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미유키에게 새긴 흔적 #2
* * *
모자, 여벌 옷, 샴푸, 바디워시... 그리고 슬쩍 숨긴 속옷까지.
나는 바리바리 싸들고 온 자신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미유키에게, 벽에 붙어있는 수납장을 가리켰다.
“저기다가 넣어놔. 구석자리 비어있어.”
“샴푸랑 바디워시 화장실에 넣어놔도 돼? 미스트랑... 로션이랑...”
“아예 살림을 차려라.”
“저, 저번에 왔을 땐 기초화장 제대로 못해서 푸석푸석 해가지구...”
무안한 듯 혼자 중얼거리는 미유키를 향해 픽 하고 웃어준 내가 말했다.
“상관없어. 넣어놔.”
“응...”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모든 일을 마무리한 미유키는 샤워를 하고 나와, 내가 깔아놓은 요 위에 앉아 무릎을 모으고 팔로 감쌌다.
흔들의자에 앉은 것처럼 몸을 앞뒤로 흔들던 그녀는, 저번에 빗물이 묻었던 다다미의 상태를 눈대중으로 체크해보았다.
“마츠다 군, 저거 다 마른 거야...?”
“어.”
“그렇구나... 다행이다. 휴대폰으로 TV 연동해서 영화 볼까?”
“그래도 되고.”
“아니면 예능 볼래?”
뻘줌함을 날려버리려는 듯 재잘재잘 떠드는 모습이 귀엽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어낸 나는 미유키의 옆에 편하게 앉았다.
“뭘 하고 싶은데?”
“그냥... 아무거나...”
미유키는 내 눈치를 보며 애꿎은 자신의 손등을 꾸욱 꾹 눌렀다.
급속도로 야리꾸리해지는 분위기.
그런 분위기를 만든 건 다름 아닌 미유키 자신임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나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미유키를 바라보며 베개에 뒤통수를 묻었다.
냅다 누워버리면서 발생한 미풍으로 인해 주변의 가라앉은 공기가 환기되었다.
미유키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무거웠던 표정이 한층 풀어졌다.
내 옆에 나란히 누운 미유키가 과거를 회상했다.
“저번 학기 말에 마츠다 군이 치한한테서 날 구해주지 않았다면... 우리 사이는 지금쯤 어땠을까?”
어떻게든 잘 사귀었을 거야.
왜? 그 이벤트를 놓쳤다고 해도 내가 다시 접근했을 테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 학기엔 널 볼 수 없었겠지.”
“왜? 마츠다 군이 퇴학당해서?”
“아니. 잇시키 해수욕장에 익사자가 한 명 발견돼서.”
구해주었던 일을 에둘러 상기시켜주자, 미유키가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 어깨를 약한 힘으로 밀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우리의 몸 사이에 생겨난 공간에 내려놓은 내가 말을 이었다.
“농담이고, 옛날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걸? 어쩌면 네가 교수님한테 찔러서 날 내보냈을 수도 있었겠다.”
“내가...?”
“넌 항상 내가 퇴학당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잖아.”
“그렇긴 했는데... ”
“지금 만약 내가 이상한 사건에 휘말려서 퇴학당하면 어떨 것 같냐?”
“막을 거야.”
주저 없이 결연한 눈으로 대답하는 미유키.
꽤나 놀란 내가 물었다.
“진짜? 내가 먼저 잘못한 일이라도?”
“지금의 마츠다 군이라면 먼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지만, 만약 그런다고 해도 막을래. 나중에 나한테 잔소리 들으면 돼...”
내 손을 들어줄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망설임조차 없이 저런 말을 해줄 줄은 몰랐다.
정말 만족스러운 대답이다. 내 입가가 절로 쭈욱 찢어질 만큼.
날 살피던 미유키의 눈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결투에서 이긴 사람처럼 약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부엌 옆에 있는 어두컴컴한 계단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물었다.
“근데 2층은 안 써...?”
“벽면이 사선으로 돼있어서 좁아.”
