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몰래, 둘이서 #3 (분량 추가됨)
* * *
“어떡하냐 이거...?”
“.... 몰라.”
방 안에 우두커니 서선 남녀가 흩뿌린 정사의 흔적을 바라보던 우리의 대화였다.
이불은 하던 도중 제쳐놔서 괜찮았고, 베개도 땀으로 젖긴 했지만 상태가 좋았다.
다만 침대 커버는 무조건 빨아야했다.
이걸 들고 나가면 미유키의 가족들이 볼 가능성이 굉장히 컸다.
이래서 안 하려고 했던 건데... 순간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 내 탓이 크다.
아니 근데 미유키의 몸을 보고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이상한 거 아닌가?
난 정당한 행동을 했을 뿐이다.
라며 정신승리를 한 내가 말했다.
“문 살짝 열어보고, 아무도 없으면 빨리 욕실로 달라가서 손빨래할까?”
“세제 같은 건 세탁실에 있는데...? 세탁비누도...”
“그냥 비누로 빨아야지. 아니면 네가 몰래 세제 갖고 올래? 나는 빨래하고 있을게.”
“아, 안 돼... 가뜩이나...”
말끝을 흐린 미유키의 시선이 자신의 하반신으로 향했다.
가운데가 흠뻑 젖어있는 반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
바지보다 더욱 젖은 팬티를 차마 입을 수는 없어서, 그녀는 현재 노팬티인 상태였다.
“마츠다 군...!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음흉한 눈으로 미유키의 아래쪽을 살펴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았어.”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어이없어...”
숨기고 있는 것보단 낫지 않나 싶은데.
“그래서 어떻게 처리할 건데?”
“으음... 아...!”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친 미유키가 내 몸에 코를 대었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본 그녀가 말했다.
“엄마랑 아빠는 내가 방에 없으면 굳이 찾으러 오지 않는 편이거든...? 마츠다 군은 나처럼...”
미유키가 숨을 헉 삼켰다.
내가 자신처럼 흐트러져있지 않다고 말을 하려다가 순간 부끄러움이 찾아온 듯했다.
잠깐 눈을 데굴 굴린 그녀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 나보다 상태가 괜찮으니까, 먼저 내려가서 시간 보내고 있어. 나는 씻으면서 커버하고 이불 간단하게 빨고 내려갈게. 엄마랑 아빠가 나 어디 갔냐고 물어보면 샤워하러 갔다고 해.”
“갑자기 무슨 샤워냐고 의심하시면?”
“오늘은 더우니까... 괜찮을 거야. 자주 이러거든...”
“나도 땀 냄새 나는데.”
“좋은 냄새밖에 안 나...”
나는 팔을 올려 겨드랑이 사이에 코를 대어보았다.
이런 내 행동에 헛웃음을 켠 미유키가 말했다.
“진짜로 안 난다니까?”
“알겠는데... 나도 찜찜하잖아. 그냥 같이 가서 빨리 빨고 나오는 게 낫지 않나?”
“나 샤워해야 되잖아...!”
“하면 되지. 넌 샤워하고, 난 빨래할게.”
“2층에 있는 욕실은 하난데...?”
“그래서?”
같이 샤워를 하자는 내 태연스러운 태도에, 미유키가 잠시 벙 쪘다.
입을 벌린 채 황당해 마지않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던 그녀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빨개지는 게 눈에 보인다.
“미쳤어...? 안 돼...”
“왜.”
“뭘 왜야...! 안 되는 건 안 돼... 일단 마츠다 군이 먼저 나가서 복도에 아무도 없나 확인해봐. 난 커버 걷고 있을게...”
말을 마친 미유키가 침대 커버를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이불과 속옷 등을 그 안에 넣고 보따리처럼 만든 그녀는, 멀뚱히 서있는 날 보더니 눈썹을 구겼다.
“뭐해...?”
“너 보고 있었는데.”
“왜...?”
“그냥.”
“.... 빠, 빨리 확인부터 해...”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방 문을 아주 조용히 열어보았다.
자그마한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복도를 살펴보니, 1층에서 미도리와 와타루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카나는... 자기 방에 있는 것 같다.
“아무도 없어.”
“지금 나가면 돼?”
“어.”
“알았어... 아, 그리고 마츠다 군. 거, 거기... 그...”
미유키의 시선이 내 아랫도리로 향했다.
잘 닦았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것 같은데... 절로 실소가 터져 나온다.
