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61화 (61/313)

〈 61화 〉 덧씌워지는 추억 #2

* * *

“마츠다 군.”

사람이 거의 없는 영화관 안.

내 허벅지 위에 올라간 미유키의 다리 사이에 팝콘 상자를 끼운 채 팝콘을 먹던 나는, 미유키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왜.”

“나 마사지.”

“싫어.”

“오늘 나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며.”

“열두 시 지났다.”

단호한 말에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미유키가 자신의 종아리를 조이더니, 팝콘 박스를 입구가 가려질 정도로 조였다.

그 사이에 손을 쏙 집어넣어 팝콘을 하나 꺼낸 나는, 그것을 입 안에 집어넣고 씹었다.

그리고는 미유키를 향해 히죽 웃어보였다.

“.....”

이런 내가 무척 얄미웠을까?

미유키의 인상이 마구 구겨졌다.

내게 욕이라도 하고 싶은 듯 입을 우물거리던 그녀는, 이내 마사지를 포기하고는 다리를 내려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한손으로 종아리를 살살 풀어주기 시작하자 배시시 웃었다.

“진짜 딱 지금까지만 봐준다.”

“응. 그리고 엄마가 다음 주 주말에 밥 먹자고 하시는데... 괜찮지?”

“괜찮아. 이제 갈까?”

“아직 크레딧 다 안 올라갔는데? 마사지해주기 귀찮아?”

“언제든 할 수 있는 거잖아.”

“난 지금 받고 싶은데...”

“그러든가.”

그나마 남아있던 사람도 다 빠져나가, 상영관 안엔 우리 둘밖에 없었다.

영사실 기사는 남아있을 텐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마도 언짢은 표정이겠지.

크레딧이 전부 올라갈 때가 되어서야, 우리 둘은 상영관 밖으로 나왔다.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고 있다.

이럴 때 또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해야 하는 건데...

“오늘 들어갔을 때, 아주머니가 뭐라고 안 하셨어?”

“뭐가?”

“요새 외박이 너무 잦다든가... 뭐 그런 거.”

“아... 별 말은 안 했는데...?”

여태 미유키의 행실이 너무 발라서, 딱히 뭐라고 하진 않았나보다.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말했다.

“오늘도 자고 가.”

“이미 마츠다 군이랑 영화 보러 간다고 말해버려서...”

“우리 집에서 잔다고 말씀드리면 되지.”

“안 돼... 바보야... 대신 내일 일찍 갈게...”

“내일 잔다고? 그럼 같이 아카데미로 가면 되겠네.”

“대체 내 말을 어떻게 들으면 그런 소리가 나와...?”

“그만큼 너랑 같이 있고 싶은 거지.”

대놓고 마음을 드러내자, 미유키의 얼굴에 기쁨과 함께 수심이 가득해졌다.

어쩔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같은 표정.

피식한 나는 미유키의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그냥 해본 말이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냥 해본 말 맞아...?”

“글쎄. 저 뒤에 있는 거나 가져가.”

“뒤에?”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린 미유키.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몇 개의 필기구를 발견한 그녀가 물었다.

“펜이랑 샤프잖아?”

“어. 선물이야.”

“갑자기...?”

테츠야와의 추억을 모조리 지우면서 미유키의 주변을 내 흔적으로 도배해놓을 거다.

일단은 놈과 함께 사서 쓰던 학용품 같이 하찮은 것들부터 시작한다.

이번 주말에 미유키의 집에 가게 되면, 문에 걸려있는 마네키네코도 바꿔놔야지.

“공부 열심히 하라고.”

“아니... 뭐... 주면 고맙게 받긴 하겠지만... 선물이 너무 뜬금없는 거 아니야...?”

“저번에 보니까 필기구가 낡았더라고. 앞으로 그거 써라.”

“그건 또 언제 봤대...? 고마워. 잘 쓸게, 마츠다 군.”

“그리고 집에 돌아가면 연어 많이 먹어.”

“연어? 왜?”

대답하지 않은 나는 신호가 걸린 틈을 타, 미유키의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에 내가 근육통에 좋은 음식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미유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면서 네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 사고 가자.”

“.... 응...”

“냉장고에 넣어놨다가 내일 먹어라. 오늘 먹지 말고.”

“아,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에...”

말끝을 흐린 미유키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만지니 통증이 찾아온 모습.

학교에 갈 때쯤이면 상당부분 괜찮아지겠지만... 조금 아쉬웠다.

