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도쿄 교외에 있는 산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저녁노을이 진 상태였다.
주황색으로 물든 활엽수들이 좌우로 쫙 늘어서있는데, 노을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 보기 좋다.
다른 부원들 또한 나와 똑같이 생각했는지, 버스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렌카를 흘끗거려보니 팔걸이에 팔을 괸 채로 창밖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름다운 경치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테츠야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잠을 자고 있었는데, 어지간히 못나 보여서 죽통을 갈기고 싶어진다.
그리고 치나미는...
“우음...”
모모님 목베개까지 베고 속 편하게 꿈나라도 떠나있었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꿈이라도 꾸는지 찹찹 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슬슬 도착할 시간이 되었기에, 나는 치나미를 흔들어 깨웠다.
“스승님.”
“므으응...?”
눈을 부스스 뜨며 날 올려다보는 치나미.
그녀의 뺨을 검지로 꾸욱 누르자, 손가락이 움푹 들어갔다.
잠을 자느라 근육이 모조리 이완되어서 그런지 감촉이 굉장히 말랑했다.
미유키보다는 아니지만 그에 준할 정도로 따뜻하기까지 하다.
더 만지고 싶어.
잠결이라 밋밋한 반응을 보여주는 치나미의 뺨에 잠깐 장난을 친 내가 말했다.
“스승님. 곧 도착할 것 같아요.”
“네엥...”
“이제 일어나야 됩니다. 일단 물부터 드세요.”
빨대를 꼽은 생수병을 말라버린 치나미의 입술 앞으로 가까이 들이밀자, 그녀가 빨대 끄트머리를 앙 물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으로 쪼옥 쪼옥 물을 빨아먹었다.
“음음... 물맛이 달군요...”
잠에 취한 목소리로 노인네 같은 소리를 하는 그녀.
픽 하는 웃음을 터뜨린 나는 기지개를 쭉 펴는 치나미를 대신하여 다 먹은 복숭아 팩과 젤리 봉지들을 정리했다.
그 사이 버스가 산장 입구에 들어섰다.
규모가 적당한 주차장은 죄다 비어있었다.
또한 대여섯 명의 직원들이 나와, [예보니 아카데미 검도부를 환영합니다] 라고 쓰인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약을 잡은 사람들이 우리밖에 없는 듯했다.
아예 집중 케어를 할 수 있도록 한 아카데미만 받는 건가?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삑-!
묵묵히 산장의 외관을 감상하던 나는, 짧고 강렬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고로가 호루라기를 입으로 가져간 채 씨익 웃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부는 건 너무하잖아. 열정이 너무 지나치다.
“모두 기상하고 내리도록.”
엄숙한 고로의 말에 정신을 차린 부원들이 흐느적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아직까지 비몽사몽 눈을 부비적거리고 있는 치나미의 목베개를 풀어주었다.
“저희도 내릴까요?”
“네에...”
**
우리가 묵을 객실은 다다미방이었고, 5인 1실이었다.
사실 말만 5인실이지 전통가옥 안에 객실을 모조리 몰아넣은 터라, 얼마든지 다른 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두세 걸음 걸어가기만 하면 끝.
놀자판이 이루어지기에 걸맞은 숙소였다.
부원들의 들떠있는 얼굴을 보니 밤에 술판이라도 벌일 것 같았다.
난 거기에 참가할 생각이 전혀, 단 하나도 없어서 상관없는 일이긴 했지만...
아마 고로한테 들켜서 호되게 혼이 나겠지.
“잘 부탁한다, 마츠다.”
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된 테츠야의 말.
대체 뭘 잘 부탁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물었다.
“너 코 고냐?”
“안 골아. 걱정하지 마.”
인간의 못난 부분들을 모조리 갖고 있는 너인데,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냐?
벌써부터 불안해서 한숨이 푹푹 나올 지경이다.
“다행이네. 15분 뒤에 집합이니까 옷 갈아입고 짐 풀어라.”
“풀 거 없어서 괜찮아. 이부자리는 미리 깔아놓는 게 낫나? 훈련하고 나면 지칠 텐데...”
“오늘은 간단하게만 한대.”
“그걸 어떻게 알아?”
“매니저니까 대충은 알고 있어야지. 근데 너 어디서 잘 거냐?”
