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80화 (80/313)

“잘 쉬었어? 몸은 괜찮아?”

테츠야의 걱정이 담겨있는 물음.

미유키가 어색한 낯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많이 괜찮아졌어.”

“다행이다.”

“검도부에서는 뭐래?”

“검도부? 학생회가 아니라?”

“아니... 나 때문에 마츠다 군이 부활동을 못 했으니까... 궁금해서 그렇지.”

“딱히 뭐라고는 안 했어. 알았다고만...”

두 사람 사이에 앉아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책상에 팔꿈치를 괬다.

그렇게 미유키와 테츠야 사이를 가로막은 내가 테츠야에게 물었다.

“요새 검도는 어떠냐?”

“어? 뭐가?”

“잘 하고 있냐고. 저번에 보니까 감독이랑 이노오 선배한테 과외 받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그냥저냥 잘 되어가고 있어.”

“열심히 해 임마.”

진심이 전혀 담겨있지 않은 격려를 하던 나는, 등 뒤에서 가벼운 감각이 일자 팔꿈치를 내렸다.

그리고는 미유키를 쳐다보았다.

“뭐하냐?”

“먼지 묻어서 뗐어.”

“착하네?”

“책이나 펴. 수업시간 다 됐잖아.”

어깨를 으쓱인 나는 책상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냈다.

흘끗 테츠야를 곁눈질해보니, 약간 당황해하고 있었다.

방금 미유키의 스킨십을 보고 놀란 모양이었다.

테츠야의 앞에서 미유키가 내 몸을 만진 건, 훈계를 할 때 꼬집거나 때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인가?

앞으로 많이 보여줄게.

**

점심시간.

빠르게 밥을 먹고 홀로 검도부에 간 나는 보관실에 들러 호구를 살폈다.

청소가 모두 깨끗하게 잘 되어있다.

죽도 또한 마찬가지, 죽도유를 잘 먹여두었는지 광택이 흐르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도복까지 죄다 빨래터에 널어져 있자 헛웃음을 켰다.

치나미가 죄다 끝내놨구나. 혼자 하기 힘들었을 텐데 장하다.

할 일이 없어져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차며 돌아가려는데,

“훗훗.”

뒤에서부터 의기양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나는 치나미가 팔짱을 낀 채 서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언제 왔어요?”

“방금이요. 후배님께 오지 않아도 된다는 전화를 드리려고 했는데, 받지 않으셔서 와봤답니다.”

“전화했었어요? 언제?”

“20분 전에요.”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과연 치나미의 말마따나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한창 밥을 먹을 때였고, 무음으로 설정해놓은 터라 몰랐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내가 말했다.

“반만 해놓으라고 했잖아요. 혼자서 힘들었을 텐데.”

“호구 같은 건 제때제때 청소해놔야 해요. 그리고 원래 혼자 하던 일인걸요?”

“오래 걸렸죠? 집에 늦게 돌아간 거 아니에요?”

“한 10분 정도만 늦었을 뿐이에요. 원래 혼자 하면 집중이 더 잘 되잖아요.”

“제가 방해꾼이라는 소리로 들리네요. 서운합니다.”

“어허...!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요. 후배님이 없어서 심심했답니다.”

내게 다가와 등을 팡팡 두드려주는 치나미.

텐션이 높아 보인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치나미의 격려에 힘을 얻은 척 씨익 웃은 내가 물었다.

“오늘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이네요?”

“그럴 수밖에요. 한정판 모모님 인형이 괜찮은 가격에 사이트에 나와서, 구매하기로 했거든요. 마침 사이트에 딱 들어가자마자 발견하게 돼서 바로 연락을 드렸고, 약속을 잡았어요. 정말 운이 좋았죠.”

“그래요? 그거 잘됐...”

치나미를 축하해주려던 나는 입을 앙다물었다.

뭔가 느낌이 쎄했기 때문이다.

그 모모님 인형은 치나미가 열심히 구하려고 발품을 팔아도 구하기가 힘든 물건이었다.

사이트에 나온 매물은 극히 적었고, 그 극히 적은 매물마저 학생 신분으로는 사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높은 가격을 형성했다.

원래 한정판이 그런 법 아니겠는가?

그런데 괜찮은 가격이라?

“스승님.”

“네?”

“혹시 사기 같은 건 아닐까요? 희귀한 물건이 괜찮은 가격에 나왔다는 게 좀 의심스럽잖아요.”

“후후... 그런 걱정을 하시는 것도 이해가 돼요. 하지만 사기피해 방지 어플에 휴대폰 번호를 조회해보고 안전한 것을 확인했고, 직거래를 하기로 해서 괜찮아요.”

