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나 놀려.]
[어떻게 놀리는데?]
[마츠다 군이랑 좋았냐면서... 엄마랑 아빠 없을 때 자꾸 얄궂게 굴어.]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나중에 얘기해줄 테니까 조용히 하라고 했어.]
[나중에 얘기할 거야?]
[응. 할 거야.]
우리 사이를 순순히 인정하려고 한다?
가족이라서 말하기 편한 걸 감안해도, 카나가 심증을 굳혔음을 감안해도 꽤나 놀라운 일이다.
기특하다, 미유키. 그렇게 점점 대담해지면 되는 거야.
[사찰은 어때?]
[호텔에 짐만 풀고 아직 안 갔어.]
[언니랑 같은 방?]
[응.]
오밤중에 거기 난입하면 딱일 것 같은데,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하고 싶다.
자매 둘이서 무슨 대화를 나눌지도 궁금하고... 도청기를 설치하고 싶어진다.
[이제 밥 먹으려 내려가야돼서... 나중에 연락할게.]
[잘 놀다 와.]
[♡]
미유키가 보낸 하트 이모티콘을 보던 나는 피식했다.
기쁘다. 그녀의 마음이 점차 열리는 게 눈에 보여서.
-저어... 마츠다 후배님!
차창 밖에서 들려오는 귀여운 목소리.
휴대폰을 집어넣은 나는 조수석 창문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박시한 기모 맨투맨과, 짧은 플리츠 스커트를 입은 치나미가 이마에 손을 댄 채 차 안을 살펴보려 하고 있었다.
백화점에서 봤던 약간 성숙한 코디와는 전혀 다르게, 이번엔 귀여움을 한껏 뽐내고 있는 코디로 온 그녀.
안 그렇게 보여도 은근히 옷을 잘 입는다는 말이지.
-마츠다 후배님의 차가 맞나요...? 마츠다 후배니임...? 계세요...?
전화를 하면 되지 왜 이렇게 엉뚱하냐 너는.
킥킥거린 나는 암레스트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띡!
짧은 소리와 함께 잠금에 해제된 문.
치나미가 귀신이라도 본 사람마냥 기겁을 했다.
-히이익!
소리가 들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나보다.
혀를 끌끌 찬 나는 몸을 내빼고 직접 조수석 문을 열었다.
덜컥.
“아...! 안녕하세요, 후배님!”
크로스백의 끈을 꼭 붙들고 꾸벅 인사를 하는 치나미.
방긋 웃은 나는 한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제 차 맞으니까 타세요.”
“네...!”
조심조심 조수석에 올라탄 치나미가 안전벨트를 맸다.
무심코 새하얀 허벅지를 흘끗거린 나는, 뒷좌석에 고이 접어두었던 담요를 가져와 치나미에게 덮어주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이러네요. 덮어요.”
“네에... 감사합니다...!”
치나미가 고개를 숙이면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길이가 약간 길어져서 그런가? 아니면 코디 때문에 그런가?
왠지 모르게 섹시해 보인다.
네비게이션으로 손을 뻗은 내가 물었다.
“이제 갈까요? 그 가게 이름이 뭐죠?”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일단 앞으로 가주세요.”
“외우고 있었나보네요?”
“물론이에요.”
치나미가 뿌듯한 듯 콧대를 세웠다.
그 순진한 모습에 픽 하는 웃음을 터뜨린 나는 순순히 운전대를 잡았다.
이후 치나미의 친절한 안내대로 차를 몰았다.
**
딸랑-!
경쾌한 종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판매대에 서있던 직원이 치나미를 보며 밝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므흐흐... 안녕하세요.”
음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흘린 치나미가 계산대 앞으로 가자, 직원이 익숙한 듯 말했다.
“트리플 팝에 요거트 피치 세 번... 맞으시죠?”
“네!”
“그리고...”
말끝을 흐린 직원이 시선이 치나미의 뒤에 있는 내게로 향한다.
의문이 섞여있는 낯선 눈빛을 보아하니, 치나미가 일행과 함께 이곳에 오는 건 드문 일인 듯했다.
“저... 일행 분은 어떤 메뉴로 담아드릴까요?”
“아, 저는...”
판매대에 있는 다양한 아이스크림을 흥미롭게 살피며 대답하려던 나는,
“.....”
치나미가 기대에 한껏 부푼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는 것을 발견했다.
저 똥글똥글한 눈은 무슨 의미일까?
