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조심조심 미닫이문을 민 나는, 수업을 진행하던 교수가 말을 멈추고 내 쪽을 돌아보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결석계는 교무실에 제출했어요.”
“.... 웬일로 땡땡이를 치나 했더니, 오긴 왔구나. 어서 앉아라.”
원래라면 웬일로 수업에 들어오냐고 묻는 게 정상인데.
반전이 된 평가를 교수의 입에서 직접 들어보니 감회가 새롭다.
고개를 까딱하며 교수에게 사과를 하고 교실로 들어온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있는 미유키를 보았다.
교실 뒤를 가로질러가며 테츠야의 등을 툭 쳐주고 자리에 앉자, 미유키가 노트에 써놓았던 글을 내게 보여주었다.
[잘했어.]
시간차를 두고 들어오라는 자신의 말을 순순히 들어서 칭찬을 하는 것 같다.
작게 코웃음을 친 나는 앞자리에 앉아있는 빵녀와 눈인사를 하고 책을 폈다.
한 칸 띄워져있는 옆자리를 흘끗 보니, 테츠야가 눈을 교과서에 내리깐 채로 내 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자두 향이 짙지?
미유키가 자주 쓰는 바디워시를 써서 그래.
툭. 툭.
테츠야를 어떻게 능욕할지 고민해보던 나는, 미유키가 내 팔을 툭툭 건드리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노트 끄트머리에 글을 쓰고 있었다.
언제 봐도 예쁜 필체로 [수업에 집중해]라는 글을.
나는 의자를 책상에 거의 붙이다시피 하고, 미유키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미유키가 방금 자신이 쓴 문장 밑에 새로운 글을 썼다.
[오늘은 그만해. 더 이상 하려고 하면 혼낼 거야. 진심으로.]
글자에서 냉기가 풀풀 느껴지는 것 같다.
입맛을 다신 나는 얌전히 양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지루한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이 되자, 미유키가 부반장과 함께 무슨 대화를 나누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누가 보지 못하게 내 뒷목을 쓰다듬으며 교실 밖으로 나가는 그녀.
슬슬 남들이 있는 곳에서도 애정표현을 하기 시작하는데, 아주 좋다.
“마츠다.”
빵녀에게 말을 걸려고 하던 내게 다가온 테츠야의 부름.
놈을 쳐다보며 턱짓한 내가 대답했다.
“뭐.”
“혹시... 바디워시 뭐 써?”
이걸 물어본다고? 에둘러 말하긴 했지만 의외다.
평소엔 모른 척을 했을 텐데, 오늘은 그냥 넘어가기가 껄끄러웠던 모양이다.
의자를 뒤로 빼고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은 나는, 뒤통수에 깍지 낀 손을 대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미유키가 사라는 거.”
“그 히카리노시오 회사 거?”
“회사 이름은 모르겠다.”
“맞을 거야. 나도 미유키가 추천해준 걸로 쓰거든.”
조금 밝아진 얼굴색으로 꺼드럭거리는 테츠야.
나 또한 미유키가 추천을 해준 바디워시를 사용한 것으로 착각한 듯했다.
속으로 놈을 한껏 비웃어준 내가 말했다.
“요즘 검도는 잘 되냐?”
“검도가 뭔지 이해하기 시작한 정도야.”
“멋있네. 열심히 해라.”
“너도. 그나저나 미유키가 아파서 큰일이야. 분명 오늘 만나서 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갑자기 몸살 기운이라도 올라온 건가?”
둘이 만나서 등교했어?
네 병신 같은 대화실력에 미유키가 무척 심심해했겠다.
“글쎄. 2교시 땐 괜찮아보였는데.”
“그래...?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갈근탕이라도 사러 가야겠다.”
놈은 곧 지갑을 챙기고 교실을 나섰다.
저 저 눈치없는 새끼.
미유키와 무척 가까운 모습을 보여줘야 좀 떨어지려나?
수학여행 날짜가 언제였더라.
**
“하아암...”
날 등진 채로 깊은 하품을 하는 치나미.
양팔을 하늘로 쭉 올려 기지개까지 켜는 모습이 귀엽다.