“깨끗하게 닦았잖아. 네 앞에서.”
“.... 난 못 봤단 말이야... 어, 어쨌든 먼저 나가... 난 뒤따라갈게...”
“잠깐만.”
몸을 돌린 나는 미유키를 끌어안으려다가, 그녀가 안고 있는 보따리를 보고 멈칫했다.
그에 내 의도를 알아차린 미유키가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안아줘...”
아까의 문란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그녀를 향해 피식 웃어준 나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방을 나섰다.
이후 계단에서 미유키와 눈을 마주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
“아주머니.”
바둑판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내 부름에, 돌을 어디다 놓을지 고민하던 미도리가 대답했다.
“응?”
“여기다 놓으면 안 되나요? 그럼 백돌 공간이 조금 없어지게 되고, 형태도 깨지게 될 것 같아요.”
“그래? 여기?”
“네, 거기요.”
내가 가리킨 곳에다 흑돌을 놓는 미도리.
여유만만하던 와타루의 얼굴에 오만상이 쓰였다.
“야... 야! 너 바둑 둘 줄 모른다며?”
“몰라요.”
“근데 그 길을 봤다고?”
“느낌상...”
와타루의 격앙된 반응을 체크한 미도리의 입꼬리가 환하게 올라갔다.
“내일 장은 당신이 보고 와야겠네?”
“아직 안 끝났어... 기다려...”
초조한 듯 한쪽 다리를 떨기 시작하는 그를, 미도리가 나무랐다.
“다리 떨지 마. 돈 떨어져.”
“.... 마츠다, 너 이제부터 훈수두지 마라.”
“아까는 마츠다 군더러 날 도와달라고 하더니... 왜 이렇게 속이 좁아? 초보자인 날 이기는 게 그렇게 중요해?”
“주말에 마트 가기 싫어.”
솔직해서 좋네.
어쨌거나 와타루의 저런 반응을 보면, 내가 본 수가 치명적이었나보다.
여기서도 주인공 버프가 나타난 건가?
아니면 진짜 초심자의 행운 같은 느낌인가?
아마 후자일 것이다.
바둑은 몸이 아닌 머리를 쓰는 스포츠.
신체능력은 좋아도 대가리가 무식한 내게 바둑 재능이 있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뭐하고 있어? 웬 바둑이야?”
어느새 샤워를 마치고 내려온 미유키의 물음.
그에 다시 바둑에 집중하고 있던 미도리가 미유키를 타박했다.
“너는 손님도 있는데 무슨 샤워를 그렇게 오래 해?”
내 눈치를 슬쩍 본 미유키가 어색한 듯 웃어보였다.
“그게... 더, 더워서 씻다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니?”
왠지 나 때문에 혼이 나는 것 같아서 미안해진다.
꽁한 얼굴로 날 쓰윽 노려본 미유키가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 다시 공부 시작할 거니까 마츠다 군 데려갈게.”
“또? 그냥 놀러갔다 오지?”
“안 돼... 열심히 해야 중간고사 때 낙제점 안 받지...”
그리 말한 미유키가 내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내가 사라지게 되자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와타루, 그리고 아쉬워하는 미도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미유키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활짝 열려있는 창문틀에 널어져있는 이불, 방 안에서 강풍으로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
그리고 시계를 걸어놓았던 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있는 침대 커버...
심지어는 콘센트에 드라이기 선까지 꽂혀있다.
미유키가 준비해놓은 그것들을 바라본 내가 물었다.
“이렇게 말리려고?”
“어쩔 수 없잖아... 엄마랑 아빠가 1층에 있으니까 코인세탁소도 못 가구...”
“미안해.”
“아냐... 서로 좋아서 한 거니까...”
나는 미유키를 품으로 끌어와, 향긋한 살구 향을 풍기는 그녀의 정수리에 키스를 해주었다.
이후 그녀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열심히 커버와 이불을 말리기 시작했다.
날씨는 좋지만 바람이 꽤 세찼고, 이불과 커버가 두꺼운 재질이 아닌데다 미유키가 물기를 잘 빼놓아서 건조는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 같다.
미유키의 성격상 새벽에 세탁기를 한번 돌릴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네 언니는 뭐한대?”
드라이기로 커버의 물기를 말리던 내 물음에, 미유키가 대답했다.
“샤워 끝나고 언니 방에 귀 대봤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자고 있나봐.”
그녀가 그런 말을 하며 안도하는 찰나,
쿵쿵!
