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60화 (60/313)

〈 60화 〉 덧씌워지는 추억

* * *

[쇼콜라티에가 12년간 한 여자를 짝사랑하는 이야기에요. 여자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지만, 부부관계가 잘 풀리지 않아 자신을 사랑했던 쇼콜라티에에게 은근한 추파를 던지며 이용하려드는... 그런 드라마입니다. 저는 약간 소악마스러운 유부녀를 연기했어요. 속물 같은 느낌으로요.]

여배우가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에 대한 소개를 간략하게 하자, MC가 장난기 어린 기색으로 묻는다.

[로맨틱한 드라마네요?]

[로맨틱하다고 보기엔 조금... 일단은 불륜에 관한 드라마니까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아닙니까.]

[네...?]

당황하는 배우.

방청객들이 빵 터지며 TV에서 나오는 사운드를 보다 풍성하게 해주고 있다.

미유키와 함께 예능을 보고 있던 나는,

토독. 톡.

그녀가 내 손톱을 자신의 손톱 끝으로 건드리자 헛웃음을 켰다.

“TV 보자더니 관심도 없네?”

“마츠다 군.”

“왜.”

“손톱 관리 좀 해.”

“갑자기?”

“손톱은 예쁜데 너무 까칠까칠해.”

TV 볼륨을 최대한으로 낮춘 나는 미유키를 바라보며 옆으로 누웠다.

그러자 그녀가 내 부스스한 앞머리를 자신의 검지와 중지로 잡고 밑으로 쭈욱 잡아당겼다.

그렇게 미용사마냥 앞머리를 갖고 놀던 그녀가 말했다.

“마츠다 군.”

“왜.”

“졸려?”

“아니. 너는?”

“나도 안 졸려.”

“그래도 자려고 노력해봐. 밤낮 바뀌면 힘들잖아.”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마츠다 군은 밤낮이 자주 바뀌나보네? 밤에 뭐해?”

은근슬쩍 과거를 캐물으려고 하는 속내가 다 보인다.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는 어깨를 으쓱인 내가 반문했다.

“알려줄까?”

“응. 궁금... 아, 아냐... 안 궁금해...”

냅다 고개를 주억거리려다 황급히 부정을 하는 그녀.

히죽거리는 내 표정을 봐서 은근한 불안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쉽네.”

“이, 이상한 생각하지 마...”

“무슨 이상한 생각?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

“뭐래애...!”

새침하게 입술을 내민 미유키가 내 티셔츠 자락을 꽈악 쥐었다.

아까 첫 경험을 할 때가 생각난 듯한 모습.

몸을 배배 꼬며 부끄러움을 표출하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 문화제도 끝났는데 언제 밥 먹을래...?”

“네가 원하는 날에 잡아.”

“응. 근데 마츠다 군.”

“왜.”

“나 추워.”

그냥 안아달라고 하면 되지, 꼭 이렇게 한 번 꼰다.

우리 미유키는 언제쯤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려나 모르겠다.

여우같아가지고.

“이불 덮어. 창문 닫아줄게.”

“.....”

“농담이야. 이리와.”

킥킥거리며 미유키의 목 아래로 손을 집어넣자, 그녀가 자연스레 팔베개를 해오며 가까이 붙어왔다.

그런 그녀를 그대로 껴안은 내가 말했다.

“오늘 자고 일어나서 뭐할래?”

“몸 상태부터 보고 결정할래...”

“하는데 많이 아팠어? 지금도 아려?”

“그, 그런 걸 왜 물어봐...!”

이런 얘기를 해야 서로에 대해서 더 잘 알아갈 수 있는 거지.

다음에 할 때도 피드백을 반영할 수 있고.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미유키는 지금 숫기가 없는 상태다.

첫 경험을 한 직후이니만큼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창피할 테니 입 다물고 있자.

“미안, 미안.”

나긋하게 사과를 하며 미유키의 엉덩이를 토닥이자, 그녀가 흐응... 하는 촉촉한 콧소리를 내더니 내게 더욱 달라붙었다.

