 미유키의 눈이 보름달처럼 크게 뜨였다.
“어...? 응...?”
“자고 가.”
끔벅거리지도 않는 눈, 격해진 숨소리, 붕어처럼 뻐끔거리는 입.
한동안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미유키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자, 자고 가라구...? 여기서...?”
“통금 있어?”
“그건 없는데... 갑자기... 그러니까...”
“오늘따라 혼자 있으면 외로울 것 같아서.”
‘외롭다’는 말을 듣자마자, 미유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내가 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
“.....”
한참, 아주 한참동안 이어진 침묵을 깬 사람은 미유키였다.
어찌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던 그녀는, 창밖에서 쏟아지고 있는 비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마, 많이... 외로울 것 같아...?”
나는 발밑에 깔린 이불을 당겨와 우리의 몸 위에 덮었다.
이후 미유키의 머리를 팔로 두르고, 내 품으로 끌어와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괴고는 화제를 돌렸다.
“따뜻해서 좋다.”
사실 화제를 돌렸다기보다는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너와 함께 있으니까 외롭지 않다고 말이다.
이러한 내 속뜻을 눈치챈 미유키는,
“.....”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쉬며 내 겨드랑이 사이로 자신의 팔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좋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