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주인공의 재능
* * *
“미유키?”
“응? 왜?”
“목 아래는 왜 그래? 그거 반창고야?”
천진난만한 테츠야의 물음.
흠칫한 미유키가 반창고 위로 손을 가져갔다.
“아... 이거... 모기 물려서 그래...”
“그래? 반창고 붙이면 더 안 낫는 거 아닌가?”
“그게... 생각 외로 빨개져서...”
“조심 좀 하지. 약이라도 줄까?”
“이미 발랐어. 신경 써줘서 고마워.”
싱그러운 웃음을 지어보인 미유키가 몸을 뒤로 돌렸다.
다소곳하게 뒷걸음을 치던 그녀는, 뒤통수에 손을 댄 채 어슬렁거리고 있던 날 쳐다보며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마츠다 군, 빨리 와.”
“시간도 여유로운데 느리게 가도 돼.”
“뭐가 여유로워? 오늘 수학 쪽지시험 본다고 그랬는데 가서 벼락치기라도 해야지.”
“언제 그랬는데.”
“금요일에.”
“그걸 왜 기억하고 있냐 너는?”
미유키는 내가 다가올 때까지 우뚝 멈췄다.
덩달아 제자리에 서게 된 테츠야.
놈의 면상을 흘끗거린 나는 자연스럽게 미유키의 앞에 가서 섰다.
그리고는 껄렁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뭐.”
“옷에 먼지 묻었어.”
집게손가락으로 와이셔츠 앞섶에 묻어있는 먼지를 떼어주는 미유키.
손바닥으로 내 쇄골과 어깨 사이부근을 툭툭 털어주기까지 한 그녀가 귀엽게 날 타박했다.
“칠칠맞게 이런 거 묻히고 다니지 말고, 알아서 털고 다녀.”
“입기 전에 확인해봤었는데... 아마 윗공기가 탁해서 그런가보다.”
은연중으로 미유키의 작은 키를 놀리자, 그녀가 실소를 터뜨리더니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테츠야 군, 가자.”
“아, 그래...”
놈의 표정은 당혹으로 물들어있었다.
미유키가 평소보다 더욱 살갑게 날 대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거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해도 미유키가 저렇게까지 했는데, 모를 수가 없겠지.
도키아카를 플레이할 땐 주인공인 네 이벤트를 챙겨주면서, 순진해빠진 널 어떻게든 히로인들과 가깝게 지내도록 만들었지만...
지금은 아니란다.
여기 주인공은 네가 아닌 나야.
네겐 암울한 미래밖에는 없다고.
그런데 문득 궁금한 게 생긴다.
앞서 생각했던 대로, 도키아카를 할 땐 내가 직접 테츠야의 이벤트를 챙겼다.
히로인들이 있는 장소로 이동시켰고, 대화를 나눴으며, 선택지를 골랐다.
하지만 지금은?
만약 테츠야가 렌카, 혹은 히요리와의 이벤트를 맞닥뜨린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우유부단하고 멍청한 성격이니만큼 쓸모가 없는 짓을 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여복이 많은 놈이니만큼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마츠다 군, 빨리 오라니까?”
테츠야와 함께 멀어지고 있는 미유키의 부름.
오늘 차에 탈 때도 그렇고, 방금 먼지를 털어줄 때도 그렇고...
눈빛에 결의가 서려있다고 느껴졌었는데, 준비를 한 거겠지?
평일 날 안는 것도 좋겠지만, 학교를 가야한다는 강박에 쫓기기보다는 첫 관계이니만큼 다음 날이 휴일이어야 좋겠지.
이번 주 문화제가 끝나는 날, 분위기를 잡자.
**
“마츠다 후배님! 주말은 잘 보내셨나요?”
양손을 어깨까지 올린 치나미가 마치 어린이집 선생마냥 손을 흔든다.
항상 높은 저 텐션이 밤에도 유지가 될까 궁금해진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내가 그러려니 하며 말했다.
“잘 보냈습니다. 스승님은요?”
“저도 잘 보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보이죠? 월요일이라 기운이 없으신가요?”
내가 힘이 없어 보이는 게 아니라, 네가 너무 과하게 힘을 내고 있는 거란다.
“착각입니다. 오늘은 뭘 할까요?”
“오늘은 수건을 개어놓고 물을 옮긴 뒤, 부활동 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호구만 청소하면 돼요.”
“의외로 한가하네요? 월요일이라서 바쁠 줄 알았는데. 그러면 바로 연습해도 되나요?”
“아뇨! 오늘은 부실 안에 있으셔야 해요. 2학기 첫 대련을 참관해야하거든요.”
대련이라는 말에, 내 귀가 쫑긋했다.
2학기 첫 대련은 도키아카의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다.
부장인 렌카에게 릴레이로 도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몇 명이 신나게 털린 뒤로부터는 도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
그렇게 감독이 혀를 끌끌 차며 부원들을 나무라려는 순간, 테츠야가 호기롭게 손을 든다.
