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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88화 (88/313)

지이잉...!

다다미 밑에 놓인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미유키와 함께 기절해있던 내가 손을 더듬거리려고 하는데,

“.... 내 전화야...”

잠에서 깨어난 미유키가 인상을 마구 찌푸리며 휴대폰을 가져오더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자고 있었어?]

휴대폰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나름 괜찮지만 소심한 목소리.

테츠야였다.

눈을 부비적거린 미유키가 대답했다.

“응...”

[내가 너무 일찍 전화했나? 미안해.]

“아냐... 근데 무슨 일이야...?”

[심심해서 전화해봤지. 넌 원래 일곱 시쯤 일어나니까.]

어제 뭘 했는지 궁금한 건가?

하긴,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15년 지기 소꿉친구가 나와 단둘이 뭘 했는데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그러니까 처신을 똑바로 했어야지.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네가 그렇게 둔하니까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기는 거란다.

렌카도, 히요리도 그렇게 될 거야.

헛된 희망 같은 건 갖지 마.

속으로 테츠야를 한껏 비웃어준 나는 귀를 기울여 통화를 계속 엿들어보았다.

“주말이니까 늦잠 자려구...”

[그래? 그럼 더 자. 일어나면 연락하고.]

“알았어... 미안.”

[아냐. 내가 미안하지. 그럼 끊을게.]

“으응...”

비몽사몽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미유키가 코로 기다란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내 품에 안겨오더니, 새우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부르르 떨었다.

“추워...”

그런 미유키를 끌어안은 내가 말했다.

“너는 애가 왜 그렇게 착하냐?”

“뭐가...”

“아침부터 저렇게 염치없이 전화하는데, 나 같으면 욕했다.”

“뭘 이런 것 가지고 욕을 해... 테츠야 군은 내가 원래 이쯤 일어나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전화해본 거지...”

“조만간 몇 대 때려주든지 해야겠네.”

콰악.

가슴팍에서부터 따끔하고도 묵직한 고통이 일었다.

미유키가 깨문 것이다.

때린다는 말을 하니 화가 난 듯한데... 아프다.

황급히 미유키의 머리를 떼어낸 나는, 그녀의 뒷목을 주물러주며 진정시켰다.

“왜 사람을 물고 그래? 네가 개야?”

“그렇게 험악한 말을 하니까 그렇지...”

“나는 말만 했지, 넌 아예 폭력을 쓰네?”

“.....”

잠깐 침묵하고 있던 그녀가 내 품 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할 말이 없어져서 애교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행동이었다.

그런 그녀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나는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미유키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이런 행동은 날 무척 편하게 대해서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테츠야보다 훨씬 더.

놈과는 이젠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

쏴아아아-!

거친 빗줄기 속을 부드럽게 가로질러가는 자동차.

자신의 가디건을 여민 미유키가 날 돌아보며 말했다.

“마츠다 군도 같이 갈래?”

“아니. 가족끼리 시간 보내는 자리인데 내가 무슨 염치로 끼냐?”

“엄마랑 아빠는 좋아할 걸?”

“그런다고 해도 안 돼. 초대받은 것도 아니라서 내 마음이 불편해.”

단호한 대답에 미유키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현재 미유키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도리가 갑작스럽게 연락이 와서, 친구에게 민폐 끼치지 말고 가족끼리 식사하게 들어오라는 소릴 해서였다.

“분명히 이틀간 잔다고 말해놨는데...”

투덜거리는 미유키의 손을 잡고 손깍지를 낀 내가 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딸을 걱정하는 건 어머니로서 당연하잖아. 평소엔 집에 얌전히 있던 사람이 최근엔 일주일에 며칠 씩 집을 비우는데, 누구라도 걱정할만하지.”

“.... 그렇긴 해도...”

“도착했다. 조심히 들어가고, 연락해.”

집 앞에 멈춰선 자동차.

아쉬운 콧바람을 기다랗게 내뱉은 미유키가 돌연 내 손을 자신의 가슴께로 가져오더니, 손등에 입술을 대고 꾸욱 눌렀다.

