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도짓코 치나미
* * *
가슴께에 리본이 달린 블라우스와 하늘하늘한 플레어스커트, 그리고 굽이 조금 있는 흰색 샌들...
귀여움과 청순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코디다.
맨날 제복과 도복을 입은 모습만 봤고, 렌카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이라서 더욱 와 닿는다.
백화점 입구에 우뚝 서선 양팔로 자신의 골반을 툭툭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치나미를 멀찍이서 지켜본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의 뒤에서 어깨를 톡 쳤다.
“스승님.”
“므힉!”
벌레라도 앉은 것 마냥 경기를 일으키는 치나미.
헛웃음을 켠 나는,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황당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엇... 후배님이시군요...! 안녕하세요!”
아카데미 때처럼 입례를 하는데, 뭔가 아쉬운 것 같으면서도 신선하다.
도복이 아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마주 입례를 한 내가 물었다.
“안녕하세요. 언제부터 이케부쿠로에 있었던 거예요?”
“다섯 시간 정도 됐네요.”
오래도 있었구나.
“혼자 다섯 시간요?”
“네.”
“친구들이랑 쇼핑하러 온 게 아니었나보네요?”
“혼자 왔어요. 한정판으로 나온 모모님 인형을 사기 위해서요.”
“한정판은 못 참죠. 이해합니다.”
“그렇죠?”
“근데 빈손이네요?”
“조금 늦어버렸지 뭐에요. 그래서 웃돈을 주고 구매하려구요.”
그렇게까지 해야 되니?
복숭아에 미쳐있는 줄은 알았지만... 대단하다.
코디는 분홍분홍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배고프지는 않아요?”
“조금 고픈 것 같네요. 후배님께서 태워다주시면 밥부터 먹어야겠어요.”
“또 고봉밥?”
“네!”
힘차게 대답하는 걸 보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고픈가보다.
“크로스백은 찾았나요?”
“아니요. 후배님이 오시기 전에 백화점 분실물 센터에 가봤는데, 들어온 게 없대요.”
“화장실에 흘리고 온 건 아니고?”
“다 찾아봤는데도 없어요. 누군가가 잘 썼으면 좋겠네요.”
보통 사람이라면 굉장히 짜증이 날만한 일임에도 긍정적이다.
게다가 누군가가 잘 썼으면 좋겠다니...
순한 건 알고 있었지만 착해도 너무 착한 거 아닌가?
지갑에 돈이 얼마 안 들어있나? 크로스백이 싼 건가?
아니면 크로스백 안에 복숭아와 관련된 용품이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집에 빨리 돌아가야 돼요?”
“그건 아니지만... 맨몸으로는 할 게 없네요.”
맨몸이라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도처에 깔려있는데?
화장실도 있고, 피팅룸도 있고, 계단도 있잖아.
“그럼 밥 먹고 갈까요? 제가 살게요.”
“스승씩이나 돼서 제자에게 얻어먹을 수는 없어요.”
나중엔 제자의 손길에 수없이 많이 가버릴 텐데,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
“복숭아 아이스티 한 입 하고, 스파게티를 먹으면 딱일 것 같은데 어떤가요?”
“허엇...!”
상상만 해도 좋은지 입맛을 찹찹 다시는데, 메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것 같다.
아니, 그냥 복숭아와 관련된 것만 들어가면 다 좋아하겠지.
“아주 혹하는 얘기군요...! 훌륭한 조합이에요...!”
“그러면 파스타 전문점으로 가죠?”
“으으음...”
일생일대의 고민거리를 안은 사람처럼 깊은 생각에 잠긴 치나미가 내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이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돈을 빌렸다가, 나중에 제가 후배님의 식사 값까지 드리는 형식으로 할게요. 이러면 괜찮을까요?”
여기선 안 그래도 괜찮다느니 하며 부담을 지울 필요는 없다.
그냥 알았다고 하자. 치나미가 내게 돈을 주려고 할 때 거절하면서 새로운 이슈도 만들어낼 겸.
“그렇게 하세요.”
“네! 그럼 얼른 가요.”
“사실은 엄청 배고팠죠?”
“맞아요. 조금만 더 있었으면 흐물흐물한 오징어가 될 뻔했어요. 이렇게요. 흐물흐물...”
