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너와 나의 흔적
* * *
“.... 츠다 군...”
잠에서 덜 깬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온기가 느껴지는 무언가가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다.
“으음...”
잠에 취한 신음을 내뱉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올린 나는, 미유키가 내 품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자 물었다.
“뭐하고 있는 건데...?”
잠결에 완전히 가라앉은 데다 약간 갈라진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을까?
미유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섯 시야... 이제 일어나야 돼...”
“벌써 그렇게 됐나...?”
“응... 알람 맞춰놨는데 못 들었어...?”
“못 들었어.”
나는 미유키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갓 일어난 미유키의 몸은 무척 말랑했다.
마치 모찌를 만지는 것 같은 느낌. 중독성이 심하다.
“이, 일어나야 된다니까아...”
“근데 춥지 않냐?”
“말 돌리지 말고... 빨리 일어나... 아 힘은 왜 이렇게 센 건데...”
낑낑거려보지만 꼼짝도 못하는 미유키.
그 모습에 힘이 빠진 웃음을 터뜨린 나는, 그녀를 놓아주고 상체를 일으켰다.
무거운 머리를 내리고 눈을 끔벅거리며, 어두운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빗소리는 멎긴 했지만, 소리만 멎었다 뿐이지 아직 보슬비가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열려있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린 나는,
툭.
미유키가 내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자 고개를 살짝 돌렸다.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이 뺨에 닿아 간지럽다.
미유키치고는 적극적인 애정표현.
실소를 터뜨린 내가 말했다.
“5분만 이렇게 있다가 세수하러 가자.”
“응...”
그렇게 우린 잠깐 동안 새벽녘의 운치를 즐기고 욕실 세면대로 향했다.
이후 갓 동거를 시작한 커플처럼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실없이 웃다가, 세수와 양치를 끝낸 뒤 미유키의 물건을 챙기고 밖으로 나와 차에 탔다.
밤새 물을 흠뻑 먹어서 그런가? 차 안이 서늘하다.
미유키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안전벨트를 매고는 자신의 어깨를 싹싹 비볐다.
그러다가 내 시선이 무안했는지, 자신의 삐죽삐죽 튀어나온 잔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야.”
껄렁한 투로 미유키를 부르자, 그녀의 목이 삐걱삐걱 돌아갔다.
“왜...?”
“밥 먹고 가자.”
“밥...? 갑자기...?”
“그럴 시간은 되지?”
“이 시간에 연 음식점이 있어...?”
“조금만 가면 있어.”
“그러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미유키.
자신의 허벅지 사이로 양손을 집어넣는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인 나는, 24시간 영업하는 라멘 가게로 차를 몰았다.
**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손님 몇 명밖에 없는 조용한 가게.
구석에 있는 일자 테이블에 앉아 안을 둘러본 미유키의 입가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분위기 괜찮다... 근처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어. 근데...”
미유키는 가게 벽면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가리켰다.
“포스트잇 때문에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산만하지?”
“아니이... 알록달록해 보인다구... 나쁘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젊어보여서 좋다고 얘기하려 했어... 혼자 넘겨짚지 좀 마...”
맥락상 산만하다고 말하려 했던 게 분명하면서 가식은...
나는 가게 주인의 눈치를 보며 모기만도 못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 미유키를 바라보며 킥킥거렸다.
이런 내 행동에 무안한 듯 손을 휘저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옷은 빨아서 줄게. 그리고...”
또 머뭇거리는 것을 보니, 내가 사줬던 속옷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나보다.
나는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다.
“속옷은 너 가져.”
“.... 꼭 그런 식으로 대놓고 얘기해야 돼...?”
“재는 것보단 낫지 않나?”
“그렇긴 해도... 어쨌든 알았어... 고마워.”
“근데 편했냐?”
“뭐가...?”
“속옷. 포장지에 엄청 편하다고 쓰여 있던데.”
“아 진짜...! 마츠다 군...!”
