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82화 (82/313)

점심시간.

얼마 남지 않은 봉사활동 시간을 채운 나는 후덥지근한 급식실에서 나왔다.

그렇게 단추가 자리한 셔츠의 플래킷을 잡고 흔들어대며 땀으로 젖은 몸속에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데,

“마츠다네?”

뒤에서 렌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린 나는 팔짱을 낀 렌카가 다가오자 반가운 듯 미소 지었다.

“이노오 선배? 여긴 어쩐 일이에요?”

“매점 가는 길이었어. 봉사활동 시간 채웠던 건가?”

“예.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데, 손수건 있으면 좀 줄래요?”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렌카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그녀는 딱히 뭐라고는 하지 않고, 주머니에 있던 휴대용 미니 티슈를 꺼내 내밀었다.

내가 무척 더워보여서 넘어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손수건은 없어.”

티슈를 몇 장 뽑아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아낸 내가 말했다.

“이거면 됐죠. 감사해요.”

“치나미한테 들었는데, 사기당할 뻔한 걸 도와줬다면서?”

“예.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왜 치나미를 따라간 거야? 모모님을 좋아한다는 말까지 하면서.”

전부 들었구나.

하긴, 두 사람에겐 비밀이 없지.

이제부터는 조금씩 생겨나겠지만.

“걱정되니까요. 나나세 선배는 순수하잖아요. 모모님도 귀엽고.”

“.... 귀여운 걸 좋아할 성격은 아닌데.”

“누가? 내가요?”

“누구라곤 하지 않았어. 찔리나보네?”

코웃음을 친 나는 티슈를 쓰레기통으로 휙 던졌다.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쏙 들어가는 티슈.

만족스런 표정으로 쓰레기통을 바라보던 나는 화제를 돌렸다.

“나나세 선배 혼자 그런 거래에 보내기에는 위험한 거, 인정하죠?”

“인정해. 알았다면 내가 너 대신 갔을 거야.”

자꾸 이렇게 굴복시키고 싶게끔 앙칼지게 나오면 어떡하니.

진짜 해보고 싶은 플레이가 있는데, 이건 너한테 해주마.

“그래도 감사인사는 해둘게.”

이어지는 렌카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절반가량 쓴 티슈 봉지를 내밀었다.

“어제 어디 갔었어요? 나나세 선배랑 따로 떨어질 정도면 바빴나 보네?”

“내가 왜 너한테 그걸 말해줘야 해?”

“저 마음에 안 들죠?”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뇨. 말투에 날이 서있길래. 어쨌든 부활동 시간에 봐요. 전 갑니다.”

간단하게 검도식 목례를 하자, 렌카가 날 잠깐 노려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런 그녀에게 히죽 웃어보인 나는 발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

“스승님.”

“.....”

머엉.

내 부름에 대답도 하지 않고 호완에 탈취제를 뿌리는 치나미.

그녀를 지켜보던 내가 툭 던지듯 말했다.

“스승님. 그건 알코올이 아니라 탈취제인데요?”

“.... 앗...!”

그제야 정신을 차린 치나미가 화들짝 놀라며 탈취제를 내려놓았다.

수분을 가득 머금은 호완을 살핀 그녀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저, 젖어버렸어요...! 물에 퐁당 빠졌다 꺼낸 것처럼 축 늘어져있어요...!”

젖었다고?

말이 뭔가 야한데.

“예. 젖었네요.”

“딴생각을 하느라 그만 이런 실수를...”

“아까도 멍해있더니... 오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네요? 어디 아픈가?”

그리 말한 나는 치나미의 이마에 손등을 대었다.

“엇!”

짤막한 감탄사를 터뜨린 치나미의 눈이 커졌다.

부르르 떨리는 그녀의 몸.

바짝 긴장한 게 눈에 보인다.

“열은 없는데...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갛지?”

진부한 대사로 치나미를 걱정한 나는, 그녀가 찔끔하려고 할 때쯤 손을 떼어냈다.

“환절기니까 감기를 조심해야 돼요. 집에 돌아가면 따뜻한 물로 씻고, 머리도 잘 말리고, 이불도 두꺼운 걸로 덮어요.”

“.... 네에...”

“어제 약속은 잘 지켰죠?”

“네... 중고 사이트엔 들어가지 않았어요...”