보관실 바닥을 빗자루질하던 나는, 치나미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콕콕 찔렀다.
“믕앗!?”
그러자 치나미가 양팔을 올린 상태 그대로 움찔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왜요? 바닥 청소가 끝나셨나요?”
“아뇨. 하품을 조금 강하게 하길래.”
나는 빗자루를 구석 한켠에 세워놓고, 치나미의 양팔을 잡고 아래로 내려주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어제 늦게까지 안 잤어요?”
“모모님과 관련된 굿즈를 찾아보느라 새벽에 잠이 들고 말았네요.”
“그 한정판 인형?”
“아뇨. 딴 거예요.”
“또 중고 사이트를 찾아본 겁니까?”
“네. 만약 거래를 하게 되면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우리 착한 치나미...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물론 도와드릴 수 있죠.”
“고맙습니다, 후배님. 후배님은 참 의지가 되는 분이에요.”
“스승님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사탕발린 말이 기쁜 듯 배시시 웃는 그녀.
그런 치나미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시선을 맞춘 나는, 그녀의 온 얼굴을 낱낱이 살폈다.
“무, 무얼 하시는 건가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품에 확 끌어안고 싶어진다.
그 충동을 삼킨 내가 말했다.
“지금 보니 눈 밑이 퀭하긴 하네요. 어제 몇 시에 잠들었습니까?”
“네 시요...”
“네 시? 늦어도 너무 늦은 거 아닌가요?”
“.... 모모님 굿즈를 얻으려면 그 정도는 기본인데에...”
“눈이 변색된 복숭아 같아요.”
“네에에...?”
치나미의 눈이 큼지막하게 뜨였다.
복숭아로 비유를 하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은 표정을 짓는구나.
자신의 눈가를 만지작거린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 정도로 심각한가요...?”
“가만 놔두면 그렇게 될 것 같다는 뜻입니다.”
“잠깐 탈의실에 다녀와야겠어요...”
화장품으로 가릴 생각인가보다.
어허. 알맞게 익은 유기농 복숭아에 화장품이라는 농약을 치면 안 되지.
소비자 기만이야. 이건 내가 해결해줄게.
“제가 풀어드리겠습니다.”
치나미의 눈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보관실 문의 문고리, 호구 진열대, 죽도 보관함...
그것들을 차례대로 쳐다본 그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내 얼굴이었다.
“어떻게요...?”
“가만히 있으세요.”
말을 마친 나는 치나미의 자그마한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엄지로 그녀의 눈 밑을 어루만지듯 마사지했다.
뜬금없는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란 치나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후, 후배님...!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요...!?”
모기만도 못한 목소리로 따지고 드는 그녀.
잠자코 눈 밑을 만져주던 내가 조곤조곤 말했다.
“풀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예습 같은 거라고 생각해주면 정말 고마울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예습... 이요...?”
“저한테 마사지 받기로 했잖아요. 간단하게 얼굴 마사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 거기에 얼굴 마사지도 포함이 되어있는 건가요...?”
“그럼요. 지압은 어때요?”
“우음... 조, 조금 강한 것 같은데...”
“이 정도는 괜찮아요?”
“앗...! 네... 음... 적당해요...”
순식간에 내게 휘둘려버리게 된 치나미의 표정은, 눈 밑을 만져주면 만져줄수록 늘어졌다.
부릅뜬 눈이 서서히 풀리는 걸 보니 기분이 슬슬 좋아지고 있나보다.
“피부가 정말 깨끗하네요.”
이마와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던 내 칭찬에, 치나미의 뺨에 홍조가 감돌았다.
“후, 후배닝 피붕도 좋앙요...”
내 손바닥에 의해 뺨이 눌려 혀가 꼬여버린 치나미의 말.
붕어처럼 튀어나와 달싹거리는 입술이 웃기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다.
사람이 왜 이리 귀엽게 생겼냐.
도키아카를 플레이할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실제로 보면 볼수록 그 마음이 더 강해진다.
끔벅, 끔벅.
치나미의 눈꺼풀이 푸들거리다가, 닫혔다 뜨이길 반복했다.