곧이어 자그맣게 하품을 하는 그녀.

긴장이 이제야 전부 풀리면서, 피로감이 한 번에 확 몰려온 듯했다.

“안 졸리다더니 금방 자게 생겼네?”

얄미운 투로 미유키를 놀린 나는, 그녀가 이마를 내 가슴에 콕 대자 낮게 웃었다.

오늘은 많은 일이 있었던 날이었다.

내가 도키아카에 온 이후로부터 가장 중요한 날이자, 지금까지 했던 내 모든 행동들이 빛을 발하는 날이기도 했다.

뿌듯하다. 그리고 아직까지 마음이 들떠있다.

미유키는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챘을까?

“.....”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뱉으며 잠든 걸 보면 아닌 것 같다.

‘잘 자라.’

행여나 미유키가 깰까 우려해 속으로 인사말을 건넨 나는 눈을 감았다.

**

“나 들어갈게.”

“들어가.”

조수석 문을 열고 나가려던 미유키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새끼손가락을 꼭 잡고 있는 내 주먹을 본 그녀의 뺨이 순식간에 발그레해졌다.

나와 오른손을 번갈아 힐끗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손을 놔줘야 가지...”

“네가 빼면 되잖아.”

“너무 세게 잡고 있어서 못 빼겠어...”

최대한 약하게 잡고 있는데 무슨...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치자, 미유키가 내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오더니 손등을 쪽 빨아들였다.

희미하게 새겨진 분홍색 틴트 자국.

그것을 만족스레 바라본 그녀가 차에서 내리더니 생긋 웃었다.

“이번엔 미루면 안 돼. 알았지?”

식사 초대를 말함이었다.

차 안에 놓아둔 물을 한 모금 들이켠 내가 대답했다.

“알았어.”

대답을 듣고 다소곳하게 손을 흔든 그녀는 곧 골목을 걸었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힘겨워하고 있는 게 보인다.

아랫배를 감싸고 있는데다 걸음걸이를 보니 내전근, 더 나아가 그 아래까지 알이 제대로 배긴 듯한데... 이대로 그냥 보내기가 힘들다.

차를 대충 세워놓은 나는 미유키에게 뛰어가 그녀를 부축했다.

“굳이 몰래 가야 되냐?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를 하지... 답답해가지고...”

혀를 찬 내 나무람에, 미유키의 입꼬리가 순간 쓰윽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내 이런 행동을.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옮기던 그녀의 입이 오물거렸다.

“.... 엄마랑 아빠한테 들키면... 오전에 만나서 놀았다고 할게...”

“마음대로 해.”

“퉁명스럽게 말하지 마...”

“또 잔소리하려고 시동 거는 거야?”

“마츠다 군은 항상 잔소리를 해야 들으니까...”

실소를 터뜨린 나는 미유키의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눌렀다.

“오늘따라 트집이 조금 심하지 않아?”

“.... 트집이 아니라, 마츠다 군을 위해서 하는 조언이야... 으음...”

손길을 음미하고 있는 듯한 미유키.

씨익 웃은 나는 미유키의 가랑이 사이로 손을 내려 보내려다가, 그녀가 내 손목을 붙잡고 위로 들어 올리자 입맛을 다셨다.

“여, 여기 밖이야...”

“아무도 없는데?”

“그렇다고 해도 안 돼...”

“알았어.”

“그, 그리구... 밤에 부를 테니까 나올 수 있지...?”

“밤에는 왜? 산책하려고?”

“응...”

슬슬 테츠야와 하던 일을 나와 하려고 하고 있다.

좋은 징조였다. 미유키가 스스로 놈과의 추억을 내 추억으로 덧씌우려는 것은.

“걸을 수 있겠어?”

“아마도...? 조금 쉬면 나아질 것 같은데...”

“지금도 이러고 있는데 저녁엔 잘도 움직일 수 있겠다. 무리하지 말고 차라리 심야영화를 보든지 하자. 내일도 휴일이잖아.”

