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을 다시 봐도 14위다.
평균에서 아주 근소하게 위.
두 눈을 끔벅거리며 멍하니 등수를 보고 있던 나는,
팡! 팡!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띤 미유키가 등을 마구 때리자 정신을 차렸다.
“마츠다 군... 진짜 열심히 했구나...?”
벽보에 시선을 둔 채로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말했다.
“그러게...”
“답지 않게 당황하네? 많이 놀랐어?”
말 그대로 많이 놀랐다.
솔직히 잘 봤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높은 순위에 오를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이래서 공부를 하는 건가?
왠지 미유키의 공부 사랑이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컨닝을 했다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저번학기 기말고사에 꼴등을 하던 놈이 이번엔 중위권이라?
누구라도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난 결백했다. 이 성적은 내가 진심으로 노력해서 쟁취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건 감독관으로 들어온 여러 교수들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교실을 돌며 내가 시험지를 열심히 푸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수학시험을 볼 때, 시험지에 열심히 문제를 풀이하고 있는 날 지나친 감독관이 지었던 기특하다는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요즘 열심히 하고 있다는 평가도 교수들 사이에서 돌고 있으니, 누군가가 찌른다 해도 의심은 빠르게 수그러들 거다.
“놀랐어.”
1-A반 앞의 복도는, 미유키가 내 등수를 확인한 이후부터 조용해진 상태였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날 보고 있는데, 그들 대부분의 눈빛엔 호의가 깃들어있었다.
서클 탈퇴 이후 사고도 안 치고, 데면데면하긴 했어도 먼저 인사를 걸고 했던 것이 지금 확 터진 모양이다.
내게 등수를 따인 몇몇 학생들이 질시를 하고 있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지들이 못난 건데, 신경 쓸 필요는 전혀 없지.
테츠야를 살펴보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존심이 마구 구겨진 면상인데...
지금은 조롱 대신 조용히 지나가줘야겠다.
온갖 발광을 하며 놀리는 것보다는 무시가 더 빡치는 법이니까.
미유키를 내려다본 내가 말했다.
“야.”
“응?”
“네가 예상한 20등보다 훨씬 위네?”
“나도 지금 엄청 신기해. 이렇게까지 잘 볼 줄은 몰랐어.”
칭찬을 받는 것도 좋지만, 난 상을 원한다고.
질내사정 1회권이나 가족 초대권... 뭐 이런 거 안 주냐?
나중에 우겨서 받아내야겠다.
“축하해, 마츠다 군.”
이어지는 미유키의 말에 이가 드러날 정도로 입꼬리를 찢은 나는, 다른 동급생들의 축하를 받으며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
청춘물엔 사소한 클리셰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주인공에게 호재가 일어나면, 날씨 같은 주변 상황이 밝아진다는 것.
지금도 그랬다.
싸늘해져가던 날씨는 오늘따라 봄처럼 따스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일광욕을 하기 딱 좋은 날이어서, 나는 제복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옥상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유치한 짓이긴 하지만 뭐 어떤가.
러브 코미디 속에 들어왔는데, 이렇게 감성에 젖어줘야 주인공답지.
그렇게 따사로운 햇빛을 쬐고 있던 나는, 옥상 문이 작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들었다.
문틈으로 미유키의 자그마한 얼굴이 빼꼼 튀어나와있다.
“무, 뭐하는 거야...?”
누워있는 내가 황당했는지 벙 찐 미유키.
나는 그녀에게 이쪽으로 다가오라며 손짓했다.
“와서 너도 누워. 같이 하늘 보자.”
낯선 물체를 살피듯 날 가만히 바라보던 미유키는, 이내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더니 옥상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내 곁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하늘을 한 차례 쓰윽 쳐다본 그녀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하늘에 아무것도 없는데?”
“그 아무것도 없는 걸 보는 거지.”
“오늘 왜 이렇게 감성적이야? 14등이나 한 게 좋아서 그래?”
“네 예상보다 6등이나 높은 순위였는데, 좋지 그럼.”