직거래라면 사기를 당할 위험성은 현저히 줄어들긴 하지만...

“중고거래는 처음 해보는 건가요?”

“아니요. 모모님 굿즈를 살 때 자주 이용해보았어요.”

“여태까지 사기는 없었고?”

“없었어요. 전부 친절하셨답니다.”

많은 거래를 통해 직거래에 신용이 쌓여있는 상태라...

뭔가 촉이 온다... 순진무구한 치나미가 인생의 쓴맛을 볼 것 같다는 느낌이 와.

“거래는 언제죠?”

“오늘이에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는데, 좋아하는 게 티가 난다.

피식한 내가 말했다.

“부활동이 끝나면 바로 거래하러 가나요?”

“아니요. 친구와 조각 케이크를 먹고 헤어진 뒤에 거래를 하러 가요.”

“이노오 선배는 같이 안 가나요?”

“네. 오늘 사러 갈 게 있다던데... 뭘 사는지는 물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상품이구나.

최근에 그녀가 보던 애니가 완결이 났는데, 기념으로 출시된 굿즈를 사러 가는 거다.

아마 아키하바라나 나카노로 향할 테지.

잘하면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치나미를 도와준 뒤에 가볼까 싶다.

“그럼 혼자라는 소리네요? 저랑 같이 갈까요?”

그에 치나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후배님이랑요?”

“마침 저도 모모님 굿즈에 관심이 생겼거든요. 맨날 인터넷으로만 굿즈를 보다보니 실물이 어떤지 한 번 보고 싶네요.”

“오오...? 그게 정말인가요?”

물개박수를 치는 치나미.

모모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동료가 생겼다는 기쁨이 큰 것 같다.

“예. 언제 어디서 만나기로 했죠?”

“일곱 시에 이케부쿠로 역이에요.”

일곱 시면 시간이 꽤 남는다.

미유키를 데려다주고, 집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되겠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여섯 시 반 정도에 역에서 만날까요?”

“전 좋아요!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치나미가 자신의 가슴에 두 손을 교차해 모으고 상체를 꾸벅 숙였다.

답지 않게 조신한 치나미의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온다.

사르르 흘러내려가는 치나미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나는, 마주 고개를 숙이며 그녀와 어울려주었다.

**

“갈게. 태워다줘서 고마워.”

안전벨트를 풀고 무릎 위에 가방을 올린 미유키의 말이었다.

대꾸하지 않은 채 잠자코 침묵하고 있자,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 그래?”

나는 말없이 검지를 들어 내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미유키가 노곤한 미소를 짓더니, 수줍게 다가와 뺨에 키스를 했다.

쪽 소리까지 내며 내 귀를 즐겁게 해준 그녀가 조수석 문을 반쯤 열었다.

“이제 진짜 갈게. 내일 봐.”

“다시 해. 마음에 안 들어.”

“뭐래... 싫어.”

새초롬하게 혀를 내밀고는 잽싸게 차에서 내리는 미유키.

조수석 문을 조심히 닫은 그녀가 밝게 손을 흔들고는 총총걸음으로 현관문을 향해 갔다.

미유키와 헤어진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고, 잠깐 쉬다가 다시 나왔다.

이후 묵묵히 운전을 하며 이케부쿠로 역 근처의 공용주차장에 차를 대어놓았다.

저녁 시간대에다 특수한 장소라서 그런지, 평일임에도 거리에 사람이 가득하다.

나는 휴대폰으로 치나미가 보내준 모모님 인형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인파를 해치며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치나미를 발견했다.

분홍색 머리라 그런지 눈에 확 띈다.

오늘 그녀의 코디는... 평범한 맨투맨과 청바지구나.

때조차 타지 않은 하얀 신발이 돋보인다.

발사이즈가 작아서 뭔가 귀엽다.

치나미의 뒤로 간 나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콕 찔렀다.

그러자,

“므훗!”

여느 때처럼 기이한 탄성을 터뜨리며 어깨를 바싹 치켜세운 치나미가 고개를 홱 돌렸다.

“후배님...! 오셨어요?”

“예.”

“그럼 말을 하시지... 왜 어깨를 누르시나요?”

“그러면 안 돼요?”

“그건 아니지만... 흠흠... 어쨌든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조심하라는 말은 안 하는구나.

관계 발전은 순조롭다.

물론 속도가 더디긴 하지만, 차근차근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게 눈에 보이면 된 거지.

“케이크는 맛있었습니까?”

“그럼요. 피치 스무디와 함께 먹었답니다.”

“설마 케이크도 복숭아 맛은 아니었겠죠?”

“아뇨. 처음 가는 카페였는데 아쉽게도 팔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초코로 먹었어요.”