“눈앞에 아른거리던 모모님은 잊혀졌고?”

“조금요...”

“다행이네요.”

나는 마치 아이를 다루듯 치나미의 등에 손을 가져갔다.

손이 닿자마자 어깨를 달싹이는 그녀.

하지만 자신의 등을 위아래로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마음에 든 듯, 이내 몸을 늘어뜨리며 노곤한 표정을 짓는다.

틱. 틱.

아빠다리를 한 치나미의 아래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뭔가 싶어 눈을 내려보니, 그녀가 자신의 검지로 엄지손톱을 덮은 큐티클을 뜯으려 하고 있었다.

“손 가만히.”

“네에...”

말 한 번 잘 듣네.

착한 치나미를 향해 방긋 웃은 나는, 그녀의 등을 톡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치나미가 유령처럼 소리 내지 않고 마주 일어나더니 날 불렀다.

“.... 후배님.”

“예.”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갑자기요?”

“아이스크림 사드리고 싶어요... 사드릴 거예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로 고집을 부리는데, 이걸 대담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소심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요. 그러면 같이 매점으로 갈까요?”

“아, 아니요...! 저 혼자 다녀올 테니까... 후배님은 저기서 쉬고 계세요... 딴 짓하면 혼을 낼 거예요...”

치나미의 손가락이 보관실 구석을 가리켰다.

저 좁아터진 곳에서 쉬라고?

방금 허락 없이 몸을 만지고 자신을 휘둘렀던 내게 벌이라도 주려는 건가 싶다.

“저는 호완 청소를 마무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방금 스승님이 탈취제를 듬뿍 뿌렸던 것도 수습해야하는데.”

“흠...!”

못마땅함 반, 만족스러움 반.

그런 감정이 섞인 감탄사를 터뜨린 치나미가 자신의 허리춤으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따지듯 대답했다.

“일단 아이스크림을 먹고 생각하도록 해요...!”

스승으로서의 위엄을 세우고 싶어서 약간 화를 내는 건가?

엉뚱하다. 그리고 치나미와 같이 있다 보면 나까지 영향을 받는 기분이다.

머릿속에 있는 계산기가 고장 나는 느낌.

결국 생각을 포기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

코로 숨을 훅 내뱉은 치나미는 곧 보관실 문을 열고 나갔다.

고요해진 안을 둘러본 나는, 선풍기를 틀어 탈취제가 듬뿍 묻어버린 호완을 말리기 시작했다.

미유키도 집에 돌아가야 되고, 치나미랑은 어제 만났으니까...

오늘은 렌카를 찾아봐야겠다.

**

[번개의 호흡, 제 1의 형... 벽력...]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역동적인 애니 캐릭터의 기술이 펼쳐지자 눈을 감았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푸른 섬광이 너무 밝아서였다.

북적거리는 인파 사이를 뚫고 나가 한 피규어 매장에 도착하니, 여기도 사람들이 빽빽하다.

6층짜리 건물이고, 내부도 엄청 넓다.

여기서 렌카를 찾을 수 있을까 싶지만, 최근 완결이 난 애니의 한정판 피규어 판매 이벤트가 열리는 만큼 발견할 가능성은 높았다.

“피규어를 구매하시려고 오신 분들은 4층으로 가세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통제되지 않는 사람들을 안내하던 직원의 큼지막한 목소리.

화가 많이 났나보다. 서비스직인데도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면.

득시글거리는 사람들로 인해 무척 더운 매장의 계단을 올라간 나는, 층의 끝에서 끝까지 이어져있는 줄을 보았다.

죄다 피규어를 사러 온 사람들인가?

어림잡아 수백 명은 넘어 보이는데 여기서 렌카를 찾으려면 시간이 깨나 걸릴 것 같다.

라고 생각을 하던 찰나,

‘어?’

긴 다리를 감싸는 짙은 남색 청바지와 부츠,

배꼽이 살짝 보이는 크롭티, 그리고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은... 마치 바이크 라이더 같은 코디를 한 여자를 발견했다.

안 그래도 길쭉한데 코디 때문에 더 길쭉해 보이는 그 사람은 분명히 렌카였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한 그녀는, 쇼핑백을 든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주칠 거라고는 확신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곧바로 볼 줄은 몰랐다.

이게 주인공 버프지. 근데 가끔 내가 주인공인 걸 깜박한단 말이야.

