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책상 한 칸씩 띄어 앉을래?”
교탁 앞에 선 미유키의 말에, 학생들이 책상간의 거리를 벌렸다.
시험 날이라고 다들 기운이 빠져있는데, 흐느적거리며 책상과 의자를 드르륵 끄는 모습이 왠지 웃기다.
테츠야는 옆에서 필기노트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나는 놈의 낡은 책상다리를 툭 건드렸다.
“공부 열심히 했냐?”
“응. 평일에 미유키한테 과외 받으면서 열심히 했어.”
미유키가 그랬었다.
날 과외 시켜준 뒤, 잠깐 짬을 내 카페에 가서 테츠야를 만나 같이 공부를 했다고.
오래 알고 지낸 사이만 아니었다면 미유키가 챙겨주지도 않았을 텐데, 그놈의 소꿉친구가 뭔지... 족쇄가 아닐 수 없다.
“자신 있는 목소리네?”
“음... 저번 학기 기말고사보단 훨씬 나을 것 같아. 방학 때 너희 집에서 열심히 했던 것들도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너는 어때?”
“난 이번에도 망할 것 같아. 그래서 컨닝하려고.”
“컨닝...?”
“미유키 거.”
테츠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당당하게 미유키의 것을 베낀다고 하니 황당한 모양.
놈의 면상을 보며 낄낄거린 나는, 어느새 다가온 미유키의 목소리를 듣고 움찔했다.
“꿈 깨. 무슨 컨닝이야?”
“아... 들었냐? 그럼 잘 부탁한다.”
“잘 부탁하긴 뭘 잘 부탁해...! 가끔 보면 마츠다 군이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아니면 농담으로 말하는 건지 헷갈려.”
“오늘은 진심인데.”
“그래? 그럼 아쉽게 됐네? 마츠다 군이 컨닝하는 순간 감독관님한테 말씀드릴 거거든. 그러니까 자기 실력으로 풀어.”
“풀다가 안 되면 부반장 거라도 본다?”
“되게 뻔뻔한 소리를 하네...? 지금까지 공부해왔던 게 아깝지도 않아...?”
“누가 나더러 한 번 삐끗하면 퇴학당할 거라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뭐든 하는 게 맞지 않나?”
“그건 과장이었다고 말했잖아.”
허리춤에 손을 올린 미유키의 미간이 예쁘게 구겨졌다.
훈육이라도 하려는 것 같은 모습.
나는 그녀에게 시큰둥한 낯으로 한손을 휘저어보였다.
“농담이었어.”
“아까는 진담이라며.”
“농담을 진담처럼 한 거지.”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아... 지켜볼 거야.”
네가 열심히 과외까지 시켜줬는데 컨닝을 하면 모독이라고.
라는 말을 삼킨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미유키가 불안한 눈빛을 한 채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실 문이 열리더니 덥수룩한 수염을 지닌 감독관이 들어왔다.
“다들 앉아라.”
근엄함이 느껴지는 목소리.
교실 안의 학생들이 모두 바짝 긴장해 입을 꾹 다물었다.
모두가 얌전히 자리에 앉아있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그가 교실 전체를 돌며 학생들의 책상 서랍이 비워져있는지, 책상 위에 쓸데없는 물건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다시 교탁으로 돌아와 말했다.
“컨닝하다 걸리면 그대로 퇴실조치니까 명심해라. 시험지엔 풀이를 해도 되지만, 답안지엔 오직 답만 써야 한다. 이렇게 말해도 꼭 한두 명은 답안지에 낙서를 하더라고.”
이번엔 정이 있는 투로 농담을 곁들이니 긴장감이 풀렸을까?
가라앉아있던 교실 안의 분위기가 조금은 살아났다.
교수는 앞자리 학생들을 시켜 시험지를 뒤로 나눠주도록 했다.
모두가 두 장의 두꺼운 종이를 받았음을 확인한 감독관이 시계를 보았다.
“5분 남았다. 시험시간은 50분, 그 전에 다 푼 학생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대기하도록.”
나는 미유키와 눈빛교환을 하거나, 심호흡을 하고 있는 테츠야를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5분가량이 지나자,
“현대문 시험, 시작한다.”
허리를 곧게 편 감독관이 시험 시작을 알려왔다.
일사불란하게 시험지를 펼치는 학생들.
미유키는... 여유로운 표정이다.
얕보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컨트롤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번에도 수석이겠지?
시험지를 펼쳐보니 첫 문제부터 미유키와 공부했던 게 나와 있어 마음이 한결 편했다.
벌써부터 답안지에 답을 써내려가기 시작하는 미유키를 보며, 나는 펜을 들었다.
**
가채점은 학생들의 필수코스.
예보니 아카데미의 학생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미유키! 8번 문제 답 뭐야?”
“미유키, 혹시 20번 문제 답이 청렬한 시풍이었어?”
1-A반은 미유키와 부반장의 곁에 대다수의 학생들이 몰려있었다.
특히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한 과목 시험을 끝낼 때마다 미유키의 책상 주위에 삼삼오오 모였는데, 점심시간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미유키는, 평소처럼 친절하게 흥분한 학생들을 진정시키며 가채점을 했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뻗어있는 채였다.
제대로 집중해서 시험을 친 건 처음이었고, 안 쓰는 머리를 굴리다보니 정신력 소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는 문제가 많이 나와서 다행인가? 미유키의 속성 과외가 굉장한 도움이 됐다.
“마츠다, 너는 가채점 안 해?”
미동도 없는 내 등을 툭 건드린 테츠야의 물음.
귀찮은 파리를 치우듯 손을 휘저은 내가 말했다.