호구 착용법도 모르는 초보자에 경기 운영 같은 것도 전혀 모르지만 말이다.
그 패기를 마음에 들어 한 감독은 렌카에게 도전을 받아주라 명하고, 렌카는 엉망진창인 자세로 달려드는 테츠야를 적당히 받아준다.
그 뒤 대련이 끝나고 기세가 좋다며 칭찬을 하고, 이후로부터 놈에게 검도 과외를 자주 해주게 된다.
그러다가 테츠야가 갖고 있는 아주 자그마한 재능을 발견한다.
테츠야와 렌카가 본격적으로 가까워지는 시간이 바로 그때 이후다.
본래라면 문화제가 끝나고 발생하는 이벤트지만 지금 일어난다는 건...
단역이었던 내가 주연이 됨으로서 타이밍이 어긋났다는 뜻이다.
마치 미유키와의 사소한 이벤트를 챙길 때처럼.
이는 테츠야를 위한 이벤트가 아니라, 날 위한 이벤트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니면 둘을 위한 이벤트거나.
“대련이요?”
“네! 친목도 다질 겸, 1학년 후배님들에겐 보는 눈을 쌓게 해주는 수련의 일환이에요. 저는 수건을 개어놓고 있을 테니까, 후배님께선 비품실에서 생수를 가져와주시겠어요?”
“예.”
**
조용한 분위기가 감도는 부실 안.
호면과 호완을 제외한 호구를 착용한 2, 3학년들의 자리 옆에, 테츠야를 비롯한 1학년들이 정좌를 한 채 앉아있다.
렌카는... 없구나.
호구를 입고 있는 건가?
“저는 호구를 착용하러 가볼 거예요. 후배님께선 저쪽에 앉아서 참관하세요.”
내 귀에 입을 가져다댄 치나미의 말.
그녀가 내뱉은 후끈한 숨결이 귀를 간질인다.
한쪽 어깨를 슬쩍 들어 간지럼을 참아낸 내가 물었다.
“스승님도 대련을 하나요?”
“네. 후배님께선 상단세를 배우고 있는 입장이잖아요. 절 보면서 무언가를 얻어가셨으면 좋겠어요.”
아아... 우리 치나미... 마음씨가 어쩜 이리도 고울까.
혹시 거울 보면서 들박 당하는 거 좋아해?
부끄러워선 얼굴을 가린 채, 쾌락에 앙앙거리는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알겠습니다.”
치나미가 총총걸음으로 멀어지자, 나는 테츠야의 옆에 정좌했다.
이후 팔꿈치로 그를 툭 건드렸다.
“오늘 상태가 왜 이러냐?”
“어...? 뭐가?”
“아침부터 골골대던데, 뭐 잘못 먹었나 해서.”
“아... 난 괜찮아. 그냥 기운이 없는 것뿐이야.”
솔직하게 말해라. 미유키가 나랑 엄청 친해진 것 같으니까 기분이 싱숭생숭하다고.
“싱겁긴.”
“저... 마츠다.”
“뭐.”
“혹시...”
놈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감독실 문이 열리더니 감독인 도지마 고로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에 입을 꾹 다문 테츠야가 전방을 바라보았다.
혹시 미유키와 어떤 관계냐고 물어보려 했나?
아쉽게 됐네. 네 소심한 성격상 지금이 아니라면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끙끙 앓겠지.
넌 그냥 미유키와 내가 꽁냥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발기나 하는 게 어울린단다.
그게 너로서도 좋은 거야.
“준비들은 됐나?”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는 고로의 말에, 검도부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예! 감독님!””
쩌렁쩌렁 울리는 부실.
이번에도 타이밍을 맞추는데 실패한 내가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만족스레 고개를 주억거린 고로가 말했다.
“1학년들은 대련을 통해서 격검에 눈을 떴으면 좋겠고, 그저 경기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예절 또한 함께 배우길 바란다. 규칙은 알고 있겠지?”
““예, 감독님!””
난 조금밖에는 모르는데.
그냥 눈치껏 보면 되나?
치나미한테 먼저 물어봤어야했던 건데, 너무 속편하게 있었구나.
“치나미와 렌카의 대련으로 시작하고, 렌카는 남아서 도전자를 받는다. 도전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수하도록.”
““알겠습니다!!””
덜컥.
곧이어 탈의실 문이 열리더니, 호구를 착용한 치나미와 렌카가 나란히 걸어 나왔다.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렌카,
그리고 뽈뽈거리며 걸어오는 치나미,
키 차이가 꽤 있어서 마치 엄마와 딸 같다.
그런데 치나미는... 호구 무게를 버틸 수 있는 건가?
위태로워 보이는데 걱정이다.
각각 기다란 흰 띠, 빨간 띠를 호면 뒤에 묶은 두 사람은 곧 한 변이 10미터 쯤 되어 보이는 직사각형 경기장의 외곽에서 멈췄다.
그러자 고로와 호구를 착용하지 않은 3학년 선배 두 명이 홍백기를 들고, 외곽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섰다.