자신과 같은 종류를 고르라고 말하는 게 분명하다.
일단 요거트 피치는 무조건 담아야하고...
다른 건 뭘 골라야 치나미가 좋아할까?
답은 바로 나와 있었다.
“저도 요거트 피치로만 다 담아주세요.”
치나미가 말랑말랑한 미소를 지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
트리플 팝인지 뭔지에 복숭아만 죄다 담는다면 분명히 물리겠지만 어쩔 수 없지.
억지로라도 다 처먹어야겠다.
“알겠습니다. 추가 주문 있으실까요?”
“아이스 피치 마카롱 두 개, 아이스 피치 모찌도 두 개 주세요.”
발랄하게 디저트를 추가로 주문하는 치나미.
기가 막힐 정도로 복숭아를 좋아하는데... 무슨 광신도인가?
다양한 디저트를 먹을 수 있도록 타락시켜야지 안 되겠다.
“주문 받았습니다. 요거트 피치 트리플 팝 두 컵, 아이스 피치 마카롱, 모찌 각각 두 개씩... 1860엔 결제 도와드릴게요.”
포스기에 찍힌 금액을 본 치나미가 자신의 크로스백에서 지갑을 꺼냈다.
단추가 복숭아 캐릭터 모양으로 된, 전체적으로 분홍분홍한 디자인.
딱 봐도 치나미가 쓸 법한 지갑이었다.
계산을 마친 그녀는 날 데리고 구석에 있는 자리로 향했다.
방글방글한 얼굴을 한 채 자리에 앉는 그녀.
맞은편에 앉아 탁상 위에 휴대폰을 올려다놓은 내가 물었다.
“스승님은 딱딱한 복숭아를 좋아해요? 아니면 말랑한 복숭아를 좋아해요?”
“둘 다 좋아해요. 우열을 가릴 수가 없어요. 후배님은 어떤 쪽을 더 선호하시나요?”
“저도 뭐... 가리지 않고 먹는 편입니다.”
“다행이네요. 그러면 집에 남은 딱복이 몇 개 있는데, 다음 주에 가져올게요. 같이 먹어요.”
딱딱한 건 내 몸에 따로 있는데.
이걸 말랑한 네 속 안에 넣으면 딱일 것 같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아이스크림과 마카롱, 그리고 모찌가 나왔다.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갖고 온 치나미가 멀뚱히 날 쳐다보았다.
먼저 먹어보라는 눈빛.
플라스틱 스푼을 집어든 내가 말했다.
“잘 먹을게요.”
“네, 많이 드세요. 모자라면 말씀하시구요.”
그럴 일은 없어. 난 지금 이 살색을 띤 게 맛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워.
반신반의한 마음을 감춘 채 아이스크림을 한 숟가락 뜬 나는, 그것을 입 안으로 가져갔다.
‘의외로...’
맛이 있다.
복숭아 특유의 달콤한 맛이 입 안에 쫙 퍼지고, 중간에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도 일품이다.
가게 인테리어도 귀엽고, 아이스크림 맛도 괜찮고.
이래서 치나미가 이곳의 단골이 된 거구나. 그녀의 취향을 딱 저격한 가게다.
아이스크림을 맛본 내가 눈을 조금 크게 뜨자, 치나미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엄청 맛있지 않나요?”
“예... 기대이상이네요.”
말을 마친 나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더 먹었다.
이런 내 행동이 마음에 들었는지, 치나미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더니 마카롱을 가져가 크게 베어 물었다.
“으흠...!”
눈을 지그시 감고 맛을 음미하는 그녀.
고개까지 위로 치켜든 상태로 만족스러워하는데, 턱 밑을 긁어주고 싶은 기분이 든다.
여기서 어떻게 치나미의 호감도를 얻을까?
그러한 고민을 하던 나는, 그냥 묵묵히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했다.
괜히 나불거릴 바에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낫지.
**
“후후... 후배님도 이제 복숭아파에 가입하게 되었군요. 앞으로 저와 함께 복숭아의 세계에 빠져보도록 해요.”
가게를 나와 공용주차장으로 향하던 치나미의 음습한 환영사.
혀를 이리저리 움직여 입 안에 남아있는 복숭아 향을 지워낸 나는, 열심히 나와 보폭을 맞추고 있는 치나미를 위해 속도를 조금 늦췄다.
“가입하면 혜택 같은 게 있나요?”
