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54화 (54/313)

〈 54화 〉 주인공의 재능 #2

* * *

“갑상의 끈은 이렇게 조여야 해요. 그나저나 정말 다행이네요. 감독님께서 괜찮다고 해주셔서요.”

내 앞에서 갑상 착용을 도와주는 치나미.

그런 그녀를 바라본 내가 진중한 투로 말했다.

“그러네요. 근데 스승님.”

“네?”

“멋졌어요.”

그 말에 치나미의 눈에 호선이 그려졌다.

“점수는 따지 못했어요. 역시 렌카는 뛰어난 검도인이에요.”

“제 눈엔 스승님이 더 뛰어나보였는데요.”

“과찬이세요. 얻어가신 게 있었을까요?”

있었다.

다른 떨거지와 렌카가 붙을 땐 너무 빨리 끝나버려서 뭘 보고 할 것도 없었지만,

렌카와 치나미의 승부에선 주인공 버프라도 받았는지 두 사람의 공수 흐름과 움직임이 어느 정도는 보였다.

전부 보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렌카에게 한 번 정도는 유효타를 입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이죠. 근데 잔심이 뭔가요? 아까 선배들이 잔심이 중요하다고 하는 소릴 들었는데.”

“아... 그건 말이죠...”

치나미는 호구 착용을 도와주는 동안 검도에서 점수를 따는 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유효격자, 잔심, 기검체일치...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뤄야 한판을 얻는다고 했는데,

이해는 하긴 했지만 솔직히 복잡했다.

호구를 입는 시간에 전부 배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치나미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곁들어주었다.

“진검으로 따져보았을 때, 상대방을 한 번에, 정확한 공격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으면 한판이에요. 더 부연설명이 필요하긴 하지만, 일단은 이 정도로 알아두시면 좋아요.”

“알겠습니다.”

“부딪쳐보세요. 렌카는 정말 강해서 점수를 따기가 어려울 테니, 하고 싶은 것들을 마구 해보아요.”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럼에도 내 기분을 배려해 말을 순화해서 해주는 치나미가 고맙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히죽 웃은 내가 말했다.

“스승님의 원한을 갚겠습니다.”

“프힣!”

웃음을 터뜨리며 내 머리에 머리수건을 둘러주는 그녀.

비웃음은 아니었지만, 기대감은 전혀 없는 듯했다.

호면을 끼워주고 머리끈까지 묶은 그녀가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이제 다 됐어요. 미우라 후배님의 대련이 끝나면, 호완을 착용하시고 감독님에게 가시면 돼요. 하고 싶은 건 마음껏 해보세요.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테니까요.”

“예.”

치나미의 격려를 들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허리가 통통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나름 어울리는 듯하다.

부실 가운데를 살펴보니,

“으랴앗!”

가식적인 기합성을 내뱉는 테츠야가 렌카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렌카는 호기롭기만한 테츠야의 공격을 묵묵히 잘 받아주고 있었다.

내가 알던 대로 흘러가고 있지만...

이 이벤트는 내가 빼앗아서 새로운 장면으로 만들 거다.

승부수는 초반에 띄워야한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점수를 딸 수 있는 기회는 없다.

속으로 전의를 불태우며 죽도를 든 나는,

“오...! 마츠다! 어울리는데?”

부실 구석에서 조용히 잡담을 나누고 있는 선배들 앞으로 가 허리를 확 낮췄다.

그리고는 대련에 집중하고 있는 고로의 눈치를 슬쩍 본 뒤, 렌카가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재롱을 부렸다.

“번개의 호흡...”

@@

“번개의 호흡...”

움찔.

미우라의 공격을 받아주고 있던 렌카는, 멀찍이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목소리를 듣고 흠칫했다.

최근에 재미있게 보았던 애니메이션의 최애 캐릭터가 사용했던 기술명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누구지...?’

따악­!

미우라의 서투른 공격을 쳐낸 렌카는, 그가 숨을 고르는 틈을 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흘깃거렸다.

왼발을 앞으로 쭉 빼고 허리춤에 있는 죽도에 손을 가져간 놈이 한 명 보인다.

호면을 착용하고 있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마츠다 켄 같았다.

애니엔 관심이 없을 것 같았는데 저런 걸 알 줄이야... 의외다.

그리고 조금 화가 난다.

검도를 배운지 얼마 안 된 초심자는 대련을 시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독은 미우라와 마츠다의 기세를 높이 평가하고, 특별히 호구를 입게 해줬다.

헌데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려도 못할망정 저런 웃기는 장난이나 하고 있다니.

검도를 마치 놀이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좋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 예법이 몸에 익지 않은 초심자니까 봐주자.

“번개의 호흡이 뭐에요?”

순진한 치나미가 마츠다에게 다가가 질문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마츠다는...

“혈액순환과 심장고동을 촉진시켜 체온과 회복력을 상승시키고, 육체능력을 강화하는 호흡법 중 하나입니다. 마치 도깨비가 된 것처럼 강해지죠.”

애니에 나왔던 설명을 그대로 읊었다.

“와아...! 그런데 그런 호흡법도 있었나요?”

“있죠.”

“번개의 호흡... 이름이 정말 멋지네요. 저도 한 번 배워보고 싶어요.”

“가르쳐드릴게요. 나중에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속으면 안 돼 치나미!

넌 지금 농락당하고 있어!

뜨거워지려는 속을 달랜 렌카는 자신과 미우라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고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우라와의 대련은 여기까지만 하자는 뜻.

그 신호를 확인한 고로가 양손의 깃발을 들어 경기 중단을 선언했다.

“그만. 둘 다 위치로.”

