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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
침대에 벌러덩 누운 치나미의 입에서 힘차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민이 묻어있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모모님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이불을 덮은 그녀는, 주차장으로 가면서 있었던 일을 되새겨보았다.
[귀여워서요.]
[귀여워요.]
[귀엽다니까요.]
훤칠한 키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멋쟁이 신사 같은 미소를 짓고 칭찬을 했던 마츠다 후배.
귀에 확 꽂히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자신의 팔목을 감싸고도 남을 큼지막한 손으로, 넘어지려는 자신을 잡아주었던 것도 생각난다.
그때 감사인사를 했었나? 어벙한 모습만 보여줬던 것 같은데...
경황이 없어서 기억이 잘 안 난다.
저도 모르게 뒷목에 손을 올린 치나미는 자신이 당시 무슨 말을 해보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다가 얼굴을 베개로 꾸욱 눌렀다.
이후 의미 없는 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내뱉었다.
“우아아아아...”
그러다가 자신의 얼굴이 화끈해져오자 베개를 치웠다.
마츠다 후배가 자신에게 귀엽다고 했을 당시에도 후끈거렸었는데... 왜 이러는 걸까?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자신의 뺨에 홍조가 감돌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치나미는 휴대폰을 집었다.
그리고는 렌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렌카 친우님. 안녕하세요? 혹시 바쁘신가요?]
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안녕, 치나미. 나 지금 집에 있어서 괜찮아. 오늘은 늦게 연락했네? 남자라도 만났어?]
‘으응...?’
눈을 동그랗게 뜬 치나미.
짙은 분홍색 눈을 끔벅거린 그녀가 화면을 두드렸다.
[어떻게 아셨나요? 혹시 밖에서 절 보신 건가요?]
그 메시지를 보냄과 동시에, 휴대폰에서 지이잉 하는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의 찍힌 렌카의 이름을 본 치나미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남자를 만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렌카의 말투엔 다급함이 잔뜩 묻어나와 있었다.
왜 저러나 싶었던 치나미는, 자신이 사적으로 가족이 아닌 남자를 만난 건 처음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마츠다 후배님과 함께 요거트 피치 아이스크림을 먹었어요.”
-.... 마츠다?
“네, 렌카 친우님께서 아시는 그 마츠다 켄 후배님 말이에요.”
-.....
수화기 너머에서 말이 없어졌다.
한참을 기다려도 렌카의 반응이 없자, 치나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여보세요? 렌카 친우님? 렌카쨩? 듣고 계세요?”
-드, 듣고 있어... 대체 왜 마츠다랑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간 거야?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치나미는 오랜 시간을 들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저 간단하게 중요한 부분만 이야기해도 됐겠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고 아주 상세하게 모든 사건을 전부 전했다.
내심 마츠다가 렌카에게 좋은 평가를 받길 원해서였다.
-아... 그렇게 된 거야?
“네. 마츠다 후배님께선 됐다고 했는데, 제가 고집을 부려서 사드리겠다고 한 거예요.”
-빚지는 게 싫어서?
“음... 그런 거죠.”
-그런데 왜 마츠다가 너한테 먼저 톡을 보냈을까?
“가끔 안부 차 보내셔요.”
-널 어떻게 해보려는 심산 아닐까? 걔는 이미지가 조금... 그렇잖아.
치나미는 피식 웃고 말았다.
렌카는 걱정이 참 많다.
“렌카 친우님, 사람을 그렇게 헐뜯어선 안 돼요.”
-하지만 마츠다는 소문이...
“소문이 안 좋았죠. 하지만 지금은 태도가 좋다는 말이 나오고 있잖아요. 그리고 저한텐 정말 착한 후배인데요? 매니저 일도 잘 도와주고요.”
-마츠다가 너한테 이상한 짓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물...”
물론이라고 대답하려던 치나미가 멈칫했다.
마츠다 후배가 뒷목을 마사지해줄 때마다 묘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
그 머뭇거림을 캐치한 렌카가 재빨리 말했다.
-머뭇거리는 걸 보니까 뭔가 있구나? 그렇지?