미유키의 입에서부터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능글맞은 장난을 치니 창피한 모양.
그럼에도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곧 표정을 풀고 못 말리겠다는 듯한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마주 웃어주는 것으로 상황을 넘긴 나는, 주인장에게 미소라멘 두 그릇을 주문하고 식탁에 팔꿈치를 괬다.
미유키는 가게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아주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이다.
“왜? 너도 뭐 쓰고 싶어?”
“그냥... 약간 흥미가 동하네...? 포스트잇은 직접 가져와야하는 건가?”
“아니. 네 뒤에 있어.”
미유키의 어깨너머를 가리키자, 그녀가 몸을 홱 돌리더니 포스트잇 한 장과 펜을 가져왔다.
그리고는 유려한 손놀림으로 무언가를 서걱서걱 그리기 시작했다.
점점 형태가 잡혀가는 그림.
3분도 안 돼서 두 남녀 캐릭터를 그린 미유키는, 가게 안에 마련된 압정을 집어 들더니 우리 자리의 가장 구석진 곳에 포스트잇을 꽂아놓았다.
두 캐릭터가 사이좋게 앉아, 무언가를 보며 감탄하는 것 같은 아기자기한 그림이다.
저번에 학교에서 봤었던 낙서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캐릭터의 머리 위에 대문자 알파벳이 박혀있었다.
H.M, 그리고 M.K.
저건 하나자와 미유키, 그리고 마츠다 켄의 영문 표기 앞자리를 딴 이니셜이었다.
미유키가 현재 갖고 있는 마음이 드러나는 것 같아 보기가 좋다.
캐릭터도 귀엽고... 마음에 든다.
묵묵히 그림을 살펴보고 있던 내가 물었다.
“테이블 위엔 왜 아무것도 없어?”
“음식은 그리기 어려워서... 그래도 뭔가 막... 추상적으로 보여서 더 좋지 않아?”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는 날 보며 배시시 웃은 미유키가 포스트잇을 한손으로 가렸다.
더 이상은 보지 말라는 뜻.
귀여운 짓만 쏙쏙 골라서 하는데, 확 오늘도 자고 가라고 말해버릴까 싶다.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우리의 흔적을 남기는 것도 괜찮구나. 기쁘다.
예전엔 저런 걸 보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었는데, 앞으로 포스트잇만 보면 미유키가 생각날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미유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그녀의 뺨이 홍조로 물드는 타이밍에 라멘이 나오자 입맛을 다셨다.
“먹자.”
“응.”
다음에 또 와야지.
미유키와 거사를 치른 다음 날에 오면 딱 적당할 것 같다.
**
“이런 개 씨...”
정문 상태를 본 나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낙엽은 물론이고 과자 봉지, 담배꽁초, 껌... 심지어 신발도 있고, 깨진 술병까지 있다.
밤새 온갖 것들이 다 밀려와 정문을 초토화시켰다.
아무리 비가 많이 왔다지만, 홍수가 난 것도 아닌데 이럴 수가 있나?
그냥 다른 봉사활동으로 시간 채워야지.
라고 생각하던 나는,
“마츠다네?”
뒤에서 렌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순식간에 표정을 풀었다.
렌카를 향해 입례를 한 나는, 그녀가 인사를 받아주자 물었다.
“일찍 오셨네요? 나나세 선배는요?”
“늦잠 잤으니까 먼저 가래. 어제 드라마 보느라 새벽에 잤다더라. 너 이거 혼자 다 청소할 거야?”
“아뇨. 경비 아저씨들이랑 같이 치워야죠. 왜요? 도와주시게?”
“아니.”
“너무 신랄하게 거절하니까 슬프네요. 빈말이라도 도와주겠다고 해주지.”
농담을 곁든 가벼운 꿍얼거림에, 렌카가 피식했다.
“비가 오는데 우산은 안 써?”
새벽녘에 내리던 보슬비는 이젠 안개비가 된 상태.
