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요 상사의 제품들은 대부분 일정수준의 품질을 보장해요. 검도 용품을 30년 이상 만들어서 신뢰도도 높고, 가격도 저렴해서 첫 호구를 구매하시는 분들이 많이 찾죠.”
렌카가 해줬던 설명을 거의 똑같이 하는 치나미.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나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군요.”
“제 첫 호구도 이 후요 상사의 제품이었어요. 다만 단점이 하나 있는데...”
“단점이 뭔가요?”
“잠시만요... 헤엑... 헤에엑...!”
호구를 만지작거리던 치나미가 돌연 자신의 코끝을 손으로 쓰윽 훑더니, 눈을 감고 입을 벌었다 닫았다 했다.
자그마한 콧망울이 벌름거리는 것이, 재채기가 나올 것 같다.
손을 파닥거리면서 백을 뒤적거린 그녀는,
“흐이엣취...!”
티슈를 꺼내 입을 가리자마자 깜찍한 재채기를 했다.
“후음... 죄송해요...”
코를 쓱쓱 닦아낸 그녀의 사과.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인 내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사람이 재채기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죠. 그런데...”
곤란해 하고 있는 치나미를 보던 나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코끝이 파랬던 것이다.
새 호구의 염료가 묻어있던 손으로 코를 만졌기 때문이었다.
“후요 상사가 만드는 제품의 단점을 알겠습니다. 염료가 번지는 거죠?”
“앗... 맞아요...! 어떻게 아셨나요?”
“스승님의 손이 파랗잖아요.”
그 말마따나 치나미의 손은 좀비처럼 창백했다.
큼지막한 눈망울을 굴리며 자신의 손을 살핀 그녀가 입맛을 찹찹 다셨다.
“전시품이어서 염료가 다 빠졌을 줄 알았는데... 제 불찰이에요.”
“착용하면 얼굴이 파래질 것 같네요.”
“맞아요...! 저도 처음 이 호구를 착용했을 때, 얼굴 양옆이 새파래졌었어요.”
“다른 제품에 비해 더 많이 묻어나오는 느낌이 있어요.”
“정확해요. 그래도 청소를 꼼꼼히 하면 괜찮답니다. 앗...! 가방에도 염료가 조금 묻어버렸군요...!”
치나미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모모님 크로스백이 물들어서 안타까운 모양.
헛웃음을 친 나는 치나미를 대신해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녀의 코끝을 살살 닦아내주기 시작했다.
“엇...!?”
“가만히 계세요.”
“네, 넷...”
당혹스러워한 치나미의 두 눈이 무척 빠르게 끔벅거려졌다.
고개를 완전히 치켜든 채로 날 올려다보는 모습이 까무러칠 정도로 귀엽다.
저 말랑해 보이는 턱을 긁어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 나는, 코끝에 묻은 염료를 지운 뒤 새 물티슈를 꺼냈다.
이후 그것을 펼쳐 치나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감싸고 조심조심 닦아내었다.
“다행히 염료가 곧바로 착색되는 건 아니네요. 금방 닦일 듯합니다.”
“네에에...”
내게 손목을 잡힌 채로 몸을 이리저리 꼬는 그녀.
뺨도 그렇고, 코도 그렇고, 지금 이 손도 그렇고...
치나미의 몸은 전체적으로 말랑말랑했다.
겨울에 미유키와 함께 껴안으면 기분이 무척 좋을 것 같다.
“후요의 제품으로 구매하는 게 나을까요?”
“아, 아니요... 다른 것들도 다 정성껏 둘러본 뒤에, 후배님에게 딱 맞는 호구를 골라드릴 거예요...”
“그렇게까지 정성을 쏟을 필요까진 없는데요.”
“어허...! 호구는 한 번 구입하면 오래 사용하는 장비에요...! 대충 고르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실 게 뻔해요...!”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위엄을 보이려 하는데, 확 안아주고 싶다.
그럼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진다.
“알겠습니다. 얌전히 따를게요.”
“네...! 고마워요...!”
**
“여기 이 호면 뒤쪽에 바느질이 된 부분을 후동이라고 해요. 이곳을 사선으로, 비스듬히 접으면 포단이 무척 예쁘게 떨어져요. 자, 한 번 보세요.”
눈앞에 새로 구입한 호면을 들어 보이는 치나미.
호면의 날개가 꽤 멋들어지게 접힌 것을 본 내가 심심한 감상평을 전했다.
“예쁘네요.”