몸은 미세한 떨림을 발하며 좌우로 흔들렸는데, 조용한 보관실 안에서 아무런 말없이 마사지를 받다보니 수마가 찾아온 듯했다.
아무리 잠을 못 잤다고 해도 그렇지, 서있는 상태에서 저러는 사람은 처음 본다.
과연 치나미답다고 해야 하나? 엉뚱하고 신기하다.
“편해요?”
“후배님 손... 따뜻해요...”
“다행이네요. 지금 많이 졸려요?”
“네엥...”
반쯤 감긴 눈썹이 파리하게 떨리고 있다.
원래는 얼굴 마사지부터 시작해서 몸을 만지려고 했는데, 곧 눈을 감을 것처럼 헤롱거리는 모습을 보니 해봤자 소용이 없을 듯싶었다.
어딜 만지든 그냥 깊게 잘 것 같아.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치나미의 얼굴에 손을 댄 그대로, 뒷걸음질을 치며 그녀를 살살 잡아당겼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스슥, 스슥 발을 끌며 날 따라오는 게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보인다.
조심스럽게 치나미를 데리고 보관실 구석으로 간 나는, 마사지를 그만두고 그녀의 옆에 섰다.
그리고는 그녀가 의문 섞인 눈으로 날 올려다보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앉아 봐요.”
“우응...”
졸음에 잔뜩 취한 탄성을 터뜨린 치나미가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등을 벽에 붙인 나름 편안한 자세.
치나미의 옆에 주저앉은 나는,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끌어왔다.
“어엇...?”
나는 힘없는 감탄사를 뱉어내며 당혹스러워하는 그녀의 팔을 일정한 리듬으로 두드렸다.
그녀가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게끔 말이다.
이런 의도가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치나미의 몸에 힘이 완전히 빠졌다.
나는 내 옆에 찰싹 달라붙다시피 한 그녀에게 나긋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눈 좀 붙여요.”
“안 되는데요... 해야 할 일이 많은데요...”
“중요한 일은 다 끝내놨잖아요. 잠깐 잤다가 마무리하면 되죠.”
“.... 그렇긴 한데요...”
“우리 스승님, 착하죠? 말 들어요. 한숨 푹 자는 겁니다.”
“그러엄... 조금만...”
“그래요. 조금만 자요. 어깨에 머리 기대고.”
“네에엥...”
콧소리가 섞인 대답을 한 치나미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평소였다면 잔뜩 부끄러워하며 거절했을 텐데 이러는 걸 보면, 수면욕이 이성을 완전히 덮어씌웠나보다.
그녀의 코에선 곧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경계심 따윈 날려버리고 잠에 빠져버린 치나미를 슬쩍 살핀 나는, 그녀의 코를 건드려볼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보관실 창문에서 찬바람이 들이닥치고, 그 냉기를 느낀 치나미가 내 옆에 더욱 밀착할 때쯤,
똑똑.
문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덜컥-!
보관실 문이 제법 힘 있게 열렸다.
“치나미, 오늘 졸려 보이길래 커피 사왔...”
들어온 사람은 렌카였다.
한손에 캔커피 두 개를 들고 문을 연 그녀는, 잠들어있는 치나미를 발견하더니 입을 떡 벌렸다.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동공.
나와 함께 붙어있는 모습이 많이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치나미와 내 포즈는 누가 봐도 애정이 넘치는 커플처럼 보일 테니까.
“너 지금 뭐하는...”
나는 렌카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정색을 하며 입술에 검지를 올려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렌카가 자신의 입술을 안으로 오므렸다.
“.....”
순간적으로 내 기세에 눌려버린 그녀의 눈썹이 구겨졌다.
자존심이 상한 듯한 표정.
그녀에게 히죽거린 내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용건 있으면 나중에 해요.”
렌카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왜 그렇게 가까이 달라붙어선 자고 있느냐며 따지고 싶지만, 치나미가 곤히 자고 있어 참고 있는 듯했다.
“소음 들어오니까 문 닫아줄래요?”
이어지는 내 말에 움찔하는 렌카.
복잡한 눈으로 나와 치나미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는, 일단은 물러나기로 생각한 듯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