한껏... 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상기되어있는 목소리에,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은 미유키가 내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엄청 자랑스러웠어. 진심이야.”
“그럴 만도 하지.”
“벌써 자신감이 너무 지나친데...? 이러다 자만하면 큰일 나. 망하는 건 한순간이야.”
“재수 없는 소리 할래? 오늘은 자만하게 놔둬라.”
“알았어. 근데 의외로 공부에 재능이 있네? 기말고사는 10등 안쪽을 노려보는 건 어때?”
“말이 되냐?”
“왜? 차이는 고작 4등이잖아.”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상위권부터는 갖고 있는 지식의 양이 다르지.”
“그건 맞아. 사실 거기까진 기대 안 해.”
개구쟁이 같은 말을 하는 그녀.
혀를 찬 나는 바닥에 닿아있는 그녀의 치마폭을 들추고, 그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이런 내 행동에 기겁한 미유키가 소리쳤다.
“무, 뭐하는 거야...!”
“아무것도 안 보여.”
“당연히 안 보이지...! 변태 같아 진짜...!”
이러고 있는데도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네가 더 변태지 않을까?
라는 말을 삼킨 나는 위로 바람을 후 불어보았다.
“흐익!”
그러자 미유키가 크게 움찔하더니, 내 가슴을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때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날 타박했다.
“이상한 짓 좀 그만해...! 시도 때도 없이 뭐하는 건데...!?”
“애정표현 하는 건데.”
“무슨 이런 애정표현이 다 있어?”
“좋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봐. 아 빨리 누워라. 분위기 깨지 말고.”
“분위기는 지금 마츠다 군이...!”
기가 찬 목소리로 따지려던 미유키가 입을 앙다물었다.
여태까지 보여주었던 내 기행들을 잠깐 상기해보는 듯 눈동자를 굴린 그녀는, 이내 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이후 옆으로 다가와 눕더니, 내 팔을 잡아당겨 팔베개를 했다.
“팔 아프다. 놔라.”
“싫어. 머리에 먼지 묻는 거 안 좋아해.”
“옆머리는 이미 바닥에 닿았는데?”
“뒤통수에 묻는 걸 싫어해. 다른 곳은 괜찮아.”
상황에 따라 취향이 뒤바뀌는 모습이 어이가 없다.
그냥 솔직하게 팔베개를 하고 싶었다고 말하면 덧나냐?
미유키의 머리를 받친 팔을 접은 나는, 그녀의 정수리를 마사지하듯 살살 문질렀다.
그러자 미유키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약간의 간드러진 콧소리와 함께 숨을 길게 토해낸 그녀가 내게 바싹 달라붙었다.
“이번 주말은 나 혼자 보내야 되네?”
“토요일 날 돌아갈 수 있으면 갈까?”
“칭얼대는 거 아니니까 그럴 생각은 하지 마. 아쉬워서 해본 말이야... 대신 자주 전화할 거지?”
“사진 보내줄 때마다 할게.”
“무슨 사진? 내 사진?”
“어.”
“.... 마츠다 군, 혹시 일반 사진이 아니라 야한... 뭐 그런 쪽의 사진을 말하는 건 아니지...?”
이젠 알아서 잘 알아듣네.
“혼자 잘 생각하고 보내봐.”
“저, 절대 안 보낼 거야. 무슨 전화를 하라는데 조건을 걸어...?”
“조건 아니야. 그냥 권유지.”
“말하는 걸 보면 권유가 아니라 강요인데...?”
“난 권유라고 했다.”
“이거 봐...! 말투 무섭잖아...!”
나는 몸을 미유키 쪽으로 돌려, 그녀의 복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약손을 하듯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아니라니까.”
이런 내 손길에 평온해졌을까?
기다란 콧바람을 내뱉은 미유키가 옆으로 몸을 돌려 날 마주보더니, 골반을 뒤척이며 가까이 붙어왔다.
껴안아달라는 행동.
요즘 미유키의 애교가 부쩍 많아지고 성욕이 물이 오른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주 보기 좋다.
**
검도부 탈의실 안.
흐느적흐느적 도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테츠야를 본 나는 미간을 구겼다.