“그렇죠? 여기서 후배님의 어깨라인에 따라 각도를 조금 틀어야할지도 모르니까, 한 번 착용해볼까요?”
“예.”
가게에 마련된 의자에 앉자, 치나미가 크흠 하며 목을 가다듬더니 다가와서 호면을 씌워주었다.
그리고는 뒤에 있는 면끈을 다소 강하게 조였다.
이거 렌카가 했던 짓 아닌가?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라고 생각할 때쯤, 치나미가 호면 윗부분을 콩콩 두드려보더니 물었다.
“조이는 느낌이 어떠신가요?”
조이는 느낌이라... 말이 야한데.
“턱이랑 귀가 아픕니다. 시착했을 때처럼 한 치수 정도 작은 것 같아요.”
“인내하세요. 잘 길들여놓으면 편해질 거예요. 갑상 같은 경우도 호면처럼 끈을 꽉 조여주시는 게 좋답니다. 내일 부실로 호구를 갖고 오세요. 수련용, 시합용 모두 다요.”
“수련용은 집에 놔두고 따로 연습을 하고 싶은데요.”
“호구를 착용하는 방법도 모르시잖아요. 제대로 착용하기 전까지는 제가 봐드릴 거예요. 그리고 호구는 부실의 보관실 안에서 관리하는 게 더 편해요.”
“그건 그렇긴 하죠. 알겠습니다. 이제 죽도를 고르러 갈까요?”
“네...! 훌륭한 죽도를 골라드리겠어요...!”
예전에도 생각했었지만, 치나미는 검도 이야기를 하면 긴장감이 확 사라진다.
아까 보여주었던 숙녀 같은 모습도 없어진지 오래.
천생 검도인이구나. 의욕을 불태우는 게 보기 좋다.
하지만 치나미는 부끄부끄가 더 어울린다.
다시 그렇게 만들어줘야지.
“그 전에 손부터 주세요.”
“손이요?”
“염료가 조금 묻었잖아요. 그 손으로 죽도를 만지면 병혁이 파래질 겁니다. 닦아줄게요.”
“.... 제가 할 수 있는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치나미는 내가 내민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속이 빤히 보이는 그녀의 행동에 실소를 터뜨린 나는 물티슈를 꺼냈다.
이후 치나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닦아주었다.
“스승님은 손이 너무 예뻐서, 자주 만지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그런가요...? 후, 후배님의 손도 멋져요... 커서 듬직해요... 곰 같아요...”
치나미다운 감상평에 가벼운 코웃음을 내뱉은 나는, 그녀의 복숭아색으로 칠해진 손톱을 매끈하게 닦아내었다.
이후 치나미의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염료가 다 닦였는지 확인해본 후,
꾸욱...
그녀의 손목 안쪽부터 팔뚝까지 엄지로 약하게 누르면서 가벼운 마사지를 해나갔다.
“.....”
치나미의 눈이 옆으로 스으윽 굴러가 계산대를 쳐다보는 것이 보인다.
방금까지만 해도 늙수그레한 사장이 자리했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가게 안도 우리 외엔 없는 상태였다.
“공교롭게도 저희 둘밖에 없네요.”
“.... 그, 그러네요... 저희 이제 죽도를... 므앗...!”
치나미가 말을 하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내가 그녀의 옷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었기 때문이었다.
뽀얗고 얇은 팔목. 그곳을 방금처럼 꾸욱 꾹 눌러주자,
“후으...”
치나미의 입에서부터 후끈한 숨결이 새어나왔다.
온몸을 바늘에 찔린 지렁이마냥 꿈틀거리는데, 점점 반응이 좋아지고 있다.
예전에 비해 빼려는 기색도 없고... 아주 좋다.
짓궂은 웃음을 지은 나는, 치나미의 몸이 잦아들자 진중한 투로 물었다.
“저는 스승님을 마사지해주는 게 정말 기쁘고 보람찬데. 스승님께서는 혹시 제가 이런 걸 해주는 게 싫은가요?”
그에 치나미가 콧바람을 후욱 내뿜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 후배님은 절 위해서 마사지를 배우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싫지 않아요...”
“저번엔 분명 그만하라고 화를 내지 않았었나요?”
“제, 제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러시나요...! 그저 간지럼을 타서 그런 것뿐이에요...! 절대 싫은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런 거였어요?”
“네...! 그런 거예요...”
그러면 앞으로 자주 해줘도 되겠네?
“이 제자, 스승님의 하해보다도 넓은 이해심에 탄복했습니다. 조만간 제가 연마한 기술을 스승님께 보여드리고 싶네요. 스승님도 좋죠?”