저번에 검도부에서 날 비판할 때 보여줬던 것처럼 양팔에 심한 웨이브를 주는 그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도 아랑곳 않고 저러는 게 보기 좋다.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린 나는, 마주 웃어주는 치나미와 함께 백화점 식당가로 향했다.
**
“후아... 그 전문점의 복숭아 아이스티는 정말 맛있었어요. 아무래도 단골이 될 것 같아요.”
상쾌한 표정을 지은 치나미의 말에, 나는 힘없는 콧바람을 내뱉었다.
“보통은 주 메뉴의 맛을 보고 단골집을 정하지 않나요?”
“아, 나폴리탄 스파게티가 맛있다는 뜻이었어요. 아이스티로 마무리를 한 직후여서 엉뚱한 말을 해버렸네요.”
“그렇군요. 그런데 복숭아 아이스티 맛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어허...! 아니에요. 검도의 공격에도 미세한 차이점이 있듯이, 아이스티 또한 마찬가지에요. 분말을 얼마나 넣느냐, 어떤 식으로 보관을 하느냐, 얼마나 숙성시키느냐에 따라서 맛이 달라진답니다. 참고로 분말 40그램에 250밀리리터 정도의 물을 넣으면 황금이라고 할 수 있는 비율이 탄생해요.”
신나선 재잘재잘 떠드는 모습이 귀엽다.
“나중에 직접 해줄 수 있어요?”
“물론이에요. 여태 맛보지 못한 최상의 복숭아 아이스티 맛을 보여드릴게요.”
“기대되네요. 레몬즙 같은 것도 넣나요?”
“전 개인적으로 싫어해요. 시중에 파는 분말은 안 그래도 레몬 맛이 느껴지는데, 거기다 즙까지 섞이면 복숭아 맛이 전부 사라져버려요.”
타락시키고 싶어지는 말을 해주네?
처음엔 헷갈려할 만큼 아주 극미량의 레몬즙을 넣어 서서히 적응시키면서 양을 늘려가고,
나중엔 복숭아 아이스티가 아니라, 레몬 맛이 나는 일반 아이스티만 찾는 몸으로 만들어버린
다?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텐션이 올라간 치나미를 향해 식당에서 뽑아두었던 티슈를 내밀었다.
“입가에 소스 묻었어요. 오른쪽에.”
“앗... 제가 추한 꼴을 보이고 말았네요. 감사합니다.”
티슈를 두 손으로 받아든 치나미가 자신의 양쪽 입가를 닦아내었다.
오른쪽을 닦으면 내 기준으로 오른쪽이라고 말한 거였다며 왼쪽을 직접 닦아내주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클리셰를 벗어나려고 해버리면...
저, 못된 마음을 품어버려요?
쓰레기통에 티슈를 버리는 치나미의 뒷목을 마사지해줄까 진지하게 고민해보던 나는,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어색한 듯 웃어보였다.
“뭔가요? 방금 표정이 굉장히 음흉했는데요? 저번처럼...”
“그럴 리가요? 그냥 웃은 겁니다.”
“그, 그런가요...?”
말을 더듬은 치나미가 자신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저도 모르게 내 손길이 생각난 모양.
그녀를 향해 히죽거린 내가 물었다.
“목이 결리나보네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접었다 폈다 하자, 치나미가 흠칫하더니 반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 아뇨...! 흠흠... 아닌데요?”
순간 혹한 것 같은데, 아쉽다.
치나미를 가기 직전까지 만든 이후엔 당분간 가만히 있어야지.
그녀 스스로 먼저 마사지를 해달라고 다가오게끔 애를 태워야겠다.
“아님 말고요. 근데 이노오 선배와는 만나지 않나요? 아카데미에선 매일 붙어 다녔잖아요.”
“만나긴 하는데, 매 주말마다 보기는 힘들어요. 렌카가 바쁜 일이 있대요.”
아키하바라나 나카노에 가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걸?
마스크랑 모자를 눌러 쓰고 피규어와 만화책 등을 구매하는 게 취미거든.
“그렇군요. 아쉽진 않아요?”
“그래도 자주 만나는 편이여서 괜찮아요.”
좋은 분위기 속에서 치나미와 대화를 나누며 주차장으로 간 나는 차 문을 열었다.
이후 네비에서 예전에 갔었던 그녀의 맨션 주소를 찾아 터치했다.