어떤 눈치없는 새끼한테 여복이 죄다 몰리니까.

재빨리 허리를 숙여 키를 낮춘 나는 옆으로 벗어나 인파에 섞였다.

이후 내가 있던 자리를 지나치는 렌카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눈매엔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자신의 집에 있는 거대한 전시장 맨 윗줄에 피규어를 갖다 놓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거리를 둔 채로 조용히 렌카를 뒤따라간 나는, 인적이 꽤나 뜸해질 때쯤 그녀를 불렀다.

“이노오 선배?”

“어헉!?”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는 렌카.

아리송한 척 고개를 갸웃하던 내가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맞네! 이노오 선배죠?”

“.....”

눈빛에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게 티가 난다.

호들갑을 떤 나는 그녀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서 뭐해요?”

“아... 그...”

“그건 뭐고? 혹시 피규어 샀어요?”

내 시선이 애니 캐릭터가 대문짝만하게 그려진 쇼핑백으로 향하자, 그녀가 흠칫하더니 대답했다.

“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이게 피규어인 건 어떻게 아는데?”

“그거 한정판으로 파는 피규어 아니에요? 나도 사러 왔어요.”

“뭐...? 네가 왜?”

“사고 싶으니까. 그거 어디로 가면 살 수 있어요?”

“아니... 피규어를 사러 왔는데 판매장소도 몰라? 파는 곳은 반대편이야.”

“찾아보긴 했는데 헷갈리더라고요. 근데 그건 왜 산 거예요? 혹시 애니 좋아해요?”

“이거... 지방에 있는 조카 주려고 산 건데?”

어느새 침착하게 돌아온 렌카가 나름 능숙하게 핑계거리를 늘어놓았다.

속으로 코웃음을 친 내가 물었다.

“조카가 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나보네요?”

“그냥 뭐... 좋아한대...”

“그래요? 지금도 팔죠?”

“지금 가면 늦지... 한정수량이 있어서 못 살 거야 아마...”

“예...?”

짜증으로 얼룩진 내 표정.

안타까워하는 내가 의외라고 생각했을까?

모자를 고쳐 쓴 렌카가 말했다.

“너는 이런 쪽엔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관심이 없었다면 이 세계에 오지도 못했을 거다.

“이제 관심 좀 가져보려고요. 애니 재밌더라고.”

“.... 그래? 근데 피규어는 못 샀네?”

“약 올리는 거예요?”

“아니 뭐... 그건 아니고... 흐흠...”

이 자리가 굉장히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하는 그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나는 발걸음을 돌리는 척을 하다가, 다시 렌카를 돌아보았다.

“선배.”

“어...?”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그래야지...”

“태워줄까요?”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만난 것도 인연이잖아요.”

나는 일부러 피규어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마치 그것에 눈독을 들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내 연기에 홀라당 넘어간 렌카가 쇼핑백을 자신의 등 뒤로 가져갔다.

“이건 절대 안 돼... 꿈 깨. 정 사고 싶으면 다른데 가봐. 인기 많은 애니여서 일반 피규어도 팔아...”

“그건 어떻게 아는데요?”

“전광판에 죄다 이 애니 캐릭터들뿐인데 모를 수가 있나...?”

“아니, 일반 피규어를 파는 건 어떻게 알았냐고요.”

“길 가면서 봤으니까 알지... 왜 시비야?”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제 말투가 원래 이래요. 나 알잖아요.”

자조적인 투로 스스로를 자책하자, 렌카의 마스크가 확 부풀었다.

실소를 터뜨린 것이다.

그 틈을 탄 내가 방글방글 웃는 낯으로 물었다.

“혹시 어디서 그 피규어를 봤는지 안내해줄 수 있어요?”

“저기서 봤어.”

손가락으로 건너편을 가리키는 렌카.

미간을 살짝 좁힌 내가 말했다.

“뭉뚱그려서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요? 안내해줘요.”

“싫은데. 휴대폰으로 찾아봐.”

“진짜 정 없게 구시네. 저번에 저랑 대련할 때 심하게 나왔다면서 사과했죠? 그거 갚을 겸 안내해줘요 그럼.”

렌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 얼굴과 자신이 들고 있는 쇼핑백을 번갈아 쳐다보며 주판을 두드리던 그녀는,

“하아...”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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