렌카와 치나미는 경기장 중앙에 붙여져 있는 흰색 테이프 앞에 쪼그려 앉아 준거했다.
여기서 두 사람의 실력을 설명해주는 설명충이 한 명 나와 줘야 정석인데... 전부 바짝 긴장하고 있어서 조용하다.
그렇다면 직접 만들면 되지.
몸을 기울여 테츠야를 툭 건드린 내가 조용히 물었다.
“이노오 선배가 그렇게 잘한다며? 얼마나 잘하냐?”
“전국 아카데미를 통틀어서도 최상위권이래. 대회에 참가하면 무조건 우승후보로 꼽힌다고 하시던데.”
“그래? 나나세 선배는?”
“나나세 선배도 잘하신대. 개인전 성적도 괜찮으시지만, 특히 단체전에선 엄청나다고...”
“설명 고맙다.”
“아냐.”
어색한 웃음을 지은 테츠야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는 사이,
“시작!”
고로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렌카와 치나미가 기합을 터뜨리며 각자의 자세를 취했다.
“하압!”
“야아앗!”
렌카는 의젓하고, 치나미는 귀엽고.
두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기합이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낸 나는, 건들건들한 척을 하며 두 사람의 대련을 주시했다.
발을 찔끔거리고 팔을 흔들며 탐색전을 펼치던 두 사람.
먼저 공격을 시도한 건,
“머리이잇!”
머리 위로 팔을 높게 치켜든 상단세를 취하고 있던 치나미였다.
발을 구르며 내려침과 동시에 죽도의 중심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놓고, 왼손을 쭈욱 뻗는 그녀.
그로 인해 사거리가 늘어난 죽도가 렌카의 왼쪽 좌면을 노렸다.
후웅!
기세 좋게 휘둘러진 죽도는 곧 렌카의 머리를 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흡!”
렌카가 순식간에 손목을 올려, 죽도를 사선으로 세워 치나미의 공격을 흘렸다.
짜악!
죽도와 죽도가 맞부딪치는 경쾌한 소리를 시작으로, 두 사람의 흉흉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얍! 머리! 머릿! 머리잇!”
집요하게 렌카의 머리를 노리는 치나미.
아마 머리 방어를 위해 손을 들 때 다른 쪽을 노리려나본데... 렌카가 워낙 바위 같아서 틈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다.
렌카 또한 재빠른 치나미의 공격을 방어하느라 공격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말이다.
혹시 치나미도 렌카만큼의 재능이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때쯤,
“목!”
짧은 기합을 내지른 렌카의 양손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 뻗어나간 죽도의 끝.
그것은 곧 치나미가 착용하고 있는 호면의 바로 중앙, 그 아래에 닿았다.
콱!
“우겍!”
정확하게 목 부위를 타격당한 치나미의 고개가 확 젖혀지자, 고로가 흰색 깃발을 들며 소리쳤다.
“한판!”
동시에 심판을 보던 3학년 선배 두 명의 손에서 백기가 번쩍 들렸다.
검도는 심판 3명 중에서 2명 이상이 같은 색의 깃발을 들면 점수가 난다.
그리고 만장일치로 들린 백기는, 렌카의 호구 뒤에 달려있는 끈의 색이기도 했다.
“후우...”
점수를 딴 렌카는 호흡을 골랐다.
제대로 집중하고 있었구나. 치나미의 공세가 대단했다는 증거다.
짝짝짝!
숨을 죽이고 있던 부원들의 박수소리가 부실 안을 울리고...
자세를 고쳐 잡은 치나미가 가운데에 자리해있는 렌카의 맞은편에 서서 목례를 했다.
그러자 고로가 소리쳤다.
“재개!”
곧바로 다시 공방을 펼치는 두 사람.
두 번째 승부는 첫 번째 승부와는 달리,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짜악!
“한판!”
이번 득점도 렌카의 것이었다.
3판 2선승제인 검도에서 점수를 2점 빼앗겼다는 건, 승패가 갈렸다는 것을 뜻했다.
멋진 받아허리에 제대로 타격당한 치나미는, 깜찍하게 발을 구르더니 렌카와 마주보며 준거를 하고 검을 회수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비록 점수는 따지 못했지만, 치나미의 실력은 정말 뛰어났다.
그건 다음 타자로 나온 3학년 선배와 렌카의 대련을 보고 있으면 답이 나왔다.
“하이야아압!!”
낭인마냥 괴상한 기합을 내지른 선배가 달려들고,
“머리!”
짜악!
빈틈을 파고든 렌카가 아주 손쉽게 한판을 따내고...
그렇게 다섯 명의 남녀 선배들이 무너졌을 때, 렌카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다음 도전자는 거수.”
고로의 부름에도 조용한 부실.
창피함을 무릅쓰지 않으려는 부원들의 행태에, 고로의 이마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이런 패기도 없는...”
그 순간,
“제가 해보겠습니다!”
테츠야가 손을 들었다.
“저요.”
그리고 나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