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데이트 찬스를 늘리는 법
* * *
“요새도 다이어리 써?”
뒷좌석에 단 테츠야의 물음에, 미유키가 고개를 슬쩍 돌리더니 대답했다.
“응. 쓰지.”
“매일?”
“매일 쓰려고 하고 있긴 한데... 쓰는 날에 일이 바쁘면 미뤄뒀다가 다음 날에 쓰는 편이야. 최근엔 몇 번 빼먹었었어.”
“그래...? 아쉽지 않아? 학교로 따지면 개근상이 날아간 건데.”
“미뤄 쓴 적이 많은데 무슨 개근상이야. 근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아쉬운 것 같기도 하네? 더 성실하게 쓸 걸 그랬나봐.”
두 사람의 담소를 듣던 나는 문득 미유키의 다이어리가 궁금해졌다.
치한에게서부터 구해주었던 때나, 여름축제 때나...
처음 이름으로 불렀을 때, 해수욕장에서 구해줬던 때, 그리고 첫 경험 때...
당시 미유키가 느꼈던 주관적인 생각을 알고 싶다.
언젠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을까?
그런 바람을 가져본다.
아카데미에 도착한 나는 두 사람과 함께 교실로 향했다.
빵녀를 비롯한 학급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나는,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자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이 형님께서 곧 복귀하신다.]
타카시의 메시지인 것을 확인한 나는 인상을 구겼다.
치나미인줄 알고 잔뜩 기대했는데, 이 새끼의 문자라니.
아침부터 기분 팍 상하잖아.
그래도 서클을 탈퇴할 때 사모야마한테 쳐맞는 날 도와주려고 했었으니까...
좋게좋게 말해주자.
[어쩌라고.]
**
“안녕하세요, 마츠다 후배님. 좋은 월요일이에요. 그렇죠?”
귀엽게 뒷짐을 진 치나미의 인사.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내가 대답했다.
“싫은 월요일이죠.”
“후배님의 표정이 굉장히 우울해 보이는군요. 힘내세요. 금요일은 금방 와요.”
그래, 힘내야지.
미유키와 렌카, 그리고 널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 이 아카데미인데.
만약 너희들이 다른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다면 진즉 자퇴했을 거다.
밝은 낯으로 내 등을 두드려주는 치나미를 향해, 테츠야가 입례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나세 선배.”
“미우라 후배님도 안녕하셨어요? 후배님은 마츠다 후배님보다 얼굴색이 훨씬 좋아 보이시네요. 의지가 느껴져요.”
“저는 월요일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검도도 열심히 배우고 싶고요.”
“그런 긍정적인 태도, 아주 보기 좋아요. 어쩌면 새로운 검도의 달인이 탄생할 수도 있겠군요...!”
“너, 너무 띄워주시는 게 아니신지...”
“빈말이 아니에요. 열정이 있는 사람들은 렌카와 감독님께서 개인적인 과외를 시켜주면서 실력을 빠르게 끌어올려주거든요. 물론 부활동 시간이 끝난 뒤에 짧게 봐주는 것이긴 하지만, 두 분 모두 엄청난 재능을 가진데다 가르치는 방법도 잘 알아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그 말에 테츠야의 눈이 빛났다.
검도부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렌카의 개인 교습을 해줄 수도 있다고 하니 귀가 쫑긋하나보군.
대련 이후 렌카가 수련하는 모습을 보며 대놓고 동경하던데, 치나미의 말을 듣고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모양이다.
“조언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요! 화이팅!”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테츠야를 격려해준 치나미는, 테츠야가 내게 인사를 하고 부실 안으로 들어가자 방긋 웃었다.
“우리 후배님은 언제쯤 이 흐물흐물한 태도가 고쳐질까요?”
저번에 만났을 때처럼 팔을 위아래로 흔드는 치나미.
나름 유연하긴 하지만 뻣뻣함이 더 부각되어서 웃기다.
소매가 흔들리며 드러나는 치나미의 하얗고 얇은 손목을빤히 바라보던 내가 말했다.
“저는 스승님이 감독님이나 부장보다 더 잘 가르친다고 생각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냥 해본 말입니다. 호구부터 체크하는 거 맞죠?”