오늘 내내 죽상이던데, 나한테 등수를 따인 게 그렇게 화가 났나?
아니면 미유키가 오늘 자신의 성적에 대해 언급을 별로 안 해줘서 서운해하고 있는 건가?
뭐가 됐든 굉장히 거슬렸기에, 나는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다 말고 테츠야를 툭 건드렸다.
“오늘 왜 이렇게 축 쳐져있냐? 또 몸살이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뭔데?”
“그저 컨디션이 별로인 것뿐이야.”
남자답지 못한 새끼... 어휴... 평생 그렇게 살아라.
그나저나 테츠야의 몸에 벌크업이 조금 됐다.
덩치가 커진 느낌.
알게 모르게 운동을 하고 있나본데, 열심히 해라.
응원해줄게. 그러니까 제발 경쟁심리 좀 발휘해봐.
이제 슬슬 답답해지려고 한다.
“집에 가면서 피로회복제라도 사먹든지 해라. 나 먼저 나간다.”
“아, 응. 걱정해줘서 고맙다, 마츠다.”
걱정 아니고 맥이는 거다 씨발아.
네가 자주 하는 짓이잖아.
대충 손을 휘저은 내가 부실에서 나가자,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던 치나미가 날 반겼다.
“후배님! 1학년들도 게시판에 석차 벽보가 붙어있었나요?”
텐션이 높아 보이는 상큼한 목소리다.
귀가 간지러울 정도야.
갈아입은 도복의 가슴끈을 조이며 치나미에게 가까이 다가간 내가 대답했다.
“잘 봤습니다. 14등이에요.”
“네에? 14등이요? 후배님은 공부를 못하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원래는 그랬는데, 이젠 아닌가봅니다.”
“그 막연한 말씀은 뭔가요? 자랑처럼 들리는데... 맞나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스승님 성적은 어때요?”
그 말에 치나미의 입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므후후... 저번 학기보다 잘 봤어요. 항상 이기지 못하던 동급생을 제쳐버리고 말았지요. 가채점을 해봤을 때 아주 간발의 차여서 조마조마했는데, 그대로 됐어요.”
뿌듯한 표정으로 콧대를 세우는 치나미.
경쟁자를 떨어뜨려서 기쁜 듯한 모습이다.
진흙탕 싸움에서 이기면 기분이 좋긴 하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주억거린 내가 물었다.
“몇 등을 했는지 물어보면 실례인가요?”
“아니요. 어차피 복도에 다 붙어있어서 아무나 볼 수 있는데요. 저는 예보니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래, 처음으로 차석을 따내고 말았어요.”
“.... 예?”
“차석이요.”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치나미가... 차석이라고?
뒤에서 차석을 잘못 말한 건가...?
전혀 상상조차 못한 등수가 튀어나오니 잠깐 뇌사가 오는 느낌이다.
“스승님. 2등을 말씀하시는 게 맞나요...?”
“훗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시군요. 맞아요. 2등이랍니다.”
이건 내 등수만큼 예상치 못한 반전이다.
우리 치나미... 렌카보다 훨씬 머리가 좋았구나.
내가 선입견을 갖고 있었네. 미안해.
네가 좋아하는 콩닥콩닥 마사지로 사과를 하고 싶어요.
그나저나 차석이나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데 사람은 왜 이렇게 순진한 건지...
물론 똑똑하다고 다 현명하지는 않다지만... 조금 황당하다.
눈을 한 번 깜박거리는 것으로 멍해진 정신을 깨운 내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흠흠...! 감사해요. 후배님도 14등... 수고 많으셨어요. 매니저 일을 하는 도중에도 수학 공식을 외웠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결과로 보여주시는군요. 저는 후배님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기념할만한 날인데, 청소는 나중에 하고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까요?”
“앗...! 좋아요...! 그런데 합숙훈련 준비물은 다 챙겨놓으셨나요?”
“어제 다 끝내놨습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마치 어린이집 선생이 아동을 칭찬하듯 손뼉을 짝 치는 치나미.
이번 합숙훈련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