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더, 더!”
냉정한 말투로 날 채찍질하는 치나미.
추운 날씨임에도 땀이 뻘뻘 흐를 때까지 허공에 죽도를 휘두르고 있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다.
“아직 멀었어요! 설마 합숙훈련 때 스승의 체면을 구길 생각이신가요!?”
스파르타식 교육을 원하는지 쉬는 시간도 없이 날 몰아붙이고 있는데, 나중에 마사지로 갚아준다.
“흡!”
복부에 힘을 주며 죽도를 휘두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무너지지 않는 내 자세에 만족감을 표한 치나미가 말했다.
“여기까지에요. 잠시 쉬도록 하겠어요.”
아무리 힘이 좋다고 해도, 힘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해도 오랜 시간동안 죽도를 휘두르면 정말 힘들다.
그것도 호구를 착용한 채라면 더더욱.
녹초까진 아니어도 팔이 뻐근했다.
호구가 덜 길들여진 터라 귀와 턱도 아프고.
호면을 벗고 벤치에 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치나미가 수건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내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별 말씀을요. 겨눔세부터 동작까지 흠잡을 곳이 없었지만, 딱 하나 모자란 부분이 있었어요.”
“그게 뭐죠?”
“기합이에요. 기검체일치의 기. 후배님은 아직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그 기가 모자라요. 자, 절 따라해보시겠어요? 흐럇!”
치나미가 단전에 힘을 빡 주더니 기합을 내뱉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를 털어낸 나는, 귀엽기 짝이 없는 우렁찬 목소리에 실소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왜 웃으시는 건가요? 제 기합이 웃기시나요?”
“아뇨. 귀여워서 그래요.”
치나미가 움찔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톰한 뺨이 점점 발그레해지는 것이 보인다.
한겨울에 한참 찬바람을 맞다가, 따뜻한 코타츠가 있는 방에 들어와 기쁜 마음에 홍조를 띤 소녀 같다.
“흐흠... 후배님. 칭찬은 감사하지만, 지금은 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셔야할 때에요. 검도에서의 기합은 무척 중요한 부분이란 말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일 그런 힘찬 기합소리를 내면 목이 쉬어버릴 것 같아요.”
“처음엔 그렇겠지만 나중엔 괜찮아져요. 그리고 그것도 수련의 일환이에요. 그런 식으로 한 꺼풀씩 허물을 벗는 거죠.”
“알겠습니다. 오늘은 너무 힘든데, 내일부터 한 번 도전해볼게요.”
“약속해요? 손가락 걸 거예요?”
눈앞에 내밀어진 새끼손가락.
나는 자그맣고 귀엽게 생긴 그 여리여리한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합니다.”
“흠흠... 좋아요.”
“제 손에 땀이 좀 많죠? 괜히 스승님의 손에 냄새를 옮길까봐 걱정이네요.”
“좋은 냄새만 나는데요.”
“스승님도요.”
“므앗... 그런가요...?”
고개를 푹 수그린 치나미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솔직한 반응을 보여주며 부끄러워하던 그녀는,
“치나미! 혹시 거기 있어?”
동산 밑에서부터 들려오는 렌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핫!? 네! 저 여기 있어요! 무슨 일이신가요?”
“감독님께서 부르셔! 합숙훈련 때 쓸 소모품 예산이랑 코스 관련해서 회의 있으니까 내려올래?”
“네에! 금방 갈게요!”
대답을 마친 치나미가 구겨지지도 앉은 도복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흠... 들으셨죠...? 저는 회의에 참가해야하니, 후배님께서는 3분만 더 쉬시고 다시 연습을 하세요. 제가 없다고 쉬엄쉬엄할 생각이라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또 약속할까요?”
“아, 아니요...! 후배님을 믿을게요...”
치나미는 힘내라고 말하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진짜 격려를 하려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통통 튀는 마음을 달래려는 건지는 모르겠다.
총총걸음으로 동산의 언덕을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호면을 착용하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연습하자, 연습.
**
“피부가 왜 이렇게 푸석푸석해? 둘 다?”
나와 테츠야가 오길 기다리고 있던 미유키의 호들갑.
검지로 뺨을 긁적인 내가 대답을 하려고 할 때, 테츠야가 선수를 쳤다.
“막 샤워하고 나왔거든. 너도 알다시피 오늘 공기가 좀 건조하잖아.”
이 새끼... 같잖은 짓을 하는구나.
어디 한 번 열심히 해봐라.
“그렇긴 한데... 일단 이리 와봐. 에센스 뿌려줄게.”
미유키가 자신의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거기서 에센스를 꺼냈다.
천박하게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테츠야에게 에센스를 뿌린 미유키는, 이번엔 내게 다가왔다.
“얼굴 앞으로 빼봐.”
“싫은데.”
가벼운 장난을 치는 날 보며 픽 하고 웃는 미유키.
그녀는 곧 까치발을 들더니, 내 얼굴과 적당한 거리에 분무기를 위치시키고는 윗부분을 눌렀다.
칙-!
안개처럼 넓은 반경으로 퍼지는 수분.
그것을 정면으로 맞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까르르거린 미유키가 두어 번 더 에센스를 뿌려주더니 말했다.
“보습은 꼭 해야지. 나중에 각질 같은 트러블 생기면 안 돼. 보기 안 좋잖아. 나중에 내가 제품 추천해줄 테니까 그거 사서 발라.”
“귀찮게 뭘 이것저것 바르냐? 로션 하나면 됐지.”
“지금 그 로션도 안 바른 사람이 누군데... 마츠다 군...! 뭐해! 손으로 얼굴 비비지 마...!”