“난 결과만 볼란다.”
“왜? 상상이상으로 못 쳤어?”
이 새끼는 내가 시험을 못 봤을 거라고 가정을 하네.
자꾸 그렇게 나오면 진짜로 너희 집에 스며들어버린다?
상체를 스르륵 일으킨 내가 반문했다.
“넌 잘 쳤나보다?”
“나는... 저번보단 나아진 것 같아.”
“축하한다. 매점 갈 건데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그 말에 가채점을 하던 미유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마츠다 군! 나 딸기우유!”
주변이 시끄러울 텐데 용케도 들었구나. 어이가 없다.
자신도 딸기우유를 먹겠다는 테츠야의 말에 대충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시험지를 벅벅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놓고 교실을 나왔다.
그렇게 한산한 복도를 어슬렁어슬렁 거닐며 매점으로 가고 있는데,
“후배님! 후배님!”
뒤에서 치나미 특유의 깜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평한 표정으로 렌카와 함께 걸어오고 있는 치나미.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보인 내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스승님. 시험은 잘 쳤나요?”
“저는 잘 쳤어요! 후배님은요?”
그러고 보니 치나미의 성적이 궁금하다.
렌카는 중상위권인데... 치나미는 어떨까?
평소에 보여주는 어벙한 모습을 보면, 잘 쳤다고 말은 하지만 하위권일 것 같긴 하다.
“저는 그럭저럭 본 것 같습니다. 지금 어디 가는 길이에요?”
“잠깐 부실에 들러서 청소를 할 생각이었어요.”
“청소...? 오늘은 부활동이 없는 날이잖아요. 푹 쉬시지 굳이 왜...”
“부실을 깨끗하게 쓰려면 청소는 필수지요. 오후 시험이 끝나면 바로 돌아가려고 지금 해놓는 거예요.”
“그럼 저도 같이 할게요. 매점 들렀다가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렌카 친우님께서 도와주기로 하셨고, 간단하게만 할 거라서 얼마 안 걸려요.”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린 나는 렌카를 바라보았다.
“부장은 시험 잘 봤어요?”
“나? 나도 뭐... 그럭저럭 봤어. 합숙훈련은 참가할 거지?”
“해야죠.”
“그래, 각오하고 와.”
벌써부터 기싸움을 하려 드네.
내가 이날까지 훈련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면 놀랄 거다.
공부와 병행하려니까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였다고.
넌 진짜 죽었다.
“후배님, 오늘 합숙훈련 때 가져오실 준비물을 톡으로 보내드릴 테니까, 잘 준비하셔야 해요. 아시겠나요?”
팔을 쭈욱 뻗어 내 등을 팡팡 두드리는 치나미.
그런 그녀를 향해 방긋한 미소를 지은 내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청소는 정말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어요?”
“물론이에요. 후배님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마시고, 시험과 휴식에만 집중하도록 하세요.”
우리 치나미... 제자의 편의도 잘 헤아려주고... 너무 착하다.
요즘 슬슬 마사지를 받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 날을 잡아서 또 해줄게요.
아니면 합숙훈련 때 해주든지.
**
“떴다!!”
한 남학생의 우렁찬 외침에, 학급의 모든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튀어나갔다.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 날인 오늘 바로 나온, 게시판에 붙은 시험 결과를 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학원물을 볼 때마다 이해가 안 됐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등수를 모두에게 공개하는 것.
이러면 하위권은 자존감이 팍팍 떨어질 텐데... 참 잔인한 장르다.
한눈에 볼 수 있는 성적을 통해 주조연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편의성이 있긴 하고, 어차피 엑스트라의 성적 같은 건 독자들이 신경을 쓰지 않는다지만...
경쟁사회가 이렇게 무서워요.
“고생했어, 마츠다 군. 엄청 자랑스러워.”
학생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휑해진 교실 안.
곁으로 다가온 미유키가 내 엉덩이를 토닥이며 격려를 해주었다.
이틀에 걸친 시험기간 동안 열심히 문제를 푸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기쁜 모양이었다.
밖으로 나가려는 미유키의 손목을 잡아챈 나는, 왜 그러냐는 듯 날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몇 등 할 것 같냐?”
“글쎄... 마츠다 군은 가채점을 안 했으니까 잘 모르겠는데... 냉정하게 말해볼까?”
“해봐.”
“진짜 열심히 한 걸 감안해도 20등 안팎.”
중하위권이구나. 나름 잘 봐줬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미유키와 함께 교실을 나갔다.
게시판엔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꽤나 시끄럽고 학생들의 대가리 때문에 아랫 등수가 잘 보이지 않았는데, 어쨌거나 가장 위에 보이는 이름은 이랬다.
[1-A반 석차]
[수석, 하나자와 미유키]
[차석, 나츠메 호노카]
수석과 차석은 미유키와 부반장. 예상했던 결과다.
빵녀는 6위인가? 괜찮게 하는구나.
중위권 라인에는 테츠야의 이름이 보인다.
[16위, 미우라 테츠야]
저번보다 잘 봤다던 이놈은 딱 평균.
까치발을 든 채로 등수를 확인하고 있는 놈의 표정을 보니 약간 구겨져있었다.
저번보다 잘 쳤다더니... 이래서 설레발은 치면 안 된다.
놈의 면상을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흘리던 나는,
“어...? 마츠다 군...!”
학생들 틈을 비집고 들어간 미유키의 놀란 목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왜?”
“이거 봐!”
호들갑을 떤 미유키의 손가락은 벽보 중앙에서 약간 위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으로 시선을 따라가 보니,
[14위, 마츠다 켄]
14위에 내 이름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