왜? 테츠야 앞에서 약간 절뚝거리는 미유키가 보고 싶었으니까.

“마츠다 군... 파란불 됐어... 출발해...”

“뒤에 차도 없잖아.”

“그래도 교통법규는 지켜야지...! 얼른 출발해...”

“알았다. 잔소리는...”

마지막으로 허벅지를 톡 건드린 나는, 미유키의 몸이 한 차례 달싹이는 것을 바라보며 운전대를 잡았다.

몸이 점점 솔직해지고 있구나.

아니, 이건 최면, 조교물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인데.

**

“안녕, 테츠야 군.”

“안녕, 미유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어제 잘 쉬었어?”

“응... 어제 산책 못 가서 미안해.”

“아냐... 네 상태도 살피지 못하고 다짜고짜 연락한 내 잘못이지. 지금은 괜찮아?”

“많이 괜찮아졌어.”

뒷좌석에 앉아 미유키와 대화를 나누던 테츠야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있는 공간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마츠다, 주말에 잘 쉬었어?”

“잘 쉬었지.”

진짜, 제대로 잘 쉬었단다.

미유키랑 함께 말이지.

찔끔하며 재빨리 표정관리를 하는 그녀를 곁눈질한 내가 테츠야를 타박했다.

“룸미러 보게 대가리 치워라.”

그러자 미유키가 내 팔목을 가볍게 때렸다.

“대가리가 뭐야... 꼭 그렇게 말해야 돼?”

“머리나 대가리나 똑같은 거 아닌가?”

“속된 표현이잖아... 빨리 다시, 순하게 말해.”

“미우라, 머리통 좀 치워.”

“마츠다 군, 지금 진짜 유치한 거 알아? 초등학생이야? 사춘기 지났잖아.”

유치한 거 알아.

근데 너랑 티격태격하는 게 좋은데 어떡하냐.

콧방귀를 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테츠야가 발끈한 미유키를 말리는 것을 보며 아카데미로 출발했다.

그렇게 주차장에 차를 대고 교문으로 향하던 나는, 미유키가 자신의 제복 와이셔츠를 여미는 것을 보았다.

첫 경험 때 쇄골 부근에 만들어놓았던 키스마크를 가리려는 행동이었다.

전혀 보이지 않는 부위임에도 은근히 신경이 쓰이긴 하겠지.

드르륵.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빵녀를 비롯한 학급 학생들의 인사를 받았다.

축 쳐진 채로 좋은 아침이라고 말하는 애들을 보니 뭔가 웃기다.

문화제가 끝나면서 월요병까지 함께 찾아와 무기력해진 모양이다.

자리에 앉아 앞자리의 퉁퉁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나는, 부반장과 문화제 뒤풀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미유키가 다가와 손을 내밀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

“아까 차에서 먹던 초콜릿 몇 개만 주라.”

“왜.”

“친구들 나눠주려구.”

“차에 있는데? 키 줄 테니까 네가 가져오든가.”

“나 걷기 힘든데?”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잠깐 벙 쪄있던 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까 보니까 잘만 걷던데 뭔 소리야. 그리고 지금이 주말인 줄 아냐? 어리광 다 들어주는 시간은 이미 지났다.”

“나 힘들어.”

“그래서?”

“힘들어.”

마치 부탁을 안 들어주고 배기냐는 눈빛으로, 한쪽 입꼬리를 쓰윽 올리고 있는 그녀.

지금 날 조교하려고 하는 듯한데...

이번만큼은 봐준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마지막이다.”

“응.”

경고를 했음에도 헤실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이런 식으로 츤데레처럼 반응해주는 게 정말 좋은가보다.

이렇게 업보를 쌓아두면 주말에 힘들 텐데...

네 방에서 자지로 마구 혼내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라.

혼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터벅터벅 교실을 나가려던 나는, 테츠야가 미유키에게 하는 물음을 듣고 멈칫했다.

“저... 미유키, 손에 든 샤프는 뭐야? 새 거네?”

“아... 이거? 선물 받은 거야.”

“선물?”

“응. 전에 쓰던 건 노브가 잘 안 눌려서... 선물 받았던 걸로 바꿨어.”

“말을 하지... 같이 새로 사러 갔으면 됐을 텐데.”

“미안해. 근데 테츠야 군, 아까 차에서 먹던 젤리 남은 거 있어?”

“아, 있어. 줄게.”