“발랐으면 비벼야지.”
태평한 소리를 하는 내가 답답했을까?
미유키가 내 손목을 잡고 안간힘을 쓰며 당겼다.
“이건 분사형이라서 안 비벼도 돼...!”
“그럼 미리 말을 했었어야지.”
“....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바보스럽지...? 더러운 손으로 얼굴 만지면 어떡해...”
“더럽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
“여기 올 때 주머니에 손 넣고 있었잖아. 그게 더러운 거지 뭐야. 진짜 어이가 없어서...”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친 미유키가 손수건을 꺼냈다.
전철에서 그녀를 만지려 했던 치한을 두들겨 팬 이후, 나에게 주려고 했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이거... 그거냐?”
“마츠다 군이 생각하고 있는 그거 맞아. 얼굴 닦아.”
미유키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단번에 손수건을 알아보자 기분이 좋아진 듯한 모습이었다.
너도 나처럼 모든 추억을 기억하고 있구나.
물론 그다지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기쁘다.
“무슨 소리야? 그게 뭔데?”
눈치없이 끼어든 테츠야의 물음.
손수건을 받아들고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내던 내가 대답했다.
“추억거리.”
단어 선택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유키가 화사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테츠야의 눈이 불안한 듯 데굴 굴러가는 게 보인다.
“추억거리?”
그래, 너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기도 한 추억이지.
“그런 게 있단다. 타기나 해라.”
“아, 그래...”
**
“그럼 들어가라.”
집 앞에 차를 세웠음에도, 미유키는 내릴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가방도 챙기지 않고, 안전벨트도 풀지 않은 채로 나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그녀.
그런 그녀에게 포근한 미소를 지어보인 내가 물었다.
“왜?”
“받지도 않고 짧게 보기만 했던 것뿐인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
“뭐가.”
“손수건.”
“그렇게 새하얀 건 처음 봤으니까.”
“그래...?”
“날 원수처럼 취급하던 네가 베푼 첫 호의기도 하고.”
“누, 누가 원수처럼 취급했는데...!”
당혹스러워하며 발뺌을 하는 미유키.
코웃음을 친 나는 상체를 그대로 쭈욱 뻗어, 그녀가 맨 안전벨트 버클을 눌렀다.
그리고는 헤드레스트에 뒤통수를 거의 붙이다시피 한 채로, 눈을 큼지막하게 뜨고 있는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아니야?”
“.... 마츠다 군이 불량했던 건 사실이잖아... 지금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무, 물론 고쳐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 한참 멀었어...”
“한참이나?”
“당연하지... 맨날 사람들 보는 앞에서 날 만지려고 하고... 가끔 욕도 하잖아.”
“욕이야 뭐 그렇다고 쳐도, 만지는 건 억울한데. 너도 즐겼으면서 왜 나만 잘못한 것처럼 말하냐?”
“즈, 즐기긴 누가 즐겼다고 그래...!”
찔끔한 미유키가 내 가슴을 밀어내고 뒷좌석에서 가방을 챙겼다.
이후 조수석 문을 열고 곧 나갈 것처럼 한쪽 발을 뻗더니, 이내 날 돌아보며 물었다.
“잠깐 우리 집에 들렀다 갈래?”
“왜? 오늘 데리고 온다고 말했어? 밥 먹으려고?”
“아니...! 그 식사 건은 중간고사 끝나면 먹으려고 했는데... 합숙훈련 가니까 날짜 다시 잡아봐야지...”
“그럼 지금은 왜 부르는 건데?”
“중간고사가 눈앞인데 공부 안 해...?”
“보름이나 남았는데 뭐가 눈앞이야.”
“보름밖에 안 남은 거지. 마츠다 군은 가뜩이나 바본데 보름동안이라도 열심히 해야 돼. 이번 시험도 저번 학기처럼 꼴등하면 마츠다 군은 최소 경고고, 최악의 경우엔 퇴학이야...”
“퇴학은 너무 나간 거 아니냐?”
“그만큼 지금 마츠다 군은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뜻이지...”
덜컥.
다시 발을 집어놓고 문을 닫은 미유키가 자신의 기다란 손가락으로 와타루의 차 뒤쪽을 가리켰다.
“저기 차 대. 집에서 과외 해줄게.”
“왜 이렇게 막무가내냐?”
“마츠다 군이랑 닮아 가나보지... 얼른 대.”
“아주머니랑 아저씨도 계실 텐데, 불쑥 찾아가면 미안하잖아.”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싫어하진 않을 거야.”
“그래? 그러면 잠깐만 공부하다 간다?”
“응.”
이럴 줄 알았으면 미유키의 방에 놓아둘 물건을 갖고 오는 건데.
그냥 팬티라도 걸어놓을까 싶다.
“많은 거 안 바래. 반에서 20등 정도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차에서 내린 미유키의 말.
콧방귀를 낀 나는 그녀와 나란히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며 자신감을 보였다.
“20등 정도면 쉽지.”
“방학 때 테츠야 군보다 진도도 한참 늦어놓고... 말은 잘하네? 테츠야 군의 저번학기 기말고사 등수는 15등이었어.”
“이번에 이기면 되겠네.”
“그랬으면 좋겠네? 같이 열심히 해보자.”
내 등을 두드리는 그녀.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표정인데, 어떻게 되나 보자고.
사실 대가리를 쓰는 분야엔 자신이 없긴 하다.
그래도 기대이상의 성적을 올린다면 미유키의 앞에서 뻗댈 명분이 생기니까, 포상을 받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테츠야의 마구 구겨진 면상도 볼 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