복숭아 맛 케이크... 있긴 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긴 하지만, 미각에 영원한 데미지를 입어버릴까봐 두렵기도 하다.

굳이 나서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려고 하진 말아야지.

치나미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판매자와의 약속장소로 간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벤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휴대폰을 두들기고 있었는데, 그가 손가락을 멈칫할 때마다 치나미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저분이시네요.”

문자를 확인해본 치나미의 표정이 씰룩거렸다.

드디어 모모님 인형을 구할 수 있다는 데에 큰 기대를 갖고 있는 모양.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던 내가 말했다.

“가보죠.”

“넷!”

힘차게 대답한 치나미가 앞장을 섰다.

판매자에게로 다가간 그녀가 공손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모모님 인형 파시는 분 맞으신가요?”

“아, 예.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좋은 가격에 팔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미개봉 맞죠?”

“말씀드린 대로 포장지만 깠고, 내용물은 미개봉입니다. 한 번 확인해보세요.”

“네! 실례하겠습니다!”

판매자가 건넨 박스를 열어본 치나미.

비닐과 부직포에 잘 포장되어있는 모모님이 떡하니 있는 것을 본 그녀의 눈이 녹아내려갔다.

“와아아...! 맞네요...!”

순수한 치나미의 반응을 본 나는, 나도 한 번 살펴보겠다고 말하며 박스를 가져왔다.

생김새는 치나미가 보내준 사진과 완벽하게 똑같긴 하지만...

이걸 원가에 조금 얹어서 주는 건 말이 안 된다는 말이지.

출시된 지 얼마 안 돼서 가치도 높을 때인데.

쓰읍 하며 숨을 빨아들인 내가 판매자에게 물었다.

“이걸 왜 이런 가격에 파시는 건가요?”

“아... 어렵게 구했는데 딸이 별로 안 좋아해서요. 와이프도 빨리 팔라고 하고...”

“그렇군요. 자세히 좀 살펴봐도 되죠?”

“가능은 한데, 제가 급해서...”

“일곱 시에 만나자고 하지 않았나요?”

“그게 왜요...?”

“지금 여섯 시 사십오 분인데? 십오 분 남았습니다. 애초에 일곱 시를 상정하고 온 거니까 아직 시간 괜찮잖아요.”

“.... 당사자가 확인도 다 끝낸 것 같은데... 정 불안하시면 한 번 다시 보세요.”

“감사합니다. 2분이면 돼요. 금방 끝내겠습니다.”

그렇게 내가 인형 뒷편에 있는 라벨을 확인해보려고 하는데,

“돈은 여기 있습니다...! 좋은 가격에 판매해주셔서 감사해요!”

판매자와 내 대화를 듣지 못한 듯한 치나미가 크로스백에서 돈 봉투를 꺼내 판매자에게 건네려고 했다.

“잠깐...”

급하게 치나미를 만류하려고 해보았지만 허사.

봉투는 이미 치나미의 손에서 떠난 뒤였다.

“예쁘게 쓰세요. 그럼 수고하십시오.”

어느새 치나미에게 돈을 받은 판매자가 몸을 돌렸다.

확인하겠다고 말을 했고, 그러라는 대답도 들었는데 돈을 받자마자 가려고 한다는 건... 사기꾼이 맞다고 본다.

직거래에서 사기를 치려는 용기만큼은 가상하다. 칭찬해주마.

여기서, 러브 코미디의 흔한 주인공이었다면 그대로 놓쳐서 추격전을 벌이거나 신고를 할 거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로 눈치가 없는 놈이 아니다.

덥석.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려다가 내게 옷자락을 붙잡힌 남자.

그의 무게중심이 뒤로 확 쏠리면서, 내 몸까지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지금 뭐하는...!”

중심을 잡으면서도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빡 주고 있는 내게, 남자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그는, 이어지는 내 나직한 읊조림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결혼반지가 없네.”

“예...?”

“약지에 결혼반지가 없다고요. 와이프가 팔라고 했다면서요.”

“그건 무슨...”

반지야 형편이 안 돼서 사지 못했을 수도 있다.

진짜로 급한 일이 생겨서 빨리 가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다고 해도, 이놈은 사기꾼이다.

왜냐? 증거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심증이 아니라, 물증이 있었다.

한숨을 내쉰 나는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치나미와 사기꾼을 바라보면서, 방금 사기꾼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바닥에 떨어진 박스를 가리켰다.

“.....”

“.....”

거기엔 모모님이 박스에서 튕겨져 나와 차가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불쌍한 모모님의 머리는, 몸과 분리될락 말락 한 채로 비닐 안에서 따로 놀고 있었다.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