“맞아요. 참, 토요일은 잘 들어가셨나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걱정했어요. 감사인사도 드리고 싶었는데...”
“그랬으면 연락이라도 한 통 해주지 그랬어요.”
“아, 그게... 문자를 남기는 것보단 직접 만나서 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후배님.”
장소가 검도부인 만큼 목례를 하며 인사를 하는데, 밝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아래로 흘러내리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야해 보인다.
우리 치나미는 예의가 발라도 너무 바르단 말이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손을 번쩍 들 것 같다.
“아닙니다. 재미있었어요.”
“저도 정말 재미있었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계산을 해야겠죠? 후배님의 몫과 제 몫인 2600엔을 드릴게요.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탈의실에서 돈을 가져와야...”
의외로 꼼꼼한 그녀를 지나친 내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필요 없어요. 아이스크림만 사세요.”
“네에...? 그럴 수는 없는데... 어, 어디 가세요...?”
“보관실요.”
“같이 가요...! 그 전에 계산부터...!”
덜컥.
“후배님...! 후배니임...! 이리 오세요...! 빨리요...!”
부실 문을 열자 치나미의 목소리가 모기만도 못할 정도로 낮아졌다.
그런 그녀를 돌아보며 히죽 웃은 나는, 부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렌카를 쓰윽 쳐다보았다.
3학년 남자부원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검도에 관한 이야기겠지?
언제 봐도 훤칠하다. 바니걸 코스프레를 시키면 어울릴 것 같아.
내 앞에서 머리 위에 양손을 올린 채 억지로 율동을 하며 인상을 구기는 그녀를 상상하니까 꼴린다.
슬슬 렌카의 이벤트도 챙겨야 되나?
검도부에서 합숙훈련을 하기 전까지, 조교를 시작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만 챙겨놓고 싶긴 한데...
그렇다면 기존의 이벤트와는 다른 선택지를 가져가야겠지.
아니면 합숙훈련 때까지 상단세만을 집중적으로 훈련하다가, 그때 렌카를 확 휘어잡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날을 제대로 잡고 하루 종일 대련을 하며 굴복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 본다.
이런저런 계획을 짜보던 나는, 렌카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하자 히죽 웃어보였다.
“.... 무, 뭐야...?”
오싹한 기분을 느낀 듯 몸을 부르르 떠는데, 감이 좋다.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세워준 나는 보관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치나미가 뿔이 난 채로 들어오더니 문을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닫았다.
그리고는 날 나무라기 시작했다.
“후배님...! 먼저 가버리시면 어떡해요...!”
호구를 살펴보는 척하고 있던 내가 대답했다.
“일해야죠.”
“계산부터 하자니까요...?”
“필요 없다니까요?”
“왜요? 왜요?”
마치 따지듯 고개를 치켜세우는데, 저 말랑한 볼살을 콕 찌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잃을 뻔한 자제력을 간신히 되돌려놓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요.”
“그건 이유가 될 수 없어요.”
“젤리 먹을래요? 복숭아 맛으로 가져왔는데.”
“어헛...? 그래요...?”
“예. 지금 줄까요?”
“그럼 실례지만... 이, 이게 아니지! 하마터면 꼼짝없이 속아 넘어갈 뻔했군요...! 그런 식으로 사람을 놀리면 재미있나요?”
네가 반응을 그렇게 해주니까 재밌는 거지.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치나미를 향해 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흠칫한 그녀가 내 보폭만큼 뒤로 물러났다.
“무, 뭐하시는 건가요...?”
“.....”
“마사지는 안 받을 거예요...! 전에 했던 약속을 잊지 마세요...!”
“.....”
말없이 치나미를 구석으로 몬 나는, 뒷목을 꽉 잡고 있는 그녀에게 한손을 들어올렸다.
“으익...!”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아까 따질 때와는 반대로 고개를 뒤로 쭉 빼는 치나미.
덕분에 턱살이 두 개가 되었는데, 저 망가진 모습마저도 예쁘다.
방금 전의 앙칼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그녀에게 이를 드러내며 웃은 나는,
스윽.
그녀의 옆머리에 묻어있는 실밥을 떼어냈다.
이후 창문 밖으로 그것을 버리며 말했다.
“먼지 묻어서 떼어내려고 한 겁니다. 제가 싫어요?”
