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저렇게 남을 속이는 사람들은 법의 철퇴가 두렵지도 않은 건가요?”
치나미의 입에서 분노를 삭이려는 듯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런 말을 하기엔 미안하지만 조금 웃기다.
대사가 무슨 발랄한 마법소녀물의 여주인공 같아서였다.
힘없이 발을 놀리는 치나미의 손엔 사기꾼에게서 돌려받은 돈 봉투가 꼭 쥐어져있었다.
그것을 가리키며 크로스백을 눈짓하자, 치나미가 재빨리 봉투를 집어넣더니 백을 가슴에 안았다.
불안한 듯 데구르르 굴러가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내가 말했다.
“스승님 같은 착한 사람이 용서를 해주니까 더욱 날뛰는 거겠죠.”
“그럼 어떡해요... 펑펑 우시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던데... 그리고 모모님 인형을 소중히 다루지는 못할망정...!”
치나미가 비련의 여주인공마냥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기를 당할 뻔해서 화가 난다는 감정보다, 실물을 영접한 모모님이 망가져서 슬픈 감정이 더 큰가보다.
좀 어이가 없네.
“뭐... 역무원이 데려갔으니, 그들이 경찰에 인계하든 잘 타일러서 보내든 할 겁니다.”
“네... 그나저나 제가 그렇게 만만해보였던 걸까요?”
솔직히 좀 만만해보이긴 해.
아까도 내가 인형을 확인해보려 했는데 조심성 없이 돈을 줬잖아.
라는 말을 삼킨 나는 치나미를 위로했다.
“모모님 인형은 다시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겁니다.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하아아... 사기꾼 분과 잘 협상해서 사망하신 모모님이라도 싸게 가져올 걸 그랬나 봐요... 실물을 봐서 그런지 눈앞에 자꾸 아른거리네요.”
“남들이 썼던 중고 인형을 갖고 오기엔 뭔가 찜찜하지 않나요?”
“그렇긴 해요. 후아... 후배님이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는 중고거래 같은 건 자제하는 게 좋겠습니다. 꼭 사고 싶은 게 있을 땐 저나 이노오 선배랑 같이 가도록 해요.”
“네에...”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대답한 치나미의 고개가 들렸다.
날 똑바로 바라보며 길을 걷는데, 뺨이 약간 발그레해져있는 상태다.
마치 겨울에 찬바람을 맞아 홍조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어서 귀엽다.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린 나는 치나미의 어깨에 한손을 올렸다.
“엇?”
그리고는 그녀가 흠칫하는 틈을 타, 손에 살짝 압력을 주었다.
“너무 기죽어있지 마세요. 스승님은 발랄한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 므넷...!”
대답을 한 건지, 아니면 신음을 터뜨린 건지 모르겠다.
여전히 민감하구나. 아래를 만져주면 바로 터져 나올 것 같아.
치나미의 어깨를 한 번 꾸욱 주무른 나는 손을 떼어냈다.
“시원하죠?”
“큿...! 시, 시원하지 않았어요...!”
수축되어있던 근육이 쫙 풀어진 치나미의 대답.
상체를 살짝 수그린 채 인상을 팍 쓴 그녀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은 내가 말했다.
“아쉽네요. 더 배워오겠습니다.”
“무, 뭘 더 배우겠다는 건가요...?”
“마사지요. 요새 취미를 붙였는데, 언제 한 번 스승님한테 제대로 해줄게요.”
“.... 마사지라니... 그런 걸 받았다간...”
왜? 망가져버리고 말아?
타락, NTR물 야겜에서나 나오는 대사를 비슷하게 하는 치나미가 웃기다.
무릎을 굽히고 그 위에 손을 올린 나는 치나미와 시선을 마주쳤다.
“스승님에게 꼭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나중에 받아주세요. 물론 스승님이 싫다고 하면 안 할 겁니다.”
“.... 그, 그렇다면야...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치나미의 고개가 숙여졌다.
내 얼굴이 가까이 있고, 방글방글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부담감과 부끄러움을 느낀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돌아갈까요? 데려다드릴게요.”