이 정도는 충분히 맞을만했기에, 나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예.”
“그래, 수고해.”
쿨하게 날 격려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문으로 향했다.
아직 한참 멀긴 했지만, 그래도 알음알음 인정을 받아가고 있구나.
오늘 미유키도 그렇고... 렌카도 그렇고...
반응이 무척 좋다.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며 걸어가는 렌카의 뒷모습을 바라본 나는, 경비들이 빗자루를 들고 오자 그들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청소를 했다.
이후 수업시간에 맞춰 교실로 들어가, 내게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건네는 동급생들에게 대충 화답해주고는 책상에 엎드렸다.
“마츠다, 곧 수업 시작해.”
꼭 기분 좋은 날엔 테츠야가 끼어들어서 짜증나게 만든다는 말이지.
엎드린 상태 그대로 한손을 뻗어 놈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린 나는, 약간이나마 남아있는 휴식시간을 만끽했다.
**
“마츠다 후배님,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치나미의 공손한 인사.
장난기가 든 나는, 그녀가 입례를 끝내자마자 죽도를 들었다.
“그럼 상단세 가르쳐주세요.”
“그건 안 돼요. 저는 마츠다 후배님을 중단세부터 차근차근 가르칠 거예요.”
“알겠습니다.”
“으응...?”
치나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상단세, 상단세 노래를 부르던 내가 빨리 포기를 하니 놀란 모양.
잠깐 그러고 있던 치나미의 눈이 미심쩍게 변했다.
“설마 혼자 독학할 생각은 아니겠죠?”
“그러면 안 되나요?”
“마츠다 후배님...! 조급한 마음을 먹어서는 안 돼요. 모든 배움엔 단계가 있는 법이에요.”
제자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단호하구나.
내가 상단세에 재능이 있다는 걸 증명해주면 되잖아.
대련은 언제 하려나? 호기롭게 도전하고 싶은데.
테츠야와 한 판 붙으면 좋은 승부가 될 것 같은데, 감독이 빨리 날 인정해주고 정식 부원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매니저 일은 그만둬야하나?
치나미와 급속도로 친해지고 있는데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으니까, 정식 부원이 되더라도 매니저는 계속해야한다.
지금도 치나미와 단둘이 있을 시간이 많은데, 이 기회를 내 손으로 놓치는 건 바보짓이지.
팔짱을 낀 치나미와 눈을 마주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부장한테 들었는데, 드라마 보다가 늦잠을 잤다면서요?”
“맞아요.”
“어떤 드라마였죠? 저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으음...! 기초가 다져질 때까지 상단세를 배우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알려드릴게요. 손가락도 거셔야 해요.”
손가락을 걸라고?
이거 어제 내가 미유키에게 했던 말인데... 참 공교롭다.
“제가 상단세를 배우려 하는 게 그렇게나 언짢으세요?”
“언짢은 게 아니라, 걱정이에요. 자, 약속해요.”
자신의 자그마한 새끼손가락을 내 앞으로 내미는 치나미.
검도복 소매가 스르륵 내려가면서, 그녀의 얇고 뽀얀 팔목이 드러난다.
저기에 키스마크를 새기고 싶은 유혹을 간신히 참아낸 나는 죽도를 허리춤에 옮겨놓고 화제를 돌렸다.
“일단 호구 청소부터 하겠습니다. 어제 제습기를 틀어놓긴 했지만, 밤새 비가 와서 보관실이 습해졌을 거예요.”
“마츠다 후배님...! 생각은 기특하지만 먼저 약속부터... 아앗! 어디 가세요!? 저 아직 말 안 끝났어요! 자, 잠깐만...! 조금만 천천히 가요...! 너무 빨라...!”
호구 보관실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나를, 치나미가 쫄래쫄래 뒤따라왔다.
마치 자신을 놔두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주인을 보며 기겁한 강아지가 달려오는 느낌인데...
귀엽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