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오랜만이네...! 잘 지냈니?”
“저야 뭐... 항상 똑같죠. 빈손으로 와서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번거롭게 선물 같은 건 사지 않아도 돼. 얼른 들어와.”
미도리의 환대를 받은 나는 방글방글한 미소를 지으며 신발을 벗었다.
실내화를 신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미유키가 미도리에게 말했다.
“엄마, 마츠다 군 데리고 공부할 거니까 방해하면 안 돼.”
“공부? 중간고사 대비하는 거야?”
“응.”
“과일도 안 먹어?”
“과일? 지금 줘. 갖고 올라갈게.”
“아니, 조금 쉬었다가 천천히 하든지 하지... 커피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 나누면 참 좋을 텐데. 마츠다 군은 어떻게 생각하니?”
화사한 낯으로 날 바라보는데, 보면 볼수록 이해가 안 간다.
미도리가 아니라, 와타루 말이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랑 결혼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미도리가 훨씬 아까운데...
“저 커피 좋아합니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을까?
미도리가 그것 보라는 표정으로 미유키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미유키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렇게 물어보면 누가 싫다고 해... 지금 공부해야하니까 빨리 올라가야 돼. 커피는 나중에... 마츠다 군이 집으로 돌아갈 때 마시든지 하자.”
내 손목을 잡아끄는 미유키.
날 2층으로 데려가고 싶어 하지만, 그녀의 약한 힘으로는 날 어찌할 수 없는 노릇.
결국 그녀는 미동도 없는 내가 못마땅했는지, 미도리 몰래 내 엉덩이를 약하게 꼬집었다.
그러고 보니 가족들 앞에서 이런 접촉을 한 건 처음인가?
스킨십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터치긴 하지만, 그래도 많이 발전했다.
자포자기한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보인 내가 미도리에게 말했다.
“가방만 조금 놔두고 와도 될까요?”
“응. 물론이야. 근데...”
말끝을 흐린 미도리가 팔짱을 꼈다.
의미심장한 얼굴. 나와 미유키의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확신한 것 같았다.
하긴, 딸을 잘 아는 엄마인데 미유키가 날 쳐다볼 때의 미세한 표정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방금 미유키답지 않게 땡깡을 부렸던 것도 한몫했겠고.
미유키가 가족들 앞에서 날 언급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텐데, 그걸 감안해보면 오히려 늦은 셈이다.
미도리도 약간 둔한 쪽인가?
“오, 왜 그렇게 봐...?”
뜨끔한 미유키의 물음에, 미도리가 고개를 좌우로 한 차례 흔들었다.
“아냐. 얼른 가방 놓고 내려와.”
목소리가 괜찮다. 개구쟁이 같아.
딸이 나와 만난다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걸까?
문득 미도리의 마인드가 궁금해진다.
성에 관해서 보수적인지, 개방적인지.
미유키는 보수적이라고 하지만, 지금 저 반응을 보면 오히려 개방적일 것 같다.
어머니의 저런 반응에 낭패감이 깃든 표정을 지은 미유키는, 날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후 문을 닫자마자 내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니까 오랄 때 바로 오지...! 엄마가 눈치챈 것 같잖아...”
“눈치채면 안 돼? 내가 창피하냐?”
“그게 아니라... 앞으로 외박할 때 마츠다 군의 집에 간다고 의심할 것 같아서...”
“이미 알고 계시지 않을까? 엄마니까.”
“.... 몰라. 마츠다 군 때문에 망했어. 앞으로는 외박 안 할래.”
오늘따라 투정이 심하네.
실소를 터뜨린 나는 무릎을 굽혀 미유키와 시선을 맞추었다.
“난 오랜만에 아주머니를 봬서 반가웠던 것뿐인데... 그리고 다짜고짜 찾아왔는데 인사는 제대로 드려야 될 거 아니야.”
“.....”
“게다가 네가 오라고 했잖아. 근데 왜 짜증을 내냐?”
“아, 알아... 그냥 빨리 같이 있고 싶어서... 미안해...”
순순히 사과하는 미유키.
이제야 솔직해진 미유키를 조심스레 끌어안은 나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정말 앞으로는 우리 집에 안 올 거야?”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졌을까?
미유키가 그녀 특유의 흐응 하는 탄성을 내뱉더니,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갈 거야...”
나는 그런 그녀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이며 숨을 빨아들였다.
코 안으로 확 들어오는 자두 향이 뇌리로 퍼져, 도파민을 만들어내면서 기분을 좋게 한다.
여긴 여전하구나.
**
미유키 오늘 날을 잡기로 했는지, 정말 열성적으로 날 가르쳤다.
내가 중간고사를 잘 보길 진심으로 바라는 것 같은 모습.
덕분에 나는 다른 짓을 할 생각도 못하고 그녀의 수업을 따라가는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동안 과외를 받다 보니 몸이 찌뿌둥했다.
기지개를 쫙 편 나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미유키에게 양해를 구하고 문을 열었다.
2층 복도는 굉장히 어두웠다.
