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난 치나미의 한쪽 눈은 감겨있었다.
나머지 한쪽 눈은 반 정도 뜨인 상태.
입맛까지 찹찹 다시는 걸 보니, 입을 조금 벌린 채로 자느라 안이 마른 모양이었다.
“스승님.”
자신의 목을 긁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치나미를 부르자, 그녀가 부스스한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므응...?”
“잠깐 여기 계세요. 물 갖고 올게요.”
“네에...”
머리를 벽에 기대고 흐느적흐느적 늘어지는 치나미.
지금 몸을 누르면 푸딩처럼 쏙 들어갈 것 같다.
그러한 욕심을 참아낸 나는 보관실을 나왔다.
부실은 시끄러웠다. 각자 다양한 기합을 내지르며 호구를 입힌 마네킹에 머리치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하아앗!”
쩌억-!
“하아압!”
쩌억! 쩍!
구석에서 마네킹의 머리를 갈겨대는 테츠야도 보였다.
남들보다 더 큰 소리를 질러대는데, 평소보다 크다.
어쩌면 내 몸에서 났던 미유키의 자두 향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진 건 아닐까?
부실 한켠에 있는 생수를 집어든 나는 다시 보관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조용히 연격 연습을 하던 렌카가 다가오더니 날 불렀다.
“마츠다...! 기다려.”
그녀의 얼굴과 기다란 목에 맺혀있는 식은땀이 눈에 띈다.
핥으면 블루베리 맛이 나려나?
반강제적으로 몸을 핥자 질겁을 하며 날 노려보지만, 포악한 수컷이자 주인에게 기어오를 순 없어서 벌벌 떨고만 있는 렌카...
상상하니 꼴린다.
“왜요?”
“치나미는... 일어났어?”
“예.”
“너 말이야... 혹시...”
“나중에 얘기하죠? 스승님이 목이 마른 것 같아서 물을 가져다줘야 되거든요.”
생수병을 흔들며 렌카의 눈앞에 보여주자, 입을 다문 그녀의 오똑한 코에서 기다란 한숨이 내쉬어졌다.
“그래... 그럼 부활동 끝나고 잠시 남아줘.”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보관실로 돌아가, 잠에서 깨지 못해 헤롱거리고 있는 치나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후 생수 뚜껑을 따고 그녀의 입 앞에 입구를 가져다대었다.
“아 하세요.”
“제, 제가 마실 수 있는데요...”
“아.”
“.... 아앙...”
이비인후과에서 검사를 받는 사람마냥 목소리까지 내며 입을 앙 벌리는 그녀.
그녀의 입 안에 조심스레 물을 넣어준 내가 말했다.
“아직도 졸린 것 같은데, 휴게실에서 자고 있을래요? 마무리는 내가 할게요.”
“그, 그럴 수는 없는데요...”
“괜찮으니까 가요. 얼마 못 잤잖아.”
“으음... 안 되는데...”
입술을 모아 내밀고 내 눈치를 보며 우물거리는데, 자고 싶은 마음이 큰 것이 티가 난다.
속이 빤히 보이는 치나미를 지그시 쳐다본 나는, 그녀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부활동이 금방 끝나는 것도 아닌데, 이대로 비몽사몽 다닐 건가요? 실수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 그렇긴 한데요...”
“일어나서 휴게실로 가죠.”
그대로 서서 치나미를 향해 손을 뻗자, 잠깐 고민에 빠져있던 그녀가 결심을 마쳤는지 내 손을 붙잡고 끄응 일어났다.
“조금만 잘 거예요... 30분만...”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푹 자겠구만.
“예, 그렇게 해요.”
나는 치나미의 도복 하의 뒤쪽을 손바닥으로 툭툭 털었다.
도복 위로도 느껴지는 토실토실한 엉덩이.
그곳에 손길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흥앗...!”
기이한 탄성을 터뜨린 치나미가 몸을 이리저리 움츠렸다.
