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에 힘주세요.”
“이렇게요?”
“네, 그렇게요.”
내 앞에서 허리를 두른 갑상 끈을 제대로 묶어주는 치나미.
그녀의 키가 작아서 그런지 자세가 묘하다.
마치 펠라를 하기 직전에 바지를 벗겨주려는 것 같다.
아랫도리에 찾아온 묘한 자극을 애써 날려버린 내가 치나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스승님에게 배운 것들로 뼈와 살을 발라버리겠습니다.”
“바르다니요... 대련하는 후배님들이 무슨 생선인가요? 앗, 갑자기 참치회가 먹고 싶어지네요.”
“나중에 먹으러가요.”
“전 좋아요. 하지만 참치회는 비싸니까 연어초밥으로 먹어요.”
산으로 가는 대화.
왠지 모르게 재미있다.
어느새 갑상과 갑을 잘 입혀준 치나미가 면수건을 들고 내 앞에 섰다.
“정좌하고 앉으세요.”
“예.”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은 나는, 치나미가 이마에 수건을 둘러준 뒤에 호면을 씌워주자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예뻐 보이기 힘든,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구도.
그러나 치나미는 어디에서 보든 귀여웠다.
“볼살 만져도 돼요?”
뜬금없는 내 말에, 치나미가 움찔하더니 호면의 정수리 부근에 콩! 하고 딱밤을 때렸다.
“후배님, 지금은 마음을 호수와도 같이 고요하게 다듬을 때에요...! 대련이 코앞인데 이상한 소리를 하다니... 만약 렌카나 감독님께서 들으셨다면 혼쭐이 났을 거예요...!”
“대련에서 다 이기면 만지게 해줘요.”
“무, 무슨 말씀을...! 못 들은 걸로 하겠어요...! 그리고 대련이 무슨 내기인가요? 몸과 마음을 다해 자신의 수련성과를 선보이는...”
“만지겠습니다.”
“어허...! 후배님...!”
콩! 콩!
확 달아오른 얼굴로 호면을 때리는데, 아프지도, 기분이 나쁘지도 않다.
우리 치나미... 빨리 마사지해주고 싶어.
볼살 대신 마사지를 받아달라고 할까?
“얼굴이 당겨지는 느낌은 없으신가요?”
호면 끈을 묶어주는 치나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편안해요.”
“다행이네요. 자, 이제 호완만 착용하면 돼요.”
무릎 앞에 놓인 호완을 장갑 끼듯 착용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촘촘한 면금 사이로 선배들의 도움을 받으며 호구를 입고 있는 1학년들이 보인다.
테츠야는... 렌카 덕분에 이미 준비를 끝낸 상태구나.
운 좋은 놈. 언제 한 번 날을 잡고 신나게 패주마.
“후배님이 중점적으로 생각하셔야할 것은, 밀어걷기를 활용한 발구름과 머리치기에요. 그리고... 상단세의 단점이 뭐라고 했죠?”
“목찌름, 그리고 근접전이요.”
“맞아요. 상대방은 적극적으로 근접전을 유도하려고 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코등이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 물러나면서 치는 퇴격을 조심하셔야 해요. 더 좋은 건 아예 코등이 싸움을 만들지 않는 것이지만, 맞서면서 타개책을 고민해보는 것도 좋아요. 아시겠나요?”
“명심하겠습니다.”
“후배님께선 키와 덩치가 커서 기세가 아주아주 좋으니까, 힘찬 기합으로 기선제압을 해보아요. 또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얼마 없는 만큼 최대한 빠르게 한판을 따내는 게 맞지만, 수련 성과를 확인해보는 친선 대련이니까 경험도 쌓을 겸 되도록 오래 경기를 끌고 가세요. 공격을 허용하더라도 상관없어요.”
정성을 다해 조언을 해주는 그녀.
그녀를 내려다본 내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각골(刻骨)하겠습니다.”
단어선택이 마음에 들었을까?
치나미가 푸흐흐... 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어깨를 팡팡 쳤다.
키 차이가 너무 나서 팔을 쭉 뻗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준비된 사람들은 이쪽으로.”