“얼마나 좁은데?”
“엎드려서 움직여야 될 정도야.”
“그럼 잠만 자기엔 좋겠네...? 비오는 날에 침구류 옮겨놓고 거기서 자면 분위기 괜찮겠다...”
“지붕 때리는 소리가 바로바로 들려오긴 할 것 같네. 다음엔 거기서 자자.”
또 다시 동침의 여지를 남겨두자, 미유키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누, 누가 잔대...? 그냥 그렇겠다고 말만 한 건데...”
“설레발이었어?”
“응... 완전...”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린 나는 몸을 움직여 미유키에게 바짝 붙었다.
그러자 미유키가 자신의 팔을 가슴께로 모아 온몸을 움츠렸다.
그녀와 거의 코가 맞닿을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간 나는,
“설레발 맞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재차 의중을 물었다.
“.....”
“맞냐고.”
“흐응...”
난데없이 콧소리를 내뱉는 미유키.
갈라질 정도로 낮아진 목소리가 듣기 좋았나보다.
나는 한손을 들어 미유키의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옆머리를 빗질하듯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미유키의 눈에 힘이 약간 풀리려고 할 때쯤, 기다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그녀의 뽀얗고 가느다란 목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
미유키는 방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내었는지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저 애가 타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그렁해진 눈동자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장난기가 든 나는 개구쟁이 같은 말투로 미유키를 불렀다.
“야.”
“응...?”
“야.”
“.....”
“야.”
“아 왜애...!”
미유키가 성이 난 목소리로 앙탈을 부렸다.
좋았던 분위기가 깨지려고 하자 화가 났나보다.
짜증어린 얼굴로 변하려던 그녀는,
스윽.
내 엄지가 자신의 입술을 스치듯 지나가자 헉 하는 숨소리를 내쉬었다.
코로 확 들어오는 박하 향을 음미하며, 나는 미유키의 아랫입술을 툭툭 튕겼다.
“하지 마...”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날 만류하고 있는데, 저건 그냥 모양만 거절이다.
미유키는 이런 애정표현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윽한 내 눈빛은 더더욱 좋아하고 있었고 말이다.
“내일 무슨 영화 볼래?”
“아무...”
“아무거나 빼고.”
“.... 시간대 보고 고를래...”
“주말이라 미리 예매해둬야 되나?”
“조조라서 괜찮을 것 같은데... 우리 동네 영화관은 상영관도 일반 상영관밖에 없어서... 한산할 거야...”
“10시 전까지만 가면 되겠지?”
“응... 아마도...”
여전히 미유키의 아랫입술을 튕기며 이런저런 담화를 나누던 나는, 그녀가 자신의 목을 한 차례 꿀렁거리는 틈을 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입술이 아니라, 가냘픈 목에 말이다.
“마, 마츠다 군...! 뭐해...!”
깜짝 놀라서는 내 머리를 밀어내려던 미유키는, 내가 그녀의 목에 키스를 하기 시작하자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얼마간 얌전히 키스를 받아주던 그녀는,
“아학...!”
돌연 간드러지는 신음을 터뜨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팔로 내 머리를 감싸더니, 후욱! 하는 콧바람을 내뱉으며 내 정수리를 간지럽혔다.
일부러 쪽쪽거리는 소리를 크게 냈는데, 이로 인해 조금씩 흥분하고 있는 것 같다.
“후으, 후...”
미유키는 곧 내 정수리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바람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내게 애정을 표현하려는 게 아니라, 진정을 하려는 행동이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점점 격렬해지고 있는 상황.
미유키의 목만 진득하게 애무하고 있던 나는, 그녀의 얇은 피부에 오므린 입술을 대고 살을 쪼옥 빨아들였다.
움찔.
살이 쭉 당겨지는 느낌이 낯설었는지, 미유키의 몸이 한 차례 격하게 튕기면서, 팔에 순간적으로 힘이 풀렸다.
그 틈을 탄 나는 미유키의 목에서 얼굴을 떼어내고, 그녀의 입술과 콧등, 그리고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하아... 하아...”