날 만류하고 싶었는지 입술을 웅얼거리고 있지만, 호의로 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려는 듯싶었다.
그렇게 먼지 한 톨 없는 치나미의 도복 하의를 털어준 나는, 그녀의 등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는 날개뼈 안쪽의 오목한 부위의 결을 따라 등허리의 외복사근까지, 사심이 가득한 손으로 사근사근 쓰다듬었다.
“으읏...!?”
고개를 바짝 치켜세우며 민감한 반응을 보여주는 치나미.
계속 이렇게 했다가는 그녀의 잠이 전부 달아날 것 같았기에, 마지막으로 등을 톡, 톡 짧게 토닥인 나는 터치를 그만두었다.
“자고 일어나서 아이스크림 먹을까요?”
“앗...! 좋아요. 그러면 제가 탈의실에 가서 돈을...”
“졸린데 어느 세월에 탈의실에 다녀와요? 제가 사다놓을게요.”
“그래도...”
“자, 얼른 가요.”
“.... 네에...”
착한 아이마냥 대답한 치나미가 흐물흐물 발걸음을 옮겼다.
저렇게 졸려 하면서 잠은 어떻게 참았는지... 치나미치고는 많이 버텼다.
**
한산해진 부실 안.
모두가 샤워를 하고 있는 사이 부실 바닥을 청소하고 있던 나는, 여자 탈의실에서 렌카가 나오며 내게 눈짓을 하자 그녀를 따라갔다.
부실 뒤편으로 나를 불러낸 그녀는 팔짱을 끼고 잠시 침묵했다.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유로운 태도로 렌카를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이 열렸다.
“어쩌다 그런 상황이 된 거야?”
“뭐가요?”
“왜 치나미가 네 어깨에 기대서 잠들었냐고.”
“보관실 안엔 베개가 없으니까?”
렌카의 눈썹이 꿈틀했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내가 말을 이었다.
“장난이고, 스승님이 너무 졸려 보이길래 잠깐 어깨를 빌려줬습니다.”
“너희 둘이 평소에 친하게 지낸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서로의 몸이 닿는 건...”
“잠깐만요. 부장은 혹시 남녀가 연인이 아니면 서로의 몸조차 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꽉 막힌 사람인가요?”
“꽈, 꽉 막혔다니...! 몸이 살짝 닿는 거랑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잖아...!”
답지 않게 당황하는 렌카.
정곡을 찔렸나보다.
어깨를 으쓱인 내가 말했다.
“사복 패션은 엄청 오픈돼있으면서, 의외네요.”
“갑자기 패션은 왜 언급해?”
“겉모습과 속마음이 정반대라 신기해서요.”
“.... 마음대로 생각해.”
“알겠습니다. 근데 왜 불렀나요? 방금 질문했던 그거 때문에?”
“그건...”
말끝을 흐린 렌카의 입이 다물어졌다.
표정을 보니 고뇌를 하고 있는 게 티가 났다.
여기서 더 참견하자니 꼰대 같고, 그렇다고 물러서자니 치나미가 내 마수에 빠질까봐 불안한 듯한 모습이었다.
“맞다. 저번에 부장이 골라줬던 호구 있잖아요.”
“응...? 아... 그거...? 그게 왜? 문제라도 생겼어?”
“아뇨. 써보니까 좋은 것 같아서, 감사드리려고요.”
“아니 뭐... 감사할 것까진 없는데...”
화제를 돌려주니 떡밥을 무는구나.
너도 참 알기 쉽다.
“머리가 조금 끼긴 하는데, 설마 일부러 작은 사이즈로 골라준 건 아니죠?”
“.... 난 비싼 장비로 남을 골탕먹일 정도로 양아치는 아니야. 원래 호면은 꽉 끼는 느낌이 들어야하는 거야. 그래야 길들였을 때 아프지 않게 잘 고정되거든.”
“농담입니다. 근데 부장은 왜 절 탐탁찮게 생각하는 겁니까? 혹시 소문이 안 좋아서?”