미유키! 나 책 빌려줘! 머리 쓰는 걸로!
문 밖에서부터 카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이런 클리셰가 없으면 안 되지.
화들짝 놀란 미유키가 날 쳐다보았다.
짧은 시간동안 멍하니 그러고 있던 그녀는, 제정신을 차리고는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내가 커버와 이불을 걷는 사이, [추리소설]이라고 적혀있는 수납칸의 책을 몇 권 꺼내 문으로 갔다.
덜컥.
“이, 이거 다 읽어...”
문을 조금만 열고 책을 건네는 미유키.
그것을 받아든 카나가 물었다.
“마츠다 군이랑 공부하고 있는 거야?”
“.... 응. 이제 하려구...”
“드라이기 소리 들리던데.”
“머리 말리느라...”
“머리는 왜 말려?”
“방금 샤워했으니까...”
“샤워는 왜 했는데?”
“더, 더워서...”
“과일이나 과자 먹을래? 갖다 줄까?”
문틈사이에서 뜬금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카나의 얼굴색은 밝았다.
그냥 밝은 게 아니라, 누군가를 놀리고 싶은 것처럼 개구쟁이 같았다.
목소리도 마찬가지. 장난기가 가득했다.
‘알고 있구나.’
몸을 섞은 것까진 모를 수 있어도, 여기서 무언가 야한 일을 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눈치챘다.
이러면 더욱 반응이 궁금해지는데.
오늘 여기서 자고 간다고 하고 싶어진다.
“피, 필요 없어...”
“아쉽다. 이제 공부할 거야?”
“그렇다니까...!”
“무슨 공부야?”
“그, 그걸 언니가 왜 신경 써...! 같이 공부할 것도 아니면서...”
“나도 공부하고 싶은데?”
“뭐라는 거야...! 빨리 나가...!”
흥분한 미유키를 보며 깔깔거린 카나는,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는 얌전히 문을 닫았다.
“.... 알고 있나봐...”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올려놓은 미유키의 말이었다.
“어. 그런 것 같다.”
“어떡하지...?”
나는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고 있는 미유키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런 식으로 장난을 친 걸 보면 딱히 심각하게 여길 사안은 아니라고 봐. 나중에 둘이서 잘 얘기해봐. 네가 생각하고 있는 반응보다 훨씬 좋은 반응을 보여줄 걸?”
“그, 그런가...?”
“분명히 그럴 거야. 그리고 미안해. 곤란하게 해서.”
재차 진심어린 사과를 하자, 미유키의 표정이 풀렸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내 앞머리를 정리해주며 나긋하게 말했다.
“괜찮다니까? 서로 좋아서 한 거라고 했잖아...”
투둑.
미유키와 시선을 맞대고 있던 나는, 무언가가 창틀을 때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비가 오고 있다.
멀리서 번쩍하는 빛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쏟아질 것 같은데...
항상 미유키와 끈적한 일을 하고 나면 이런 식으로 비가 온다.
진짜 뭔가 있는 건가? 왠지 이 비가 나와 미유키의 아이덴티티인 것처럼 느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미유키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창문을 닫더니 말했다.
“오늘 이거 다 말릴 때까지 못 가.”
“그래, 알았어. 그럼 계속한다?”
“응. 근데 드라이기는 쓰지 마.”
카나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나보다.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커버를 쫙 펼쳐 선풍기 앞에 가져다댔다.
그런 내 옆으로 이불을 펼친 미유키가 달라붙었다.
“아까 엄마랑 아빠가 바둑 두고 있었지?”
“어. 내일 장보러 가는 걸로 내기하시던데.”
“항상 저래. 그래놓고 누가 이기든지 같이 가.”
“그럴 것 같더라.”
“어쨌든 바둑에 집중하고 있으니까 한동안 안 올라오겠지?”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내가 더 잘 알겠냐?”
“왜 맨날 삐딱하게 말해? 짜증내지 마.”
“아까 했던 말이네.”
관계를 가질 때의 일을 언급하자, 미유키의 고개가 푹 수그려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얄미웠는지, 그녀가 자신의 발로 내 발을 약하게 밟고 꾸욱 눌렀다.
그런 그녀와 티격태격하던 내가 생각했다.
일이 우여곡절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무난하게 흘러가서 다행이었다고 말이다.
그래도 앞으로는 여기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건 자제해야겠다.
카나가 눈치채는 건 괜찮지만, 와타루와 미도리가 눈치채는 건 조금 부담스러우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