흐릿해진 채로 내 행동을 지켜보던 치나미의 동공에 빛이 돌아왔다.
“어허...! 시, 싫다니요...! 제가 왜 마츠다 후배님을 싫어해요?”
“제가 다가가니까 자지러진 이유는 뭔데요?”
“그건...”
“너무 쌀쌀맞게 구는데... 선을 긋는 것 같아서 서운하네요.”
“쌀쌀맞은 게 아니라요... 저는 계산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후배님도 분명히 제가 값을 치른다고 했을 때 그렇게 하라고 했잖아요...!”
“기억이 안 납니다.”
“네에에...? 그럴 수가...!”
입을 떡 벌리는 그녀.
치나미의 순박한 반응을 보고 있자면 절로 웃음이 튀어나오려고 한다.
아마 이 상황을 만화로 그렸다면 치나미의 머리 위에 [디잉!]이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쓰여 있었겠지?
“그냥 제자가 스승을 위하는 마음에 샀던 거라고 받아들여주면 안 될까요? 어차피 스승님이 아이스크림도 사주잖아요. 이러면 서로 주고받고 하는 거잖아.”
“.... 하, 하지만... 후배님은 절 위해서 차까지 몰고 백화점까지 와주셨는데...”
“같이 재미있게 놀았으면 된 거 아닌가요? 혹시 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거예요?”
“아, 아니에요...! 저도 정말 재미있었다고 말씀을 드렸었잖아요...! 그래도...”
계속 망설이고 있는데, 이때 만날 기회도 늘릴 겸 죄책감을 조금 덜어주자.
“정 불편하면 저한테 좋은 방법이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좋은 방법? 뭔가요?”
“제게 아이스크림을 한 번 더 사주는 겁니다. 그러면 금액대도 얼추 맞을 듯한데...어때요?”
“므으으음...”
기이한 소리를 낸 치나미가 생각에 잠겼다.
인생 최대의 근심거리를 안은 것 같은 표정이어서 오래 고민할 줄 알았지만, 그녀는 의외로 결정을 빨리 내렸다.
“좋아요... 이번만큼은 저희 둘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후배님의 고집에 져드리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원만한 관계라...
깊은 뜻이 담긴 오묘한 말인 것 같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
“잘 생각했습니다. 그럼아이스크림 두 번 사주기. 맞죠?”
“네, 맞아요.”
“스승님의 입으로 다시, 직접 말해볼까요?”
치나미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어감이 조금 이상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말투가 NTL물에 나오는 금태양, 돼지 최면남, 오크와 비슷하긴 했지.
‘누구의 자지가 더 좋은지 직접 말해볼까?’ 같은.
“으음... 저는 마츠다 켄 후배님에게... 요거트 피치 트리플 팝을 두 번 사줄 거예요.”
“트리플 팝이 뭐죠?”
“세 가지 맛을 고를 수 있는 큰 사이즈 컵이에요.”
“그럼 스승님은 거기에 복숭아 맛만...”
“요거트 피치에요.”
“.... 예. 요거트 피치 맛만 골라 담아서 먹나요?”
“물론이에요. 안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이건 뭐... 복숭아에 한해서만큼은 모태신앙 급이네.
백화점에서도 생각했었지만... 대단하다.
근데 넌 물복을 좋아하니, 딱복을 좋아하니.
아마 높은 확률로 둘 다 좋아할 것 같구나.
“합의된 겁니다? 더 이상 다른 말하기 없기?”
“손가락을 걸겠어요.”
당당하게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그녀.
자그맣고 깜찍한 그곳에 손가락을 건 내가 물었다.
“날짜는 제가 잡아도 될까요?”
“네, 좋아요.”
**
미우라 테츠야라고 불리는 귀찮은 짐덩어리를 내려준 나는, 미유키의 집으로 향하면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너희 언니가 뭐래?”
“뭐가?”
“토요일에 있었던 사건.”
“아... 그거...”
얼굴이 새빨개진 미유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 일부러 피해 다녔는데... 일요일에 한 마디도 안 했어...”
“뭐가 무서운 건데?”
“무서운 게 아니라...”
“말하기가 창피해?”
“.... 응.”
계속 생각해왔던 거지만, 미유키는 걱정이 너무 많다.