그리고는 재빨리 문을 열고 도망치듯 달려갔다.

뜬금없는 애정표현에 피식한 나는 차를 몰고 집으로 가려다가, 치나미가 생각나 갓길에 잠깐 멈춰 섰다.

이후 채팅 앱을 켜고 치나미를 찾아보았다.

프로필 사진은 아직도 헤롱거리고 있는 모모님이구나.

대화방에 들어간 나는 휴대폰 화면에 나타난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스승님.]

곧바로 대답할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1분이 지나도록 휴대폰은 조용했다.

혹시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할 때쯤,

[안녕하세요. 후배님. 비가 정말 많이 오는군요.]

치나미의 답장이 왔다.

[그러네요. 혹시 뭐하세요?]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왔답니다.]

[약속이라도 있나보네요?]

[저녁에 렌카를 만나기로 했는데, 샤워를 한 건 날이 추워져서 따뜻한 물로 몸을 녹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가만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이벤트를 챙기지 않았었는데...

이참에 한 번 가볼까?

두 사람이 만나는 장소는 정해져있긴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이니만큼 바뀔 수도 있으니 치나미를 넌지시 떠봐야겠다.

[그렇군요. 점심은 시간이 비는 거네요?]

[그렇지요.]

[혹시 괜찮으면 저랑 영화라도 한 편 볼래요? 저번에 보기로 했잖아요.]

[어떤 영화인가요?]

[아직 정하진 않았는데, 뭐 보고 싶은 장르라도 있나요?]

[그러면 언제 만날까요?]

아니, 보고 싶은 장르를 물었잖아.

과정을 생략해버리면 어떡하니.

여전히 엉뚱한 치나미의 답장을 보고 실소를 터뜨린 내가 화면을 두드렸다.

[지금 갈까요?]

[얼마나 걸리시나요?]

[한 15분?]

[흠. 좋아요.]

치나미와 대화를 마친 나는 방향을 틀었다.

갑작스럽게 시간이 비게 되었다고 해서 집으로 가 쉬는 건 죄악이다.

우리 신님께서 도와주고 계시는데, 빈 시간을 허투루 써선 안 되지.

**

덜컥.

조수석 문을 연 치나미가 우산을 접더니 낑낑거리며 올라탄다.

반바지와 샌들, 그리고 두꺼운 맨투맨과 살짝 옆으로 돌려쓴 모자.

매치가 잘 안 되는 코디 같지만, 치나미라서 어울린다.

약간 귀엽게 힙하네.

“안녕하세요, 후배님.”

공손하게 목례를 하는 그녀.

마주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은 내가 물었다.

“춥다더니 반바지를 입고 왔네요?”

“긴바지를 입으면 빗물이 묻으니까요. 담요를 갖고 와서 괜찮아요.”

치나미가 당당하게 담요를 쫙 폈다.

가운데에 커다란 모모님 그림이 그려진, 저번에 보았던 분홍분홍한 담요였다.

그것을 무릎 위에 덮은 치나미가 방글방글한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무슨 말을 하려다가, 돌연 코를 킁킁거렸다.

“흐음... 자두 냄새가 나네요. 그러고 보니 요즘 후배님의 몸에서 자두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저번에 부실에서도 그랬는데...”

“제 몸 냄새도 맡으세요?”

“앗...! 일부러 맡은 게 아니라, 후배님께서 풍겼다는 뜻이에요.”

당황해하는 치나미.

그런 그녀를 향해 살웃음을 지은 내가 말했다.

“농담입니다. 혹시 자두는 좋아하세요?”

“물론 좋아해요. 복숭아보다는 아니지만요.”

그럼 미유키랑 잘 놀겠네.

문득 이런 생각이 난다.

치나미가 가장 친했던 렌카와 소홀해지면서, 나, 그리고 미유키와 더욱 시간을 보내는 그림...

그렇게 치나미를 NTR당하는 렌카...

뭔가 꼴리잖아.

“이노오 선배와는 왜 만나기로 한 건가요?”

“함께 옷을 사기로 했답니다.”