“네, 네...”
“돌아가서 씻고 푹 쉬세요. 중고 사이트를 뒤적거릴 생각은 하지 말고. 알았나요?”
“알았어요...”
“약속할까요?”
치나미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녀가 움찔하더니 물었다.
“이, 이런 걸 약속까지 해야 하나요...? 스승이 미덥지 않으시나요?”
“노파심에 말하는 겁니다. 아까도 눈앞에 아른거린다고 그랬잖아요.”
“.... 그건 농담이었는데요...”
“진담처럼 들렸어요. 자, 손가락 걸어요.”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간 내 손가락.
어깨를 좌우로 움직이며 쑥스러움을 표현하던 그녀는, 이내 자신의 가는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가락에 걸었다.
분홍색 네일로 칠해진 굉장히 매력적인 손톱.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방긋 웃었다.
“약속했습니다? 모모님은 오늘 잊는 거예요?”
“네에...”
“손톱이 예쁘네요. 어울려요.”
“가, 감사합니다... 후배님 손톱도 칠해드릴까요...?”
오른손은 네가, 왼손은 미유키가 칠하는 걸로 하자.
“분홍색깔로요?”
“네... 복숭아 색으로...”
“저한테 안 어울릴 것 같은데요.”
“아닌데요... 복숭아 색이라서 더 어울릴 것 같은데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면서 말대꾸는 잘하네.
갑작스레 말랑말랑해진 분위기를 즐기던 나는 무릎을 폈다.
“주차장으로 가죠.”
“앗... 주차비는 제가 낼게요...”
“그렇게 제게 빚을 지기 싫은 건가요?”
“그, 그게 아니라요... 오늘 절 도와주셨으니까 당연히...”
“호의는 호의로 받아들여주세요. 알았죠?”
“네에...”
“착하네요. 이제 갈까요?”
“네에...”
저번처럼 짤막한 긍정표현만 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
피식한 나는 치나미의 얇디얇은 팔을 쓰다듬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오늘은 딱 여기까지가 적당하다.
괜히 민감해진 치나미의 감정을 건드려 터뜨리지 말고, 얌전히 돌아가자.
**
다음날.
미유키의 집 앞에 차를 대기시켜놓고 있던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치나미의 프로필 사진이 바뀌어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일러스트보기 Click
헤롱거리고 있는 모모님이구나.
자신이 현재 느끼고 있는 마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부끄럽고, 어질어질하고, 심란한.
그나저나 모모님의 표정이 꽤나 다양하다.
아헤가오도 있을까 궁금해진다.
덜컥.
내가 휴대폰에 집중하는 사이 조수석 문이 열렸다.
밝은 낯으로 차에 탄 미유키.
자연스럽게 나와 입술을 맞부딪치고 안전벨트를 맨 그녀에게, 내가 물었다.
“오래 기다렸냐?”
“아냐. 방금 나왔어. 이제 테츠야 군 집으로 갈 거지?”
“그 방해꾼은 계속 태워야 돼?”
“아 왜 저번부터 계속 방해꾼이라고 해...! 친구잖아...!”
친구는 무슨.
콧방귀를 끼는 것으로 주제를 넘긴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어제 뭐했어?”
창밖을 바라보던 미유키의 평범한 물음.
묵묵히 운전을 하던 내가 태연히 대답했다.
“나나세 선배 만났어.”
“나나세 선배...? 그 검도부 매니저 선배님...? 저번에 만났던?”
“어. 중고물품을 직거래한다길래 따라갔어.”
“그 선배께서 중고거래를 하는데 마츠다 군이 왜 따라가?”
“너도 저번에 봤으니까 알지? 나나세 선배가 얼마나 순진한지.”
“되게 착하시긴 했는데...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
“사기당할 것 같은 느낌이라서. 그래서 같이 갔는데 진짜로 당할 뻔했어.”
“뭐...? 진짜?”
싸늘한 표정을 지으려던 미유키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런 그녀를 흘끗 바라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모님이라고 인기가 많은 복숭아 인형이 있거든?”