부실 한켠에 서있던 도지마 고로의 스산한 목소리에, 호구와 죽도를 착용한 부원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치나미의 격려를 받은 나 또한 그 안에 포함되어있었다.
**
움찔.
기세에 눌린 1학년이 물러났다.
밀어걷기를 통한 후퇴가 아니라, 그저 본능에 의한 뒷걸음질.
틈을 찾은 나는 곧바로 발을 굴렸다.
“흡!”
쿠웅-!
왼발을 크게 내딛으며 뒤꿈치, 무릎, 그리고 턱이 수직선상에 오도록 하고,
오른발가락 끝부분은 바닥에 딱 붙인 채 타돌.
치나미에게 배웠던 동작을 그대로 따라한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쩌어억-!
상대의 호면에서 죽도 특유의 찰진 소리가 피어난 것이다.
점수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격자부에 제대로 맞았다.
진검이었다면 즉사. 그러나 검도에선 방심하지 않는 마음... 즉, 잔심이 필수덕목이다.
이게 없다면 점수로 인정되지 않는다.
나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는 상대를 주시하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나와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던 고로가 적기를 들며,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한판!”
동시에 정좌를 하고 앉아있던 부원들이 박수를 쳤다.
검도부에 입부하고 처음으로 점수를 따본 건데, 그렇게까지 기쁘진 않다.
저기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렌카가 상대였다면 좋았으련만, 그게 못내 아쉽다.
흘끗 치나미를 보니 만면에 미소가 피어나있었다.
동작의 기승전결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발을 구르는 상대.
검도를 배운지 얼마 안 된 내게 순식간에 한판을 따여 성질이 뻗친 것 같았다.
“제자리로!”
고로의 말을 따라 선이 그어진 위치까지 간 나는,
“시작!”
시합이 재개되자마자 재차 달려드는 상대를 요리해주려다가, 치나미의 조언을 생각하고 그와 몸을 맞부딪쳤다.
카각-!
서로의 코등이가 걸쳐지면서, 면금이 쿵! 하고 맞닿는다.
상대가 휘청거리면서 간신히 중심을 잡아내고 있다.
저 타이밍에 두 방은 더 갈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참아준다.
자비로운 내게 감사하도록 해라.
면금 사이로 보이는 상대의 눈엔 전의가 남아있었다.
반격할 의지가 보인다.
치나미가 퇴격을 조심하라고 했는데...
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 상대의 뒷발이 밀려나더니 몸이 쭈욱 빠져나갔다.
거의 일직선으로 되어있던 그의 죽도가 사선이 되면서 위로 들리고, 죽도 끄트머리를 감싼 선혁이 얕게 떨리는 게 보인다.
물러나면서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구나.
가만히 있을 경우 손목을 내어주게 된다.
대비를 하고 있던 나는 재빨리 뒤로 빠져나가면서, 퇴격을 시도하는 상대를 향해 팔을 옆으로 휘둘렀다.
쩌어억-!
호면의 옆면을 후려치는 죽도.
상대의 고개가 튕겨나가듯 옆으로 확 젖혀지면서, 몸까지 휘청거렸다.
중심을 완벽하게 잃은 것이다.
그 틈을 탄 내가 자세를 고쳐 잡고 달려들려고 하는데,
펄럭-!
“중지!”
고로가 양손에 있는 깃발을 동시에 번쩍 들더니 시합 중지를 선언했다.
죽도를 내려놓은 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고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고로가 인상을 팍 쓰더니 날 나무랐다.
“마츠다, 거긴 격자부위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타돌한 이유는 알 것 같다만... 친선전임을 명심해라.”
내가 무슨 목적으로 저길 갈겼는지 눈치챘구나.
경고를 받은 나는 얌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위치로.”
시합이 다시 재개됐지만, 방금 일격으로 인해 기세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다른 학생들 또한 마찬가지. 내 실력을 보고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고, 그렇게 대련은 아주 싱겁게 끝이 났다.
**
“친선전은 사납게 하는 게 아니야. 호면 옆을 때리는 건 대체 무슨 경우야?”
나는 렌카에게 따로 불려가 훈계를 듣고 있었다.
너무 과도한 손속을 보여줬다는 게 그 이유였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머리카락을 대충 털어낸 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반칙 아니잖아요. 자유대련이기도 하고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친선 형식을 띠는 대련이잖아. 감독께서도 그러셨고.”