쭉 피하고만 다니면서 불안함에 끙끙 앓는 것보단 터놓고 말하는 게 더 좋을 텐데...
가족 간의 사생활까지 건드리는 건 참견이 너무 심하니까 더 이상 이 얘기는 언급하지 말자.
미유키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할 거다.
“학생회 일은 할 만해?”
“응. 재미있어. 회장님부터 다른 사람들까지 다 좋은 분들이셔서...”
“아직도 복사나 서류 정리 같은 것들만 하고 있냐? 중요한 임무 좀 맡기라고 찾아가서 따져줄까?”
“그랬다간 나는 학생회에서 쫓겨나고 말 거야.”
“인심이 박하네. 노조라도 하나 만들어야겠다.”
“마츠다 군은 요주의인물이라서, 뭘 하려고 하면 바로 퇴학일 걸?”
시답잖은 농담을 곁들여가며 킥킥거리다보니 어느새 미유키의 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미유키를 내려주려고 하는데, 안전벨트를 푼 그녀가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츠다 군. 잠깐만 골목길에서 기다려줄 수 있어?”
“왜? 어디 놀러가게? 저녁 먹고 들어갈까?”
“아니... 어제 새벽에 그랬잖아. 옷가지 챙겨서 가져다놓으라구... 오늘 몇 개 옮겨놓을래.”
“천천히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급해?”
“그냥 미적대기 싫어서...”
옷만 가져다놓는 거라면 나한테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데...
기다리라고까지 하는 걸 보니, 오늘도 우리 집에서 자고 갈 생각인가보다.
어제 해준 마사지 때문에 흥분한 상태인가?
“알았어. 그럼 골목에 대둔다?”
“응. 금방 올게.”
“거기 옆에다 둬.”
“여기?”
“어.”
대충 개인 옷들을 옆으로 옮긴 미유키가 빈 공간에 자신의 옷들을 집어넣었다.
티셔츠 세 벌, 반바지 두 벌을 수납장에 잘 포개 넣은 그녀가 밑에 있는 서랍을 열더니, 날 쓱 돌아보았다.
“눈 돌려...”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여자의 마음이란 참 아리송하다.
반박하지 않고 얌전히 몸을 돌린 나는, 모든 일을 끝낸 미유키가 됐다고 말하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납장을 확인해보니 내 제복 옆에 미유키의 제복 와이셔츠와 치마가 걸려있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자두 향.
내 제복에도 냄새가 옮겨 붙을 것 같다.
‘냄새라...’
이거 NTL물의 전형적인 스토리 아닌가?
테츠야가 내 와이셔츠에서 풍기는 미유키 특유의 냄새를 맡고 의아해하다가, 혼자 앓으면서 열등감을 폭발시키는 그림이 그러진다.
어쨌거나 기분이 묘하다. 마치 동거를 하는 듯한 느낌.
미유키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나란히 걸려있는 제복을 본 순간부터 한 마디도 안 하고 있었다.
얼굴은 이미 빨개질 대로 빨개진 상태.
그녀를 보며 피식한 나는 수납장을 밀어서 닫았다.
그리고는 장난스레 말했다.
“이제 매일 네가 좋아하는 식물들 관리할 수 있겠네?”
“.... 가끔씩만 올 거거든...? 바보야...”
“나한테는 맨날 욕하지 말라고 하면서, 넌 왜 바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냐?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애정표현으로 쓰는 거지... 바보.”
딴죽과 비슷한 츳코미를 거는 미유키에게 한 발자국 다가간 나는, 그녀의 허리를 콕콕 찌르며 가볍게 경고했다.
“한 번만 더 해봐.”
“싫어.”
새침하게 혀를 내미는 미유키.
그녀는 헛웃음을 켜는 날 헤실거리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부엌으로 향했다.
이후 냉장고 문을 열고 요리 재료들을 찾아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 가라아게 도시락밖에 없어...”
“나한테 뭘 기대했던 건데?”
“아무것도 기대 안 했어. 재료 사러 마트 갈까?”
“오늘은 귀찮으니까 도시락이나 먹자. 비도 오고 있잖아.”
그 말마따나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비가 자주 온다고 하는 일본이라지만 빈도가 너무 심한데, 아키사메라고 불리는 가을장마 시즌이라고 생각하면 이해를 못할 것도 아니었다.