“아, 아니에요. 방금은 잠깐 딴생각을 했을 뿐이랍니다. 이상한 짓은 한 적 없어요.”
-정말이야?
“네, 정말이에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근데 뭐해? 심심해? 나가서 놀까? 아니면 아이스크림만 먹어서 지금 딱 배고플 때일 테니까... 같이 저녁 먹을래?
“앗!? 그러면 저랑 미소카츠 드실래요?”
-알았어. 그럼 한 시간 뒤에 만날까?
“네! 좋아요!”
렌카와 약속장소를 정하고 통화를 마친 치나미는, 거실로 나가려다가 우뚝 멈췄다.
자신이 렌카에게 뭘 물어보려고 했더라?
렌카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까맣게 잊어버렸다.
마치 인터넷 미아 증후군이라도 온 것 같다.
잠깐 고민해보던 치나미는 그냥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나중에 생각나겠죠?’
지금은 허기를 채우는 게 더 급하다.
한 시간 뒤에 렌카를 만나니까, 그때쯤 배가 꺼질 정도로 복숭아를 먹어둬야겠다.
딱복은 물복보다 포만감이 더 차니, 물복 반개면 적당할 듯싶다.
[귀여워요.]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재생된 마츠다 후배의 진중한 목소리를 되새기면서, 치나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
“.... 다 군.”
“.....”
“.... 츠다 군.”
상큼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싸늘한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꽤 두꺼운 이불을 덮은 채로 새우잠을 자고 있던 나는 눈을 떴다.
“.... 뭐야?”
“뭐긴 뭐야. 나지.”
눈앞엔 미유키가 있었다.
어느새 화장실에 다녀온 듯, 손발에 물기를 묻힌 그녀가.
“으음...”
졸음이 가득한 한숨을 내쉰 내가 몸을 뒤척이며 물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냐...? 여덟 시쯤 도착할 것 같다며...”
“지금 여덟 시야 이 바보야. 나 문 여는 소리 못 들었어?”
“못 들었어...”
“화장실에서 손 씻는 소리도?”
“어...”
“옷 갈아입는 것도 몰랐어?”
“그건 아깝네. 봐야했었는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자, 미유키가 헛웃음을 켰다.
그런 그녀에게 하찮은 미소를 지은 나는 밖을 바라보았다.
어둡다.
미유키와 마지막으로 통화를 마쳤던 게 오후 세 시 아니었나?
낮잠만 조금 잔다는 게 숙면에 빠져버리다니...
어제도 치나미와 헤어지고 하염없이 퍼질러 잤는데, 요새 잠이 많아진 느낌이다.
눈곱 낀 눈을 비벼 몽롱한 정신에서 벗어난 나는 미유키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왔어? 택시 타고?”
“아니, 버스.”
“전화하라니까...”
“전화했었는데? 세 번이나 해도 안 받길래... 자는 줄 알고 그냥 왔어.”
“그랬냐...?”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인 나는, 미유키가 이불 안으로 쏘옥 들어오더니, 내 입술에 자신의 분홍빛이 감도는 틴트 흔적을 남기자 실소를 터뜨렸다.
“여행은 괜찮았어?”
“응. 사찰이 엄청 멋있더라. 옛날 느낌이 나긴 하는데 진짜 좋았어.”
“심심한 감상이네. 네 언니는 뭐래?”
“뭐가?”
“얘기한다고 했잖아.”
“아...”
짧은 탄성을 터뜨린 미유키의 눈동자가 위로 향했다.
카나의 반응을 골똘히 곱씹어보는 듯하던 그녀가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말했다.
“조금... 재밌었어.”
표정만 보면 조금이 아니라 엄청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
“왜? 뭐라고 얘기했는데?”
“그냥... 야한 얘기...”
“무슨 야한 얘기?”
“말한다고 했던 거...”
“자꾸 잴래? 그니까 그 말한다고 했던 게 뭔데?”
“아 캐묻지 좀 마...! 말하기 싫어...”
앙탈을 부리는 미유키.
아직은 말하기가 껄끄러운가보다.