안전벨트를 매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치나미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변했다.
내 차에 자신의 집 주소가 있어서 묘한 기분을 느낀 것 같았다.
그냥 후배로만 보던 날 서서히 이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받아들여도 되나?
아니, 섣부른 설레발은 금물이다. 방심하지 말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내 말에, 치나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후배님.”
흘끗 조수석을 흘겨보니 치나미의 치마가 약간 말려올라가 뽀얀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치맛자락을 내릴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건가?
뒷좌석에서 담요를 꺼낸 나는, 그것을 치나미의 무릎 위에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대놓고 말했다.
“가리고 다녀요. 남들이 봅니다.”
그제야 자신의 다리 노출이 심했음을 알아차린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고, 고맙습니다...”
창피했는지 목소리가 낮아진 치나미.
분위기가 확 어색해지려고 하는데, 이런 건 화제를 돌리면서 풀면 된다.
“복숭아 아이스크림은 언제 사줄 건가요?”
“원래는 오늘 후식으로 먹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지금 돈이 없잖아요. 빌린다고 해도 후배님이 사주시는 느낌을 풍기게 되어버려서, 다음에 사드릴 거예요.”
“이상한 고집이 있네요.”
“밥까지 얻어먹은 기분을 느끼게 된 스승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에요. 제가 자주 가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는데, 컵으로 담아주는 곳이거든요? 조만간 그곳으로 데려갈게요. 그곳의 요거트 피치 맛에 한번 빠지면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예요.”
타락물 빌런 같은 대사를 치는구나.
은근히 어울리지만 내가 뱉는 대사보단 맛이 없다.
더 수행하도록 하렴.
**
투둑! 투두두둑!
비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지고 있다.
맨션 앞에 차를 세운 나는, 앞 유리를 때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가을 태풍이 오려나본데...”
그에 내가 건네준 우산의 끈을 풀던 치나미가 걱정스런 투로 말했다.
“에이... 설마요... 뉴스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요. 그냥 날씨가 안 좋은 거겠죠.”
그래, 그러길 빈다.
우리 집은 태풍이 한번 오면 피해가 막심할 것 같거든.
“그랬으면 좋겠네요. 들어가세요. 한정판 모모님 인형은 꼭 구하길 바라겠습니다.”
“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하마터면 백화점 안에 꼼짝없이 갇힐 뻔했어요. 저는 아주 좋은 제자를 둔 것 같네요. 그럼...”
“그리고 오늘 예뻐요.”
치나미가 차 문을 열려다 멈칫했다.
고개를 삐걱삐걱 돌리며 날 쳐다보는데, 대놓고 한 칭찬에 당혹스러웠나보다.
눈을 큼지막하게 뜬 그녀를 향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인 내가 말을 이었다.
“예쁘다고요. 얼른 들어가요. 비 더 오기 전에.”
“아... 네...!”
멍하니 있다가 내 재촉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차에서 내려, 시트에 빗물이 더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조수석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날 돌아보며 상체를 꾸벅 숙였다.
그로 인해 우산 밖으로 머리가 약간 튀어나와, 캐노피를 따라 흐르던 빗물이 치나미의 뒤통수에 주르륵 떨어진다.
“흐아아...! 조, 조심히 들어가세요! 안전운전 하셔야해요!”
울상을 지은 채로 소리를 지르며 인사를 하는 그녀.
평상시의 모습도 그렇고, 오늘 크로스백을 잃어버렸던 것도 그렇고...
치마를 가릴 생각도 못했던 것 하며, 지금 저 허둥지둥하는 모습 하며...
덜렁이 속성인 도짓코의 표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하긴 하다.
창문을 살짝 내리고 손을 흔들어준 나는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야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돌길을 뛰어가 거실 겸 침실로 들어가니 습기가 가득하다.
대충 샤워를 마치고 요 위에 벌러덩 누우니 허전한 기분이 찾아온다.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일어나면 연락해라. 비 많이 오니까 문 잘 닫고.]
미유키에게 메시지를 남겨놓은 나는 눈을 감고 숨을 훅 빨아들였다.
습하고 시원한 공기가 폐에 가득 차는 느낌이 퍽 괜찮다.
오늘은 아주 유의미한 하루였다. 절로 웃음이 나올 만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