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90화 (90/313)

보세 옷가게가 늘어서있는 거리.

치나미가 알려준 곳에 차를 댄 나는 비상등을 켰다.

“여긴가요?”

“네에...”

“이노오 선배는 안 보이는데.”

“약속시간까지 15분 남아서 그래요... 5분 뒤에 올 거예요...”

“그럼 선배가 올 때까지 잠깐 있을까요? 혼자 기다리는 거 심심하잖아요.”

“아니요... 혼자 기다려도 돼요...”

앗! 저도 마침 같은 생각을 했어요...!

같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너 자꾸 서운하게 할래?

“그냥 같이 기다려요. 걱정돼서 혼자 못 보내겠어요.”

“걱정...?”

“그새 사기 같은 걸 당할까봐.”

“지, 지금은 중고거래를 하는 시간이 아닌데요...”

“비도 오고 있으니까 제 말대로 해요.”

“네에...”

꼼지락꼼지락, 손을 가만두지 못하는 치나미.

푹 수그린 얼굴 옆으로 도톰한 뺨이 뽈록 튀어나와있는데, 오늘따라 특출나게 귀여워 보인다.

“스승님은 어떤 종류의 옷을 좋아하나요? 귀여운 거?”

“으음... 보통은 분홍색을 좋아하지만... 제 머리가 분홍색이라서 웬만하면 다양한 색을 고르는 편이긴 해요...”

렌카와 치나미가 옷을 고르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뭔가 웃겼다.

서로 취향이 전혀 다를 텐데... 잘 맞는 것도 신기하고.

“저번에 백화점에서 입었던 옷들이 잘 어울리던데요.”

“그런가요...?”

“예. 귀여우면서 성숙해 보이는 코디였어요. 이러면 너무 오지랖인가?”

“아, 아뇨! 오지랖 아니에요...”

손사래를 친 치나미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저번에 귀엽다고 칭찬했을 땐 몸 둘 바를 몰라 하더니, 성숙해 보인다는 말을 곁들여주니까 좋아하네.

실소를 터뜨린 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줄기차게 쏟아지던 빗줄기는 기세가 죽어 가랑비로 변한 상태.

운치가 있어서, 물웅덩이만 없다면 산책을 가기에 딱 좋을 것 같다.

별로 없는 인파 사이에서 누군가가 보인다.

훤칠한 키, 그리고 호리호리한 몸매의 여자.

한눈에 봐도 렌카임을 딱 알 수 있을 정도로, 옷차림이 섹시하다.

치나미가 말한 대로 정확히 10분을 남겨놓고 도착했구나.

우산을 쓴 채 나와 치나미가 탄 차 근처까지 다가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녀.

잠깐 그녀가 입은 옷을 감상하고 있던 내가 조용히 말했다.

“이노오 선배가 도착했네요.”

“어디요?”

“저기.”

렌카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자, 그녀를 발견한 치나미가 반색했다.

모모님 담요를 고이 접은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면...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또 만나요.”

“앗...! 네...! 다음엔 더 재미있게 놀아요...!”

“그래요.”

덜컥.

조수석 문을 열고 우산을 펴더니 다시 한 번 인사를 하는 치나미.

그녀에게 한손을 흔든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창문을 약간 열고 가까이 있는 렌카를 살폈다.

“치나미...?”

차에서 내리는 치나미를 본 그녀의 고개가 갸웃거리고 있다.

일순 내 차를 못 알아보는 것 같은 모습.

그러나 이내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의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긴다.

“마츠다...? 너 마츠다지?”

설마 치나미가 내 차에서 내릴 줄은 몰랐지?

운전석 창문을 전부 내린 나는, 렌카에게 히죽거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부장.”

그리고는 벙 찐 그녀의 옆에 있는 치나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옷 예쁜 거 많이 사세요, 스승님.”

“네...! 뭘 샀는지 사진 찍어서 보내드릴까요?”

환상적인 어시스트다.

고마워, 치나미.

“그것도 괜찮겠네요.”

“알겠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헤실거리며 손을 흔드는 치나미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준 나는 곧바로 악셀을 밟았다.

“야...! 야!”

렌카의 우렁찬 목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오다가 희미해진다.

깜짝 놀라는 치나미가 사이드 미러를 통해 보이는데,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눌지 정말 궁금해진다.

@@

“.... 둘이서 영화를 봤다고?”

“네.”

눈을 동글동글하게 뜬 치나미의 순진한 대답.

커피를 홀짝인 렌카가 재차 물었다.

“둘이서? 아예 따로 만나서 본 거야?”

“네. 왜요?”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건데?”

“원래 친했어요. 사제지간이고, 같이 매니저 일을 하다보면 가까워질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 않나요?”

“아니 뭐... 그렇긴 한데... 그냥 영화만 봤어?”

“영화가 끝나고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디저트를 먹었어요.”

“그래...? 마츠다가 막... 너한테 이상하게 굴고 그랬던 적은 없지?”

치나미의 고개가 15도 각도로 꺾였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듯한 행동.

잠깐 그러고 있던 그녀가 반문했다.

“이상하게 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가요?”

“막 널 유혹하는 것 같은...”

“유혹이요...? 어떤 식으로요?”

렌카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연애경험이 전무하다보니, 상세히 묘사를 하기가 조금 힘들다.

“느낌... 뭐 이런 거...”

“느낌...? 으으음... 뭔가 유혹한다는 느낌은 딱히 받지 못했는데요... 마츠다 후배님은 평소와 같았어요. 아니다, 오늘따라 더욱 친절한 것 같긴 했어요.”

“그래...! 그거...! 어떤 식으로 친절했는데?”

“네에에...? 그걸 말씀드려야 하나요...?”