불을 킬 수 있었지만 계단 아래에서부터 희미하게 올라오는 빛 때문에 분위기가 살아서, 나는 그냥 컴컴한 복도를 거닐어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다 보고 다시 미유키의 방 문을 열자니 왠지 억울했다.
거의 3시간 가까이 쉬지도 못하고 공부를 했는데, 자체적인 쉬는 시간을 갖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복도를 두른 난간에 팔을 기댄 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베란다였다면 정말 시원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어서 아쉽다.
잠깐 TV 소리가 들려오는 계단 밑을 내려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끼익...
“응...? 마츠다 군. 여기서 뭐해?”
문이 열리면서 들려오는 미유키... 아니, 카나의 조용한 목소리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얘는 날 만날 때마다 장난을 친다.
이제 안 속는다니까. 변조한 네 음색엔 사랑이 없다고.
나는 가소로운 장난을 치고 있는 카나와 잡담을 나누기 위해 몸을 돌리려다가, 좋은 생각이 나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카나가 내 등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더니 재차 물었다.
“여기서 뭐하냐니까?”
“구경.”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말로 대답하는 내가 제대로 속았다고 생각했을까?
카나가 다소 과감하게 내 옆으로 오더니, 난간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구경할 게 뭐가 있는데? 고양이라도 들어왔어?”
“아니. 계단 디자인이 예뻐서.”
“계단 디자인...? 어두운데 제대로 보이긴 해?”
“잘만 보여. 너도 봐봐. 목재 무늬가 예쁘잖아.”
“그래? 난 잘 모르겠... 으익...?”
카나의 입에서부터 돌연 당황스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내가 그녀의 등허리에 손을 스윽 올리고, 허리를 지그시 눌렀기 때문.
큰소리를 내지 않고 기겁한 그녀가 몸을 뒤로 뺐다.
“무, 뭐하는 거야...? 너 뭐야...?”
“뭐가?”
이러한 스킨십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 척 연기를 한 나는, 그제야 몸을 돌리고 카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황당한 투로 말했다.
“뭐야, 누나에요?”
그에 자신의 큼지막한 눈을 두어 번 끔벅거린 카나가 침을 꼴깍 삼키더니 말을 더듬었다.
“그, 그래...! 나야...! 너 지금 뭐했어...?”
“허리 만졌는데.”
“그러니까...! 거길 왜 만지냐고...!”
미유키를 자주 놀리길래 탕녀인 줄 알았는데, 너도 비슷하구나.
앞으론 이런 장난 치지 마라. 다음엔 허리로 안 끝난다.
“미유키인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여, 역시...! 너희 둘...! 그럴 줄 알았어...!”
카나의 얼굴은 완전히 붉어져있었다.
어두컴컴한 복도임에도 잘 드러날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는 이빨까지 딱딱거리고 있는데, 어지간히 놀랐나보다.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끌끌거린 나는, 이 상황이 어색한 척 머리를 벅벅 긁었다.
“괜찮아요?”
“.....”
벙 찐 채로 나만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
먼저 날 속였으니, 화를 낼 래야 낼 수가 없겠지.
그나저나 잘록한 허리 감촉이 미유키와 똑같다.
방금 반응도 그렇고... 자매는 자매인가? 갑자기 꼴린다.
“혹시 기분 나빴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진중함이 묻어나오는 말투로 재차 사과를 하자, 카나의 안색이 조금은 진정됐다.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린 그녀가 말했다.
“기분 안 나빴어... 내 잘못이기도 하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예. 감사합니다.”
“소, 손은 왜 이렇게 큰 거야...? 아니, 아니다... 난 들어갈게...”
횡설수설한 카나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기기까지 하는 문.
굳게 닫힌 그 문을 바라보며 피식한 나는, 다시 미유키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 밖에서 소리 들리던데... 언니랑 대화했어?”
“어. 갑자기 나와서 장난치더라. 너인 척 목소리 바꾸면서.”
“하아... 무슨 장난이 매번 똑같지...? 초등학생도 아니고... 언제 철 들러나 모르겠네...”
카나가 있는 방 쪽으로 고개를 돌린 미유키가 혀를 끌끌 차더니 말을 이었다.
“얼른 앉아. 공부해야지.”
“나 진짜 힘든데 그만하면 안 되냐? 3시간씩이나 했잖아.”
“3시간밖에 안 한 거지. 오늘은 수학까지만 하고 끝내자.”
옆에 있는 의자를 툭툭 치는 미유키.
한숨을 푹 내쉰 내가 순순히 자리에 앉자, 그녀가 날 다독였다.
“지금은 짜증나겠지만 나중엔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거야.”
“누가 짜증난대? 빨리 시작해.”
“응.”
킥킥거린 그녀는 곧 표정을 굳히고 노트를 펼쳤다.
나 또한 마찬가지. 집중력을 최대한 발휘해 그녀의 과외를 따라갔다.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 이번 시험은 무조건 잘 쳐야지.
미유키의 과외는 오늘 외에도 계속되었다.
주중엔 이틀에 한 번씩, 그리고 주말엔 매일.
나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미유키와 함께 열성적으로 공부를 했고,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중간고사 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