뺨이 완전히 상기된 채로 힘겨운 숨소리를 내뱉는 미유키의 흐트러진 눈동자가 내 쪽으로 향한다.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는 듯한 모습.
그런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보인 나는, 내가 만든 키스마크를 확인해보았다.
목의 중앙에서 약간 아랫부분이 압력으로 인해 피가 몰려있다.
자그마한 범위지만, 내일이면 조금 넓어지겠지.
그러면 제복 와이셔츠로 간신히 가려질 것 같다.
피부가 약해서 한 일주일 정도는 갈 텐데, 저걸 보고 나면 화를 내려나 싶다.
“아팠어?”
나긋한 내 물음에, 미유키의 눈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아픈 건 아니었구나. 약하게 빨아들이길 잘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거실 불을 끄고 다시 미유키의 옆에 누웠다.
그러자 헉헉거리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던 미유키가 옷자락을 잡더니 말했다.
“가지 마... 누가 가래...”
‘가지 마’가 아니라, ‘멈추지 마’가 아닐까?
미유키의 서투른 감정표현에 피식한 나는, 그녀의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흐읏...”
저번과 똑같은 행동.
그러나 뭘 하냐고 따졌던 그때와는 달리, 미유키는 이번엔 몸을 배배 꼬기만 했다.
더 나아가도 되겠다고 확신한 나는,
스윽.
그녀가 입은 티셔츠 안으로 손을 슬쩍 집어넣어보았다.
잘록한 허리라인을 위아래로 간지럽히듯 쓰다듬자, 말랑하고 후끈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뇌리로 전해져온다.
“힉...!”
짤막한 탄성을 터뜨린 미유키의 허리가 움츠러든다.
내 옷자락을 잡은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입과 코에선 빠르고 가쁜 숨이 새어나오고 있다.
미유키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면서 허리와 등허리를 어루만지던 나는, 아래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티셔츠 안에서 손을 빼냈다.
이후 꼼지락거리고 있는 미유키의 다리에 빼낸 손을 올려놓고 툭툭 두드렸다.
느릿하게, 일정한 리듬으로.
이런 내 행동에 안정이 됐을까?
헐떡거리던 미유키가 자연스레 호흡을 고르더니,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그녀의 뒤통수를 살살 만져준 내가 물었다.
“많이 놀랐어?”
도리도리 저어지다가, 곧바로 허겁지겁 끄덕여지는 고개.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은가보다.
스킨십도 스킨십이지만, 평소보다 더욱 상냥한 내 말투도 저 반응에 큰 비중을 차지했겠지.
나는 미유키의 목에 새겨놓은 흔적을 마사지하듯 꾸욱 꾹 누르면서, 그녀가 완전히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켄 군...”
미유키의 입에서부터 내 이름이 불렸다.
성이 아닌 이름을 듣는 건 오랜만이구나.
방금 일어났던 끈적한 스킨십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나보다.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말해.”
“나 화장실 가고 싶어...”
“다녀와.”
“배고프다...”
“뭐라도 먹을래?”
“졸려... 잘래...”
횡설수설하며 내 복부를 콕콕 찌르는 모습을 보니, 뭘 원하고 있는 건지 알겠다.
힘 빠진 콧바람을 내쉰 나는, 몸을 내려 보내 미유키와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대고 살짝 눌렀다.
그렇게 입맞춤을 끝내려는데, 촉촉한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혀가 빠져나와 내 입술 안쪽을 건드렸다.
예상치도 못한 행동에 꿈틀한 나.
이런 내 반응을 알아차린 그녀는 혀를 쏙 집어넣더니,
“히...”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내게 완전히 달라붙어선 허리를 꼭 붙잡았다.
마치 어디 가지 말라는 듯, 자신에게 붙어있으라는 듯 말이다.
‘뭐냐 너?’
혹시 미유키가 날 조련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잠깐 이러한 생각을 해본 나는, 미유키가 노곤한 하품을 하자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