“경고를 들은 후엔 격자부위만 제대로 때렸는데? 아니, 선배가 말한 대로 나나세 선배에게 배운 것들을 잘 써먹어가면서 싸웠는데, 제가 왜 주의를 받아야 됩니까? 이해할 수가 없네? 선배는 가만 보면 절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것 같습니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게 아니라, 서로의 실력을 보는 자리에서 너무 압도적으로 이겨버리면 상대가 발전할 수 있겠어?”
“발전이 왜 안 됩니까? 겁부터 먹고 들어오는 상대한테 담력을 키워줬는데.”
“너...”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하...”
어이가 없어졌는지, 렌카가 헛웃음을 켰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업보를 청산시켜주고 싶은 눈빛인데...
우리 렌카, 합숙훈련 때 단둘이 몸을 부딪치면서 마구마구 싸워보자.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괜찮지?
“조카한테 선물은 잘 줬어요?”
훅 치고 들어오는 내 물음에 흠칫하는 렌카.
성이 나있던 그녀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 잘 줬어.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날카롭던 분위기가 가라앉으면서 안개가 낀 느낌으로 변한다.
너도 치나미만큼은 아니지만 솔직하긴 하구나.
“아까부터 서운하게 왜 그러세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친절하게 굴면서.”
“네게 예의가 있었다면 나 또한 친절했을 거야.”
“먼저 친절하게 굴어야 예의를 갖추죠.”
“너랑 말장난할 생각은 없어. 다시 돌아가서, 내가 이러는 이유는 널 비롯한 부원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기 때문이니까 새겨들어줬으면 좋겠...”
렌카가 마저 훈계를 하는 찰나,
끼익...
문이 열리면서 치나미가 나왔다.
나와 렌카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는, 돌연 허리춤에 손을 올리더니 화가 잔뜩 서린 표정을 지었다.
“후배님.”
“예, 스승님.”
“제가 뭐라고 했죠? 시간을 최대한 오래 끌면서 경험을 쌓으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 감독님께서 대련을 중지시킬 정도로 상대방을 압도했나요? 이러면 상대에게나, 후배님에게나 도움이 전혀 안 돼요...! 게다가 호면 옆을 치는 건 너무 사나웠어요...!”
렌카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입맛을 쩝쩝 다신 나는 렌카에게 보여주었던 반응과는 다르게,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죄송합니다.”
렌카의 표정을 볼 순 없는 상태지만, 그녀는 아마도 이런 내 반응에 놀랐을 것이다.
아니면 가식을 떤다면서 속으로 화를 내고 있거나.
“검도란 상대방을 향한 존중이 우선시되어야하는 무도에요. 그런데 오늘의 후배님은 대련 전후의 인사를 제외하면, 그 존중이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이 스승은 후배님에게 실망했어요.”
콧바람을 훅 내뱉으며 팔짱을 끼는 그녀.
삐친 치나미를 깨물어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사과의 뜻으로 입례를 했다.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대련했던 동기들에게도 사과하겠습니다.”
“흠...! 정말인가요?”
“예. 못 믿겠다면 지금 같이 갈까요?”
“못 믿는 건 아니지만... 흠흠...”
화가 상당히 누그러진 얼굴로 언짢은 한숨을 내쉬던 치나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좋아요.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게 마츠다 후배님이나 다른 후배님들에게도 좋은 거예요. 서로 친하게 지내야지요. 그렇지 않나요?”
“맞습니다.”
“렌카 친우님, 마츠다 후배님은 제가 데려가서 따끔하게 혼을 내겠어요. 괜찮죠?”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렌카가 움찔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그러면 후배님, 저를 따라오세요.”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치나미를 뒤따라가며 렌카를 곁눈질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보라는 듯 아니꼬운 콧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렌카가 발끈하더니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이게...!”
하지만 치나미의 눈치를 보고는 이내 뒤로 물러났다.
날 가르치는 입장인 치나미의 앞에서 더 뭐라고 하기가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앙칼진 것. 그래도 배려심은 있네.
빨리 굴복시켜주고 싶은데, 합숙훈련이 조금 앞당겨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