나로서도 햇볕이 쨍쨍한 날보단 우천이 좋았고 말이다.
“그러네...?”
서둘러 평상 바로 앞까지 간 미유키는, 마치 규칙적인 빗소리를 음미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입꼬리를 쓰윽 올린 채 가만히 있는 그녀의 뒤로 다가간 내가 물었다.
“비 오는 날이 좋아?”
“응... 좋아졌어.”
“원래는 싫어했고?”
“막 싫어하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껄끄러워하긴 했어. 근데 지금은...”
말끝을 흐린 미유키가 몸을 돌렸다.
날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창밖을 볼 때와는 달리 어색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때문에 좋아졌다고 말하기가 굉장히 낯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나와 정사를 나눌 때마다 비가 왔던 것도 저런 반응에 한몫했겠지.
“마츠다 군.”
“왜.”
“나 씻을래.”
“같이 씻을까?”
“.....”
“농담이다. 노천탕에 수건 없으니까 욕실에서 가져가.”
“응.”
수납장을 열고 속옷을 꺼낸 미유키는, 그것을 자신의 티셔츠 안쪽에 우겨넣고 욕실로 향했다.
저렇게 숨기는 게 대놓고 보여주는 것보다 더 야하다는 걸 알긴 할까?
**
투두둑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우린 옆으로 나란히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슬슬 추워지기 시작한 날씨에 몸이 따뜻한 미유키를 끌어안은 채로 야들야들한 살결을 만지작거리니 몸이 붕 뜨는 느낌이다.
“마츠다 군... 나 TV 보잖아.”
“봐.”
“자꾸 배 만지니까 집중을 못하겠어... 그만 만져...”
“추워. 네 몸은 따뜻해.”
“이불을 두꺼운 걸로 바꾸면 되잖아...”
“귀찮아.”
“내가 바꿔줄게.”
뭐라는 거야. 미쳤냐?
나는 팔에 잔뜩 힘을 주어 미유키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츠다 군... 진짜 이럴 거야?”
“어. 근데 너 아저씨랑 아주머니한테 뭐라고 말했냐?”
“.... 친구 집에서 잔다고...”
“친구 누구?”
“그냥... 같은 반 친구...”
다른 건 몰라도, 미유키가 외박에 관해서 핑계를 대는 건 이해한다.
세상에 그 어떤 부모가 딸을 남자 집에 보내는 걸 좋아할까.
사귀는 걸 알아도 남자 집에서 잔다고 하면 껄끄러워할 텐데, 와타루와 미도리는 우리 관계를 전혀 모르는 상태다.
미유키가 내 집에서 잔다고 하면 딸의 머리가 이상해졌나 싶어 병원에 데려갈지도 모른다.
근데 저번에도 친구 집에서 잔다고 하지 않았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같은 친구를 계속 들먹이면 조금 위험할 것 같은데...
뭐, 알아서 하겠지. 미유키는 나보다 훨씬 똑똑하니까.
“마츠다 군... 그만 만지라니까...”
“춥다니까?”
“내일 아카데미도 가야하잖아...”
“그거랑 추워서 만지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 정말 상관없어?”
“그렇지는 않지.”
나는 미유키의 배를 만지던 손의 위치를 위로 올렸다.
속옷에 감싸진 봉긋한 가슴.
그곳을 움켜쥐고 힘을 주었다 풀었다 하자, 미유키가 기다란 콧바람을 내뱉더니 말했다.
“이거 봐... 이럴 줄 알았어...”
“그랬어?”
“며칠만 참지... 내일 일찍 일어나야하는데...”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고개를 슬쩍 돌리는 미유키.
나와의 키스를 바라는 그녀에게 히죽 웃어준 내가 말했다.
“그럼 그만하고 잘까?”
“.... 왜 벌써 자...”
“네가 참으라며.”
“마츠다 군이 언제 내 말을 들었다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
미유키의 입이 앙다물어졌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미유키의 입술에 가벼운 뽀뽀를 해준 나는, 그녀의 뒷목, 어깨선, 그리고 날개뼈에 이르기까지 입술로 쪽쪽 소리를 내며 빨아들였다.
“으응...”
낮고 짧은 신음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그녀.