“물론 있죠. 회원 겸 회장인 제가 가끔씩 복숭아를 가져다드릴 거예요”
“다른 혜택은요?”
“음... 부활동을 하다가 목이 마르면 아이스티를 만들어드릴게요.”
“가입하면 가끔씩, 오늘처럼 스승님과 뭘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아, 그야 물론이에요. 다음번엔 복숭아 스무디를 먹으러 가요.”
치나미가 기쁘게 수긍했다.
내가 간접적으로 애프터 신청을 하고 있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말을 받아들인 듯한 모습이었다.
오늘은 치나미의 입에서 어딜 가자는 말이 먼저 나온 것으로 만족해야하나?
애초에 나와의 관계가 그저 선후배였던 만큼, 이렇게 단둘이 데이트를 한 건 큰 발전이긴 하지만... 뭔가 심심했고, 아쉬웠다.
이대로 돌아가긴 조금 그렇다는 뜻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고개를 쭈욱 들어 날 올려다본 치나미의 물음.
내 가슴께에 있는 자그마한 머리가 뒤로 젖혀지는 모습이 왠지 웃기다.
키스하려면 치나미가 까치발을 든다고 해도 무릎을 많이 굽혀야할 것 같은데... 웬만하면 앉아서 하는 게 좋겠다.
“후배님? 왜 그러세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반응이 전혀 없는 내 얼굴에 손을 가져다대고 이리저리 흔드는 치나미.
저 클리셰적인 대사 덕분에 상념에서 벗어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귀여워서요.”
“.... 네에에...?”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선 눈을 부릅뜬 치나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점점 빨개지기 시작했다.
입꼬리를 씰룩거린 내가 재차 말했다.
“귀여워요.”
“.... 네에에...?”
“귀엽다니까요.”
“.... 네에에에...?”
저번에 검도부실에서 보여주었던 반응보다 훨씬 격하다.
엇박자로 계속 같은 말만 하며 귀까지 빨개지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때보다 더욱 놀란 상태구나.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띤 채로 치나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자, 그녀가 내 보폭만큼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아주 약간 튀어나온 보도블럭에 샌들 굽이 툭 걸렸다.
“므겍!”
괴이한 비명을 지르며 무게중심을 잃은 치나미.
황급히 손을 뻗은 나는, 뒤로 쓰러지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겨 중심을 되찾게 해주었다.
“조심해야죠. 왜 이렇게 덤벙댑니까.”
그녀 자신은 물론 나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돌발 이벤트인가? 뭐가 됐든 순발력 미쳤다.
해수욕장에서 미유키를 구했을 때, 그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바닷물 포상을 피했던 일이 생각난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얼이 빠져있던 치나미는, 내가 애꿎은 그녀의 등을 툭툭 털어주자 얼굴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상체를 꾸벅 숙였다.
“가, 가가가가감사합니다... 더더덤벙대서 죄송해요...”
엄청난 바이브레이션이다.
웃음을 참으려다가 실패한 나는 치나미의 앞에서 빵 터져버리고 말았다.
“으아아... 우, 웃겨서 죄송해요...!”
죄송한 게 뭐가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어버버거리는 치나미의 앞에서 폭소를 터뜨리던 나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툭툭 쳤다.
“제가 위협이라도 했어요? 왜 도망가려고 해요?”
“도, 도망가려는 게 아니라요...”
“다리는 괜찮아요?”
“네에... 괜찮아요...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아...”
“치마 내리세요. 위로 조금 올라갔어요.”
“으앗! 넷...!”
잽싸게 올라간 치마를 내리는 그녀.
코믹하게 바뀐 우리 주변의 분위기를 즐긴 나는, 그녀가 옷매무새를 정리할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려주었다.
“다, 다 됐어요...! 이제 얼른 집으로 도망가도록 해요...! 제발요...!”
속내가 대놓고 섞여있는 호소에 또 다시 웃음이 터지려고 한다.
거의 울상을 짓고 있는 치나미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말했다.
“그래요. 돌아가죠. 오늘 재미있었습니다.”
“흐아아... 저도요...”
가슴에 손을 올려 호흡을 고르는 치나미의 볼살을 깨물어주고 싶다.
그러한 마음을 달랜 나는 치나미와 함께 주차장으로 움직였다.
치나미의 성격상, 집으로 돌아가면 혼자 끙끙 앓으며 이불킥을 하다가 렌카에게 연락을 할 것이다.
오늘 일어났던 일을 말할 텐데,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