“난 아무거나 좋아. 근데... 영화 볼 때 팔걸이 올리고 마츠다 군 무릎에 발 올려놔도 돼?”

“오늘은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그럼 머리 밀어도 돼?”

“선 넘지는 말고.”

서로 농담을 곁들이며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미유키의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 앞에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던 그녀는, 곧 열쇠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더 꽁냥거리고 싶었는데, 몸 상태가 별로니 어쩔 수 없지.

푹 쉬게 해주자.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미유키를 보낸 나는 시내를 향해 차를 몰았다.

이후 공용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내려 왁자지껄한 인파를 거닐며, 메시지 어플을 켜고 전화번호를 연동해 치나미를 찾아보았다.

‘있다.’

얼마 없는 전화번호 목록 중간에, 한눈에 봐도 치나미임을 알 수 있는 프로필 사진이 있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사진이다. 이미지와 딱 어울리긴 하네.

닉네임은 복숭아를 뜻하는 ‘모모’에 호칭 접미사를 붙인 [모모님]이구나.

깜찍하다. 친해지면 그렇게 불러볼까 싶다.

[스승님, 뭐하세요?]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치나미의 답장이 왔다.

[마츠다 후배님이시군요. 저는 밥을 먹으려 하고 있었어요.]

[고봉밥이죠?]

[네, 어떻게 아셨나요?]

[왠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후배님은 감이 정말 좋으시네요? 대단해요!]

놀리는 건데... 그대로 받아들여버리는구나.

뒤이어 날아온 복숭아 캐릭터가 박수를 치고 있는 이모티콘.

그 잔망스런 캐릭터를 잠깐 멍하니 보고 있던 나는 화면을 두드렸다.

[프로필 사진은 복숭아 캐릭터죠? 복숭아가 그렇게 좋아요?]

[네. 오늘도 에피타이저로 먹었답니다.]

[보통은 후식으로 먹지 않나요?]

[저는 이렇게 해요. 물론 후식으로도 먹을 생각이에요.]

가만 생각해보면 치나미는 미연시 서브 히로인에 딱 어울리는 캐릭터였다.

경각심이 별로 없어 판치라를 자주 보여주는 엉뚱함...

모에요소로 백치미가 들어간 천진난만한 캐릭터 말이다.

[복숭아 철이 지나서 아쉽겠네요?]

[아직도 많이 나오고 있으니 괜찮아요. 그런데 어쩐 일일까요? 검도에 대해 궁금한 게 생기셨나요?]

[아뇨. 제자로서 스승님의 안부를 묻기 위해 문자해봤습니다. 사제지간인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물론 그렇죠. 마츠다 후배님은 뭘 하고 계신가요?]

네가 렌카를 매도하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봤단다.

자신으로서는 너무 커보였던... 넘을 수 없는 에이스가 내게 굴복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지만, 타락조교물 히로인의 코스프레를 한 채 누워서 내게 봉사를 하고 있는 렌카를 보고 경악하며 현실을 자각하는 거지.

항상 우아하고 고고했던 렌카가 무너지는 모습에 어떠한 성벽이 깨어난 너는, 그녀의 귓가에 순진한 말투로 렌카쨩은 허접이었다고, 실망했다고 말하고...

아니라고 격하게 부정하는 렌카의 아래를 할짝거리면서 진심즙을 뿜어내게 만들어 절정시키는 그림...

이거 꽤 괜찮은 망상 같다.

[저는 잠깐 뭘 좀 사러 왔습니다.]

[무엇을 살 생각이신가요?]

[이것저것 사려고요. 복숭아 아이스크림 사줄까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집에 많아요. 저는 이만 밥을 먹으러 가볼게요.]

[맛있게 드세요.]

[네, 마츠다 후배님도 쇼핑 재미있게 하세요.]

치나미와의 대화를 끝낸 나는 문구점으로 향했다.

거기서 미유키가 좋아할만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골라 담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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