미유키가 쑥스러운 낯으로 나와 했던 것들을 이야기하고, 침을 꼴깍 삼키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카나의 얼굴이 빨개지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려져.
“사진이나 봐봐. 사찰에서 찍은 거.”
“아, 응...”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낸 미유키가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자연과 한데 어우러진 고풍스런 사찰 안에서, 등산복 비스무리한 복장을 입은 미유키의 가족들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묵묵히 사진을 둘러보던 내가 물었다.
“토리이에서 찍은 사진은 없나?”
“토리이는 신사에만 있는 문이야...”
“왜 그렇게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냐?”
“내가 언제... 흐익!”
놀란 감탄사를 내뱉은 미유키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그녀를 끌어당겨 내 위로 올라타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벗어나려고 하는 미유키의 등을 두드려 진정시킨 내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날 멍청한 놈인 것처럼 생각하고 무시했잖아.”
“무슨 피해망상이라도 있어? 안 그랬어...!”
“그랬잖아.”
“아니라니...”
부정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무는 미유키.
자신의 골반 사이에 있는 내 물건이 단단해진 것을 눈치챘나보다.
내 가슴팍에 손을 대고 상체를 일으키더니 고개를 아래로 내린 그녀는,
“.....”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렸다.
이후 무언가를 꺼냈다.
“일단 이거부터 껴봐... 변태야...”
그건 수주(数珠)였다. 염주라 불리는 그것 말이다.
사찰에서 사온 모양인데... 광택이 나도록 코팅까지 되어있는데다 퀄리티가 퍽 좋았다.
“염주네?”
“응... 손 줘봐.”
잠자코 손을 내밀자, 미유키가 염주를 양옆으로 당기더니 내 손에 끼웠다.
약간 늘어났던 탄성실이 다시 쪼그라들면서, 손가락 마디 반 개만한 크기의 염주알이 빈 공간 없이 따닥따닥 붙었다.
손목에 딱 맞는 염주를 이리저리 둘러본 내가 신기하다는 투로 말했다.
“조이는 느낌도 없고, 늘어지는 느낌도 없고... 딱 맞네? 일반 염주가 이러긴 쉽지 않은데...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대?”
“매일 보고 만지는데 모를 수가 없잖아. 어때? 괜찮아?”
“좋네. 편해.”
“디자인은 어때? 심심하지 않아?”
“아니, 심플해서 더 좋은데.”
“이상한 부분은 없어? 어디가 어긋났다거나... 염주 알이 별로라거나...”
“딱히 없어. 근데 그런 건 왜 물어보냐?”
“아니... 그냥...”
미유키의 반응을 살핀 나는, 이게 일반적인 염주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창피한 듯한 저 표정을 보아, 판매상품을 환불하기 위해 피드백을 들으려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방금 말을 얼버무렸던 것으로 보아...
“너 이거... 네가 만든 거야?”
직접 만든 염주가 분명했다.
“응... 만드는 코스가 있길래... 마츠다 군 주려고...”
미유키의 입에서 모기만도 못한 긍정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잠깐 무덤덤한 표정으로 미유키를 빤히 쳐다보던 나는, 부담스러움을 느낀 것 같은 그녀의 시선이 옆으로 향할 때쯤 입을 열었다.
“미유키.”
“.....”
미유키가 내 허리를 꼬집듯 꽉 쥐었다.
떨림이 섞여있는 저음으로 불러주니 좋아 죽을 것 같은 모양.
나는 그런 미유키의 등을 위에서 아래로 살살 쓰다듬었다.
“고마워. 매일 끼고 다닐게.”
낯간지러운 목소리가 듣기 좋았는지, 미유키가 내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좌우로 비볐다.
내게 염주를 만들어 준 게 그렇게나 부끄러웠나?
오늘따라 특히나 더 여리여리한 미유키의 엉덩이를 토닥인 나는,
“.... 흐응...”
미유키가 기분이 무척 좋을 때 내는 특유의 달아오른 콧소리를 듣고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가 굉장히 포근해졌는데, 오늘은 이대로 쉬는 것도 괜찮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