애무를 시작하지도 않은 상황인데 벌써부터 달아오르고 있다.
역시 어제 마사지 때문에 욕구가 유지되고 있는 상태였구나.
방금까지 꽤 오랜 시간동안 아랫배와 그 주변을 만지작거렸던 것도 미유키의 이러한 반응에 한몫했겠지.
나는 요와 붙어있는 미유키의 허리 아래로 남은 한손을 집어넣었다.
이후 팔을 누르는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면서, 그녀의 바지 안으로 손을 들여보내 치구 부근을 살짝 눌러보았다.
“.....”
훅 하는 콧바람을 내뱉은 그녀의 골반이 내 사타구니와 딱 달라붙는다.
그런 그녀의 어깨 위로 고개를 내민 내가 얄밉게, 동시에 나긋하게 물었다.
“더 해? 아니면 그만해?”
“.....”
“그만한다?”
통보하듯 말한 내가 손을 빼려고 하자,
덥석.
미유키가 바지 위로 내 손목을 붙잡았다.
“.... 더, 더...”
“더 뭐.”
“더 해줘... 어제 조금밖에 못했잖아...”
“그게 조금이었어? 난 엄청 오래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한텐 조금이었어... 완전 짧았어... 책임... 져야 돼...”
“무슨 책임?”
“마, 마츠다 군이...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마치 조교물의 히로인이 할 것 같은 대사를 내뱉는구나.
식상하지만, 직접 들으니까 이만큼 꼴리는 말이 없다.
스윽.
미유키의 도톰한 음순 위로 손을 움직인 나는,
“으읏...!”
신음을 참아낸 그녀의 몸에 힘이 일부 풀리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오늘은 새로운 체위를 한 번 해봐야겠다고 말이다.
**
“하아... 하아...”
미유키는 금세 흥분했다.
애무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애액이 상당히 새어나왔으며, 치구를 비롯한 음순 주변을 적셨다.
손가락에 묻어있는 애액의 점성을 한 번 확인해본 나는 미유키의 옷을 벗겼다.
티셔츠, 바지, 브라... 그리고 팬티.
그것들을 모조리 벗기고 요 옆에 놓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새하얀 나신을 내 눈앞에 드러냈을 때까지만 해도, 미유키는 얌전했다.
하지만 내가 미유키를 엎드리게 만들고 그녀의 다리를 모아 위에 올라타자마자 격한 반응을 보였다.
“엇...! 앗...!”
자신의 둔부로 손을 내려 더듬거리는 미유키의 다급한 말.
나는 재빨리 이불을 가져와 미유키의 허리를 덮어주었다.
그러자 수치심이 조금 덜어졌는지,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마츠다 군...! 뭐해애...! 얼굴 보여줘...! 잘 안 보여... 얼굴 볼래애...!”
“그래, 그래.”
조곤조곤하게 대답하며 미유키의 옆으로 얼굴을 들이밀자, 그녀가 거의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거 싫어... 창피해...”
“다 가렸어.”
“싫어... 싫다구...! 마츠다 군 얼굴 보면서 할래애... 빨리이...!”
“괜찮아. 착하다.”
“싫다고 했잖... 읏!?”
앙탈을 부리다 말고 몸을 움찔 떠는 미유키.
자신의 엉덩이 사이에 닿아있는 자지를 느꼈나보다.
그녀의 입이 다물린 틈을 탄 나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를 쥐어짰다.
“잘 가리면서 할게. 응?”
“흐이... 후으으...”
미칠 것 같은지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데, 이대로 삽입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참자. 후배위는 처음인 미유키로서는 수치스러움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까.
최대한 배려해주면서 하는 거다.
나는 미유키의 날개뼈 부근의 살결을 쪼옥 쪽 소리를 내며 빨아들였다.
동시에 손끝으로 갈비뼈 근처를 간지럽히듯 쓰다듬고, 목덜미의 잔머리에 뜨거운 바람을 후 불어넣었다.
“으웃...! 읏...”
여전히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간헐적인 신음을 내뱉는 그녀.
나는 그녀가 스스로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그리고 다시 흥분할 수 있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애무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창 몸이 달궈지던 미유키가 돌연 이런 말을 해왔다.
“지, 진짜 다 가리면서 할 꺼야...?”