가운데로 간 렌카는, 자신을 향해 어정쩡한 자세로 준거를 하는 미우라를 보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마츠다와는 달리 진지한 그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미우라와 인사를 마친 렌카는,

“혹시 마지막 공격이 어땠는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그가 다가와 질문을 하자 온화하게 웃어보였다.

“감독님이 계실 경우, 수련생간의 훈수는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야. 나중에 말해줄게.”

“아, 네...! 감사합니다!”

“응. 수고했어.”

곧이어 고로의 부름을 받은 마츠다가 건들건들하게 걸어와 자신의 맞은편에 섰다.

그리고는 입례를 하며 말했다.

“잘 부탁합니다.”

말투에 예의가 섞여있기는 하구나.

아카데미 내에서 들려오는 소문처럼, 확실히 태도가 고쳐지고 있는 것 같다.

“준거.”

고로의 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마츠다가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준거하는 자세도 나름 괜찮다. 미우라 테츠야보다 조금 낫다.

이는 치나미의 일대일 과외 덕분이겠지.

마주 준거하고 일어난 렌카는 마츠다가 죽도를 세우자 눈을 빛냈다.

얼마 전 봤을 땐 죽도가 갈대마냥 흔들렸었는데, 지금은 고요하다.

가만히 서있는 상태인 것을 감안해도 겨눔세가 퍽 괜찮다.

아까 그 건방진 모습만 고치면 나름 쓸 만할 것 같은데...

‘좋아.’

저런 녀석은 한 번 제대로 뭉개주면 며칠간 얌전해진다.

그러니 적당히 농락하면서 자존심을 살살 건드려주고, 치나미에게 마츠다를 다소 엄하게 대하라고 해야겠다.

“시작!”

고로의 목소리를 듣고 죽도를 세우려던 렌카는,

“응?”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의문 섞인 감탄사를 내뱉고야 말았다.

마츠다가 팔을 높게 들며 어정쩡한 상단세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중단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녀석이 상단세를 사용한다고?

설마 치나미가 대련에서 상단세를 사용하라고 했나?

흘끗 치나미를 보니, 놀람을 넘어 거의 경악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시킨 건 아니라는 뜻.

‘이게...!’

눈을 가라앉힌 렌카는 조용히 이를 갈았다.

적당히 농락하려고 했는데, 그냥 대놓고 망신을 줘야겠다.

기본이 안 되어있는 상단이 얼마나 허접한지 알려주고, 검도에 진심이 되도록 만들어주지.

렌카는 어떻게 마츠다를 요리할지 고민하며 자세를 잡다가,

‘응...?’

상단세를 취한 마츠다의 몸이 꽤 거대해보이자 퍽 놀랐다.

태산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세가 아주 매섭다.

상단세에 딱 어울린다고 느낄 정도로.

호면의 면금 사이로 보이는 눈빛 또한 너무나도 진지하다.

자신이 풍기고 있는 날카로운 기세마저도 정면으로 맞받아치고 있다.

기개가 대단하다. 마치 호랑이를 보는 것 같다.

순간 호흡을 잃어버릴 뻔한 렌카는 재빨리 평정심을 되찾았다.

의외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그뿐.

겨눔세가 어설퍼서 빈틈이 많고, 스스로의 손목으로 제 시야마저도 가리고 있다.

‘좋아.’

한판은 자비 없이 가져간다.

공격조차 못하게 해서 좌절감을 심어주자.

칼자루부를 꽉 쥔 렌카는, 마츠다가 발구름을 시도하는 타이밍에 맞춰 힘차게 죽도를 뻗었다.

쐐액­!

상단세의 대표적인 약점 중 하나, 목찌름.

경험과 실력이 뛰어난 치나미마저도 이 찌르기에 점수를 내준 적이 수두룩한데, 하물며 중단세와 발동작의 기초도 떼지 못한 마츠다가 이 공격을 피하거나 받아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조금 아플 거야.’

죽도의 선혁이 목 부위의 타격점으로 쏘아지는 것을 확인한 렌카는, 마츠다가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파칫­!

“어...?”

자신의 죽도가 마츠다의 호면을 스쳐지나가자 눈을 크게 뜨고야 말했다.

‘피, 피했어...?’

예상하고 있던 건가? 목찌름이 날아올 거라고?

아니, 아니다.

마츠다의 현 자세를 보면, 다리가 일반적인 검도 시합에선 볼 수 없을 정도로 넓게, 옆으로 벌어져있었다.

이는 예상하고 피한 게 아니라, 동물적인 감각으로 움직였다는 뜻이다.

“흡!”

후우웅­!

뒤이어 짧고 가벼운 기합을 터뜨린 마츠다의 팔이 역동적으로 휘둘리면서, 공기를 찢는 것 같은 파공성을 냈다.

피잉­!

렌카는 면금 사이로 보이는 마츠다의 날카롭게 빛나는 눈이 자신의 허리로 향해있자 침을 꼴깍 삼켰다.

‘허리...!’

퍼뜩 정신을 차린 렌카가 다급하게 움직이려고 했지만, 이미 마츠다의 죽도는 그녀의 오른쪽 허리에 닿은 뒤였다.

쩌어억­!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묵직한 타격음.

몇 차례의 대련으로 긴장이 풀려있던 부실 안의 분위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

“.....”

고요함만이 맴도는 부실.

부원들도, 치나미도, 렌카도, 심지어는 고로도 넋을 잃은 채로 렌카와 마츠다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그 침묵을 깬 것은,

“된 건가? 저 점수 딴 건가요?”

아무렇지도 않게 죽도를 회수하고 뒤로 물러난 마츠다의 반신반의한 목소리였다.

그에 두 번째로 정신을 차린, 심판을 보던 3학년의 고개가 고로를 향해 삐걱삐걱 돌아갔다.

“하, 한판...?”

* * *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