“탐탁찮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대련 때도 그렇고, 평소에도 그렇고... 네가...”
렌카가 진중한 투로 이유를 말하려 할 때였다.
“후배님...! 어디 계세요...?”
부실을 등진 코너에서, 졸음이 섞인 치나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쫑긋한 렌카의 시선이 돌아갈 때쯤,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며 치나미가 모서리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렌카를 발견한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렌카 친우님...? 여기서 후배님과 뭘 하고 계시는 건가요...?”
그에 렌카가 내 눈치를 쓰윽 보더니 대답했다.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좀 나누고 있었어. 잘 잤니?”
“네에... 저 후배님이랑 아이스크림 먹어야 되는데, 데려가도 될까요...? 아니면 친우님도 함께 드실래요?”
“나는 됐어. 고마워.”
“왜요? 같이 먹어요. 친우님께서도 좋아하시는 복숭아 맛이에요.”
“아냐... 너희 둘이서 맛있게 먹어.”
나와 치나미가 단둘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또 불경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서 같이 먹겠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고지식한 면이 있는 렌카치고는 의외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렌카에게 간단한 목례를 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치나미와 함께 부실 안으로 들어갔다.
**
“1시간이나 자버렸어요.”
구석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냠냠 먹던 치나미의 말.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들고만 있던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만큼 졸렸나보죠. 맛있어요?”
“네. 이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네요. 값도 싸구요. 만약 매점에 이 아이스크림이 없어진다면 저는 전학을 가버릴지도 몰라요.”
“그거 좀 서운한데요? 저보다 복숭아 아이스크림이 더 소중합니까? 전 어떡하라고요?”
실망감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따지고 들자, 치나미의 눈매에 호선이 그려졌다.
내 등을 팡팡 두드린 그녀가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농담이랍니다. 제가 왜 렌카 친우님과 후배님을 놔두고 떠나나요? 그럴 일은 없어요.”
갑자기 활기차진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잠이 보약이긴 해.
“실망할 뻔했는데 다행이네요.”
“후배님도 참 걱정이 많으시네요. 그런데 아이스크림은 왜 드시지 않나요?”
솔직히 말할게. 너무 물려.
왠지 렌카가 같이 먹자는 권유를 거절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치나미와 오랜 시간 함께 붙어있던 렌카는 복숭아에 질려버린 거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지 않을까?
“두 개밖에 안 사와서... 스승님께서 더 먹고 싶으면 드리기 위해 참고 있습니다.”
“절 생각해주시는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저는 후배님과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게 좋아요. 어서 한 입 크게 베어 무세요.”
그래...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먹을 수야 없는 노릇이지.
속으로 침음을 삼킨 나는 억지로 아이스크림을 물고, 입 안 가득 퍼지는 복숭아 향을 참아내며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켰다.
“그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기쁘네요. 다음엔 요거트 피치로 먹어요.”
“.... 예. 아, 요거트 피치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번 주 금요일에 부활동이 끝나고 같이 먹으러 갈까요?”
“이번 주 금요일이요? 왜 오늘이 아닐까요?”
“금요일에 마사지를 해드리고 싶어서요.”
“으음...? 벌써요...?”
벌써라니. 이제 슬슬 할 때도 됐잖아.
“월요일부터 쌓였던 피로를 풀고, 같이 요거트 피치를 먹고 돌아가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 확실히... 다음 날이 주말이니까... 푹 잘 수도 있겠네요...”
“맞습니다. 주말에 상쾌하게 일어나는 거예요. 중고 모모님 굿즈도 찾게 되면 금요일에 같이 사러 가고요.”
“흐음... 좋은 생각이시군요...”
나는 검지에 티슈를 감싸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치나미의 인중에 묻어있는 살구색 크림을 닦아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복숭아처럼 확 달아올랐다.
“그럼 그렇게 하는 겁니다?”
“.....”
자신의 무릎을 가슴께까지 끌어온 치나미가 아이스크림을 아주 약간 물었다.
그리고는 조신하게 입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