“아...! 나 그거 알아! 요즘 엄청 유명하다던데...”
“나도 알아보니까 유명하더라. 무슨 인형 값이 2만 엔이 넘어가.”
“2, 2만 엔...? 엄청 큰돈인데, 그걸 사기당할 뻔했다구?”
“정확히는 2만 5천 엔이야.”
“인형은? 거래하기 전에 확인해봤을 거 아니야.”
“물론 하긴 했지. 근데 대충만 확인해보고 돈을 주더라. 내가 제대로 살펴보려는 순간 사기꾼이 돈을 갖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그때 그놈을 잡다가 인형이 바닥에 떨어졌거든? 근데 모가지랑 몸이 분리됐어.”
미유키가 자신의 몸을 내 쪽으로 완전히 돌렸다.
흥미가 돋은 듯했다.
“그런 걸 직거래로 팔려고 한 거야? 사기를 치려면 택배거래가 더 낫지 않나?”
“글쎄. 나나세 선배랑 만나기 전에 대화해보고 약간 얕본 것 같다 싶은데. 그리고 택배로 거래하면 증거가 남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하긴... 직거래보다는 핑계거리가 줄어들긴 하겠네. 그래서 사기꾼은 어떻게 됐어?”
“경찰에 넘기려고 했는데, 선배가 용서해줬어.”
“왜...?”
“눈앞에서 싹싹 비는 모습을 보고 동정심이 들었나보지. 그래도 역무원이 데려가긴 했으니까 체포되기는 할 걸?”
“그건 다행이네... 혼자 가셨으면 큰일 날 뻔했다... 잘했어.”
미유키가 칭찬의 뜻으로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선의로 따라갔다고 생각해서 저러는 모양.
두 사람을 슬쩍 만나게 해서, 친해지도록 만들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 전에 먼저 쌓아두어야 할 것들이 많긴 하지만.
“근데 나나세 선배는 순해도 너무 순하신 거 아니야? 큰돈이 걸린 거래인데...”
“그러게. 사람을 너무 잘 믿나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테츠야의 집에 도착했다.
휑한 현관문을 본 내가 투덜거렸다.
“얻어 타는 주제에 미리미리 나와 있지도 않네.”
“금방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나도 가끔씩 1, 2분 늦잖아.”
“넌 당연히 태워야 되는 사람이니까 상관없는데...”
말끝을 흐린 나는 미유키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쏙 집어넣었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움찔하는 그녀에게 히죽거린 내가 말을 이었다.
“미우라는 슬슬 짜증나려고 한다.”
“짜증나긴 뭐가...! 이, 일단 이거 좀 놓고...”
“선팅 잘 돼있어. 밖에서 안 보여.”
제복 치마를 허벅지까지 젖히면서 점점 깊숙이 들어가는 손.
헉 하며 숨을 삼킨 미유키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내 손을 잡고 들어 올리려 낑낑거렸다.
“아침부터 이러지 마...!”
“미우라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을까?”
“내, 내가 한 마디 할게...! 그러니까 이거 놔...! 지금 테츠야 군 나오잖아...!”
과연 미유키의 말마따나, 식빵을 입에 문 테츠야가 현관문에서 나오고 있었다.
“쟤는 꼭 이럴 때 방해하더라.”
투덜거리며 손을 떼어내자, 미유키가 다급하게 자신의 치맛자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확 뜨거워진 손을 한 차례 꼬옥 잡은 내가 말했다.
“약속했다? 네가 한 마디 해.”
덜컥.
내 말이 끝나는 찰나, 뒷좌석 문이 열리며 테츠야가 탔다.
식빵을 우걱우걱 씹어 삼킨 그가 가벼운 사과를 건넸다.
“미안, 많이 늦었지?”
알긴 아네.
뭐라 하려 했는데, 잘했다고 칭찬해줄게.
앞으로 널 태우지 않게 될 때까지, 이렇게 애매한 타이밍에 나와 줬으면 좋겠다.
네 그런 눈치없는 행동도 미유키의 취향 개발에 도움이 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