서운함이 얼핏 담겨있는 테츠야의 목소리를 듣던 나는 교실을 나섰다.

괜히 오지랖을 부리는 건 아닐까 우려해 누구한테 선물을 받았냐고 물어보지도 못하는 놈을 보니, 나는 여기 떨어질 운명이었던 것 같다.

**

“마츠다 후배님, 주말은 잘 보내셨나요?”

활기찬 인사를 건네며 방긋 웃는 치나미.

넌 월요일인데도 기력이 넘치는구나.

보기 좋다.

“잘 보냈습니다. 스승님은요?”

“저도 잘 보냈어요. 문화제 대항전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저녁에 렌카와 가보니까 엄청 무섭던데... 1등이겠죠?”

당연하지.

히로인이 계획한 문화제가 1등을 놓치는 거 봤어?

이건 러브 코미디의 상식이라고.

“예.”

“와아...! 축하드려요!”

“꼬치 가게 수입은 어땠나요?”

“흑자가 발생했어요. 참여한 부원들끼리 전부 나눴답니다. 참, 제가 오늘 감독실 주변을 청소하면서 엿들었는데... 조만간 감독님께서 마츠다 후배님을 정식 부원으로 인정하실 것 같아요.”

“그래요?”

“그래요? 라니요? 엄청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후배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보네요?”

내 시큰둥한 말투를 따라하며 허리춤에 손을 올리는 그녀.

당장이라도 날 나무랄 듯 인상을 쓰고 있는데, 말티즈가 왕왕거리면서 까부는 느낌이라 귀엽다.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거죠.”

“마츠다 후배님, 감독님께서는 사고뭉치였던 후배님을 인정해주신 거라구요. 검도에 관해 지금보다 더욱 많이 배울 수 있게 되는 기회이기도 해요. 기쁘지 않으신가요?”

“정식 부원이 되면 매니저 일은 그만두게 되나요?”

치나미의 고개가 천천히 주억거려졌다.

“그렇게 되겠죠.”

“그럼 안 할래요.”

“네?”

“저는 매니저를 하면서 스승님한테 상단을 배우는 게 좋아요.”

“으응...? 매니저 일이 좋다구요?”

큼지막한 치나미의 눈이 두어 번 끔벅였다.

그녀를 향해 겸연쩍게 웃은 내가 말을 이었다.

“스승님이랑 같이 하는 게 좋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죠.”

“그래요...? 마음은 기쁘지만 저는 후배님의 실력이 팍팍 늘어났으면 좋겠는데...”

“스승님은 제가 싫은가보네요? 제가 주변에서 없어졌으면 좋겠습니까?”

“네...? 어떻게 눈 하나 깜박하지도 않고 그런 말씀을...! 제자를 싫어하는 스승이 세상에 어디 있나요...!?”

“그럼 됐네요. 스승님한테 배우는 게 부실에서 배우는 것보다 팍팍 늡니다. 일대일로 가르쳐주는데 안 늘 수가 없죠. 감독님이 부르면 매니저 일을 계속하겠다고 말하겠습니다.”

“.... 매니저 일이 힘들지는 않으신가요?”

“네. 재미있어요.”

“마츠다 후배님은 이상한 사람이시군요.”

그건 허드렛일을 자처하는 너도 마찬가지 아닐까?

“스승님이 잘 대해주니까 거기에 조련당한 거죠.”

“조, 조련이요...?”

“단어가 조금 그러면 감화되었다고 할까요? 어쨌든 스승님도 괜찮다는 거네요?”

“저야 마츠다 후배님이 같이 해주면 좋긴 한데요...”

“결정 났네요. 이제 진정한 사제지간이 된 기념으로 마사지해줄까요? 방금 전에 미우라의 입례를 받아줄 때 보니까 어깨가 굳어있던 것 같던데...”

치나미를 향해 성큼 다가가며 양손을 접었다 폈다 하자, 그녀가 눈을 데굴 굴리더니 대답했다.

“저는 지금 괜찮으니까 마음만 받을게요. 자, 이제 일해요.”

“오늘은 뭘 할까요?”

“일단은 호구 상태부터 체크해요. 그 다음엔....”

오늘 할 일을 재잘재잘 설명하는 치나미.

그녀의 목소리엔 일말의 기쁨이 서려있었다.

매니저 일을 계속하겠다는 내게 약간이나마 감격한 모양인데, 나중엔 더 좋아하게 해줘야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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