치나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자신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며 부끄러워하는데, 뭔가 있구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참아낸 렌카가 치나미를 살살 달랬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말해줄 수도 있잖아. 그치?”

“그, 그럼요... 저희 사이에 이 정도는 가볍게 말할 수 있을 정도지요... 사실은... 오늘 아주 많은 안마를 받았답니다.”

“안마...?”

“네. 제가 영화를 보느라 긴장하고 있었는데요... 마츠다 후배님께서 많이 풀어주셨어요.”

“영화를 보는데 긴장을 한다고...? 공포영화였어?”

“아니요. 액션영화인데, 친우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액션영화에 집중을 잘하는 편이잖아요. 액션 장면을 두 눈에 자세히 담아두고 싶어서 온몸에 힘을 주었더니...”

어색한 듯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이는 치나미를 쳐다보던 렌카는, 지금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굴고 있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처음엔 음흉한 마츠다가 순진한 치나미를 어떻게 해보려고 이용해먹는 줄 알았는데, 어깨 안마?

안마 정도라면 뭐... 그냥 넘어가도 될 일 아니던가?

저렇게 얼굴을 붉히는 치나미가 의심스럽지만, 그녀는 원래 부끄럼을 잘 탔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저번에 대련이 끝나고 마츠다를 나무랐을 때, 자신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그가 치나미의 말은 잘 들었었다.

그걸 상기해보면 마츠다가 치나미를 스승으로서 잘 따르는 것 같긴 하고...

치나미 또한 그와 더욱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래서 함께 영화를 봤으리라.

오늘 여기까지 태워다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껄끄럽게 생각하는 렌카 자신에게마저도 호의를 베풀어 집까지 데려다줬었으니까.

그때 우연히 마주쳤을 당시 얼마나 초조했는지...

다시 상상하니 또 심장이 벌렁거리려 한다.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남자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던 치나미가 지금 나름 태연하게 구는 걸 보면, 그녀도 마츠다를 꽤나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번에 중고사기 때도 도와준 전적이 있으니... 그때 서로 많이 가까워졌겠지.

‘그래도...’

미심쩍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느낌이 쎄하기는 하다.

두 사람이 잘 되지 않길 바라는 건 절대 아니지만...

치나미에게 살갑게 구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마츠다라서 불안하다.

“렌카 친우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온갖 걱정거리를 안고 있던 렌카는, 치나미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런데... 치나미.”

“네?”

“혹시 내가 이런 식으로 참견하는 게 귀찮지는 않아?”

“아니요...? 절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왜 귀찮아하나요? 참견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럼 다행이지만...”

“친우님께서는 걱정거리가 무척 많으시네요. 자, 커피 한 잔 시원하게 드시고 저희 옷 사러 갈까요?”

“그래... 그러자.”

일단은 놔둬보자.

마츠다도 요새 평가가 좋고, 치나미는 자신에게 솔직하니까, 큰일이 터질 것 같으면 그녀가 먼저 말을 해올 것이다.

**

우웅-! 우우웅-!

미유키와 간단하게 통화를 하고 일찍 자려던 나는, 머리맡에서 진동이 계속 울려대자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쇼핑을 끝내고 돌아왔는지, 치나미가 사진을 마구 보내고 있었다.

옷은 물론이고 신발까지... 어지간히도 샀네.

힘없는 웃음을 지은 나는 화면을 두드렸다.

[많이 샀네요?]

[사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어떤가요?]

[전부 어울릴 것 같지만, 샌들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스승님은 발 사이즈 자체는 작지만, 발가락이 길쭉해서 맨발을 드러내는 게 예쁘거든요.]

[앗, 그런가요?]

[예. 근데 이노오 선배가 옷 사진을 보내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요?]

[아뇨. 딱히 그런 얘기는 안 했어요.]

웬일이지? 노발대발하면서 막을 것 같았는데.

[그래요?]

[네. 그런데 후배님과 렌카는 사이가 별로인 건가요?]

[왜요? 이노오 선배가 뭐라고 했나요?]

[아니요. 아까 제가 후배님의 차에서 내릴 때, 렌카가 화를 낸 것 같아서... 혹시 다투셨나 해서요.]

[다툰 건 아니지만 물과 기름 같긴 하죠. 저로서는 절 맨날 타박하는 선배를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요.]

[어허...! 그렇게 생각해선 안 돼요. 렌카는 후배님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려고 쓴소리를 하는 것뿐이랍니다.]

[저는 부장이 아니라 스승님이 절 인도해줬으면 좋겠는데요.]

[물론 그렇게 할 거지만, 저는 제 소중한 제자가 렌카의 말도 잘 들었으면 좋겠어요.]

차에선 말도 제대로 못했으면서, 지금은 늠름하네.

그나저나 우리 치나미... 이제는 나한테 소중하다는 형용사까지 붙여주는 거야?

제자는 감동했어요. 조만간 상을 드려야겠네요.

하지만 그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어요.

내가 렌카의 말을 잘 들어야할 게 아니라, 렌카가 내 말을 잘 들어야한답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역시 제 제자는 참 착한 사람이에요. 저는 몸이 매우 피곤하므로, 이제 씻고 자려고 해요.]

[자기 전에 사진 보내줄래요? 모모님 잠옷을 입은 스승님이 보고 싶어요.]

[제게 모모님 잠옷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나요?]

[모모님을 그렇게나 좋아하는데, 모를 수가 없지 않나요?]

[날카로우시군요. 훗후. 알겠어요.]

대화를 마친 나는 기분 좋은 마음으로 치나미의 잠옷샷을 기다리려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럴 게 아니라 연습하자, 연습.

렌카의 콧대를 눌러주고 조교시키기 위해서라도 실력을 키워놓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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