“무, 물론이지요...!”
대답을 들은 나는 마사지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듯 쓰다듬었다.
“므힉...!”
쭈욱 치켜 올라가는 치나미의 어깨.
손길에 적응은 조금 했지만 반응은 여전히 허접하구나.
우리 치나미... 날짜 잡는다?
내가 진짜 기분 좋아지게 해줄게.
**
지하철은 정말 오랜만에 타보는 것 같다.
미유키의 치한 이벤트가 일어난 칸인데... 감회도 새롭다.
만원까진 아니지만 꽤나 들어차있는 인파 속에서 하품을 하고 있는데,
우웅!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자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마츠다 군, 벌써 도착했어? 주차장에 차가 없던데.]
걱정이 담겨있는 미유키의 메시지는, 내가 학교에 다 와갈수록 점점 격앙되어갔다.
[마츠다 군, 지각하는 건 아니지?]
[교실에 왜 없지?]
[왜 읽었는데 답장을 안 해?]
[5분 남았어. 지각하기만 해봐. 그냥 안 넘어가.]
[장난해...? 설마 땡땡이치려는 거야?]
[각오해.]
메시지가 새로 도착할 때마다, 미유키의 분노 게이지가 그라데이션으로 높아지는 게 느껴진다.
어느새 아카데미의 정문 앞까지 도착한 나는, 팔짱을 낀 미유키가 멀찍이서 우두커니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빛이 흉흉하구나. 화가 많이 난 듯하다.
나는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기며 미유키에게 한손을 들어올렸다.
“수고가 많네. 들어간다.”
이후 정문을 그냥 통과하려고 했다.
그리고 능청스런 내 태도에 눈썹을 꿈틀한 미유키는, 당연히 날 붙잡았다.
“지각했잖아. 벌점이야.”
“고작 2분만 늦은 건데, 유도리 있게 좀 넘어가주라. 시간 딱 맞춰서 출발했는데 전철이 늦게 도착한 걸 어쩌라고?”
“그건 변명거리가 안 돼. 마츠다 군이 3분만 더 일찍 나왔으면 늦지 않았을 거야.”
“늦은 이유가 있었어.”
“한 번 얘기해봐. 들어나 보게.”
“자동차가 고장났어. 시동이 안 걸려.”
“.... 정말?”
“어. 그래서 전철 타고 온 거야.”
미심쩍은 눈초리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미유키.
전혀 믿지 못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진짜야?”
“진짜라니까. 이제 가도 되지?”
“가긴 어딜 가. 이름 적고 가.”
“이름?”
“벌점 받아야지. 아니면 내가 대신 적어줄까?”
“그렇게 날 괴롭히고 싶어?”
“괴롭히는 게 아니라 교칙이잖아. 지켜야지.”
“나 퇴학당하는데?”
미유키가 황당한 웃음을 터뜨렸다.
“퇴학은 무슨... 벌점 몇 점 쌓인 거 가지고 그렇게까지 가진 않아. 마츠다 군의 벌점 기록을 보니까 아직 아슬아슬하게 여유 있어.”
“그런 것까지 마음대로 볼 수 있어? 학생회가 아니라 독재집단이네.”
언성을 약간 높이며 따지듯 말하자, 미유키가 조금 떨어져있는 학생회 선배의 눈치를 보았다.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그저 지루한 듯 하품을 하고 있는 안경잡이 선배.
그런 그녀를 곁눈질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미유키가 날 쏘아보았다.
“유치하게 왜 이러는 건데...! 초등학생이야?”
“좋아해, 미유키.”
감미로운 목소리로 하는 갑작스런 고백에, 미유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그녀가 말했다.
“그런 사탕발림으로 넘어갈 생각하지 마...”
“네 얼굴 보니까 갑자기 말하고 싶었어.”
“안 통해...”
“소리라도 지를까?”
“무슨...! 장난해...?”
“장난 같아?”
오늘따라 건들거리는 태도와, 유착관계를 이용해 벌점을 피하려고 하는 행동에 훈계라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을까?
“여기서 딱 기다려... 그냥 가면 진짜 혼날 줄 알아. 나도 장난하는 거 아니야.”
검지를 들어올린 미유키가 정색을 하며 날 대기시켜놓더니, 학생회 선배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을 했다.
이후 다시 돌아와 내 손목을 붙잡고, 한산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체육관 방향으로 성큼성큼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 이런 19금용 럽코 클리셰... 너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