옷가게라...

둘이 자주 가는 곳은 이미 알고 있다.

근처에서 죽치다보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영화관으로 간 우린 키오스크 앞에서 볼 영화를 골랐다.

화려한 연출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는 액션 블록버스터.

잔잔한 영화를 원했는데, 우리가 볼 시간대엔 상영하지 않아서 그게 못내 아쉬웠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아서, 현장예매는 그다지 좋지 않은 자리밖엔 없었다.

다만 내게는 더없이 좋았다.

남은 자리가 옆에 다른 사람이 앉을 수 없는, 어떠한 일을 하기 딱 좋은 구석진 자리였기 때문이다.

아쉬워하는 치나미를 달래며 표를 뽑은 내가 물었다.

“팝콘도 드실래요?”

“앗, 네! 저한테 복숭아 가루가 있어요.”

“.... 복숭아 가루? 혹시 아이스티 분말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요. 감자칩이나 팝콘에 뿌려먹으면 맛있는 양념가루에요. 구하기 힘들어서 아꼈던 건데, 후배님과 함께 먹으려고 제가 특별히 갖고 왔어요.”

세상에 그딴 양념가루도 존재했어?

복숭아 아이스크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사악한 맛이 날 것 같지만... 날 위해서 가져와줬다니까 별 수 있나.

죽어도 먹기 싫은데 먹어야지.

상영시간이 촉박하게 남아있었기에, 우린 팝콘과 음료를 사자마자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음료는 당연히... 복숭아 아이스티였다.

빨리 치나미를 정상적인 입맛으로 타락시키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이러다간 복숭아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야.

치나미를 가장 구석에 앉힌 나는, 그녀가 크로스백에서 [복숭아 폭탄!] 이라고 쓰여 있는 포장지를 꺼내자 흠칫했다.

이름이 너무 흉악하잖아.

“그게 그 복숭아 가루인가요?”

“네. 기대되시지요? 후배님도 한 번 맛보시면 빠져들 거예요.”

영화에서 물뽕 같은 걸로 여자를 유혹하는 악당이나 할 법한 대사를 친 치나미.

포장지를 뜯은 그녀는 곧 팝콘에 가루를 솔솔 뿌렸고, 팝콘 통을 흔들더니 내게 팝콘 하나를 집어 내밀었다.

“한 번 맛봐보세요.”

가루가 가장 많이 묻어있는 팝콘.

애써 두려운 마음을 감춘 나는, 그것을 받아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오...?’

입 안에 확 풍기는 감미로운 맛에 눈을 크게 떴다.

기대 같은 건 단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팝콘 특유의 고소함과 저 가루의 달짝지근한 맛이 정말 잘 어울렸다.

대체 이게 어떻게 맛있을 수가 있는 거지?

“어떠신가요?”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치나미.

나는 팝콘을 하나 더 집어먹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치나미가 입가를 쓰윽 올리며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훗후...”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하는데...

이러다 오히려 내가 타락해서, 복숭아 가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짖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정신 차려야지.

팝콘을 또 하나 먹은 나는 엉덩이를 달싹이며 은근슬쩍 치나미에게 붙었다.

우리 가운데를 막은 팔걸이에 허리가 닿을 정도로 말이다.

“엇...?”

이런 날 본 치나미가 움찔했다.

거리가 너무 가깝다고 생각한 듯한 모습.

치나미의 반응을 살핀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휴지를 한 장 가져왔다.

“마, 말씀을 하셨다면 제가 드렸을 텐데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날 나무라는 그녀.

태연하게 손을 닦아낸 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이 너무 편해서요.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겠습니다.”

“흠... 꼭 그런 건 아니구요... 흠흠...”

분위기가 야들야들해진다.

꼭 이런 식으로 은근한 스킨십을 시도하면 공기가 확 말랑해진다는 말이지.

영화를 보면서 목을 만질 기회가 있을까?

지금 치나미를 보니까 바짝 긴장해있는 것 같은데, 어깨에 힘을 푸는 순간 풀어주는 척하면서 살며시 건드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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