그녀의 목과 어깨라인이 이어진 부분을 아주 약하게 깨문 내가 대답했다.
“다 가릴게.”
“엉덩이 못생겨서 보여주기 시러...”
“예쁘던데?”
“아니야... 못생겼어...”
“예뻤어.”
“못생겼다니까아...!”
“진심으로 예쁘다니까?”
“흐잉...!”
애교가 묻어나오는 콧소리를 낸 미유키가 자신의 다리를 마구 교차하며 요를 찼다.
그 행동이 승낙의 의미임을 눈치챈 나는, 미유키의 등허리에 올라가있는 이불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녀의 허리를 들었다.
“앗...! 마츠...”
“살짝만 들었어. 여기서 조금만 더 들게. 괜찮지?”
“.... 잘 가렸어어...?”
“잘 가렸어. 안 보여.”
“.....”
아까부터 부드러웠던 내 목소리에 안도했을까?
미유키가 제 스스로 자신의 무릎을 들고 허리를 세웠다.
그런 미유키를 칭찬하듯 허리를 토닥인 나는, 다리가 약간 벌어진 그녀의 보지에 자지 끝을 가져다대고 삽입할 준비를 마쳤다.
“자, 잠깐만...! 마츠다 군...!”
“응.”
“좋아한다고 해... 나 좋아한다고 말해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자세이니만큼, 말로서라도 사랑을 확인받고 싶나보다.
“좋아해, 미유키.”
“.... 됐어... 이제 해두 돼...”
미유키의 음색이 노곤해졌다.
진심이 담긴 고백에 창피함이 가시고, 좋은 기분이 찾아온 듯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계속 이런 반응을 보여준다면, 매일 새로운 체위를 시도해도 될 것 같다.
나는 삽입 전 마지막으로 미유키의 한쪽 어깨에 키스를 해주었다.
“천천히 넣을게. 아프면 바로 말해.”
“응...”
마음의 준비를 끝낸 미유키의 골반 양옆을 잡은 나는 하반신에 힘을 주고 밀었다.
쯔걱...!
젖을 대로 젖은 음순을 양옆으로 벌리며 들어간 자지.
귀두만 들어갔을 뿐인데 자극이 장난이 아니다.
긴장한 만큼 평소보다 더욱 조인다.
“으히익...!”
간드러지는 교성을 터뜨리며 허리를 쭈욱 내린 미유키.
그녀의 뜨거운 질벽을 긁으면서 자지를 더욱 들이민 나는,
“아파... 아파앗...!”
자지가 뿌리까지 들어갔을 때쯤, 미유키가 고통스런 티를 내자 곧바로 하반신을 조금 뺐다.
그리고는 그녀의 등허리에 손을 올렸다.
“아파? 허리 조금 내리고 다리 더 벌려봐.”
“으우읏...!”
미유키는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가슴 아래로 팔을 모아 상체를 약간 들기까지 했다.
본능적으로 편한 자세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제 괜찮아?”
“.... 응... 괜찮아아... 그, 그래도 다 넣지 마... 조금씩만 넣어...”
“알았어.”
어깨가 세워짐으로 인해 툭 튀어나온 날개뼈.
그리고 그 아래에 움푹 패인 기립근.
땀으로 젖어 윤기가 흐르는 그곳을 감상하면서, 나는 왕복운동을 시작했다.
즈걱...! 쯔걱...!
“후읏... 흣...”
처음엔 거친 숨소리만을 뱉어내던 미유키의 목소리는,
“아앙...! 하앙...!”
내가 점차 속도를 높여가자 짐승과도 같은 신음으로 바뀌었다.
찌걱...! 찌걱-!
“.... 어헉...! 하아앙...!”
삽입 때에 맞춰 터뜨리던 교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뒤늦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헤엑... 헤에엑...”
얼마 지나지도 않아 헐떡거리는 숨소리만 새어나왔다.
제대로 된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더더욱 벌어지고 있는 그녀의 다리...
서서히 내려가는 허리...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의 지진이라도 난 듯한 떨림...
그리고 점점 격렬한 움직임을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스르륵 떨어진 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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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온몸이 드러났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오싹한 쾌락만을 받아들이고 있는 미유키를 내려다보며, 나는 본능에 몸을 맡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