“선배들이 먼저 정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한 번 물어보고 올게. 일단 화장실 좀...”
테츠야가 객실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본 나는 미유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두 번도 지나지 않아서, 휴대폰 너머에서 미유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마츠다 군. 잘 도착했어?
“어. 방금 숙소에 들어왔어. 뭐해?”
-나도 친구 만나고 방금 돌아온 참이야. 숙소는 어때? 좋아?
“그냥저냥. 미우라랑 같은 방이야.”
-아 진짜? 그럼 둘이서 자는 거야?
“아니. 5인실이라 2, 3학년 선배들 세 명이랑 같이 자야 돼.”
-그래? 이참에 테츠야 군이랑 속마음도 털어놓고 하면서 더 친해지면 되겠다.
단언컨대 그럴 일은 없을 거란다.
“오늘은 먼저 자라. 이제 집합하고 밥 먹은 다음 바로 훈련하러 가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
-스케줄이 엄청 힘들어 보이네...? 자기 전에 톡이라도 보내줘.
“그렇게 할게. 끊는다.”
-응. 훈련 열심히 하고 와.
평소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달콤한 통화를 마친 나는, 화장실 문을 쿵쿵 두드리며 테츠야에게 먼저 나가겠다고 통보한 뒤 객실 문을 열었다.
이후 집합장소로 가서 치나미를 만났다.
그녀는 버스 짐칸에 있는 호구를 비롯한 비품들을 꺼내고 있었다.
황급히 치나미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박스를 빼앗듯 가져왔다.
“아니, 같이 하면 되지 왜 혼자 이러고 있어요?”
그에 치나미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며 대답했다.
“5분 뒤에 밥을 먹잖아요. 남은 시간동안 잠깐 정리를 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나중에 옮기기 편하도록요.”
“그냥 놔두세요. 밥 다 먹고 제가 할 테니까.”
“같이 해야지요.”
“방금 혼자 하고 있었잖습니까. 다음엔 제가 혼자 해야 수지타산이 맞죠.”
“말도 안 되는 계산법이로군요.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불공정한 억지에요.”
“혼자 막무가내로 움직인 벌이라고 생각하세요.”
“네에...? 스승을 벌주는 제자가 세상에 어디 있나요?”
뿔난 표정을 지으며 따지고 드는 모습이 귀여워 죽겠다.
박스를 내려놓은 나는, 예고도 없이 치나미의 뒷목에 손을 올렸다.
“흐끅...!?”
어깨를 쭈욱 올리며 딸꾹질을 한 치나미.
잔머리가 위치한 윗부분을 손톱으로 간지럽히듯 살살 긁어주자, 놀라선 동그래져있던 그녀의 눈이 순식간에 풀렸다.
“므하...”
입에서는 나른한 한숨이 새어나왔고, 올렸던 어깨는 다시 내려가 흐물흐물해져있다.
그윽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응시하며 눈동자를 데굴 굴리는 건 덤.
정말 오랜만에 터치하는 부위라 그런지 반응이 곧바로 튀어나오는데, 이대로 계속하면 살짝 가버리려나 싶다.
“후, 후배니임...! 지금 무슨...”
“좋아요?”
“조, 좋긴 한데요...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해애앳...!!”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있던 치나미가 높은 톤의 신음을 터뜨렸다.
뒷목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경추 부근을 어루만지듯 눌러주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예전에도 여길 만져주면 특히나 더 좋아하더니... 지금도 마찬가지구나.
“치나미! 거기 있어!? 집합시간 다 됐어!”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렌카의 목소리에, 치나미의 눈이 부릅떠졌다.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내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참아왔던 숨을 토해냈다.
“흐아악... 후아...!”
어디 가지 못하게 꽉 붙잡고 있던 것도 아닌데, 납치당하다가 탈출한 사람마냥 저러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새어나오려고 한다.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심신을 달랜 그녀가 말했다.
“후배님... 또 이렇게 허락 없이 함부로 몸을 만지실 건가요...?”
“무거운 물건을 나르느라 힘들어보여서요. 오랜만에 마사지를 해드리고 싶었고, 제자로서 스승님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저, 저는 지금 마사지를 원한 적이 없었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지금’이라는 단어를 강조한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인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산장 주변 산책로가 잘 되어있던데, 훈련이 끝나고 잠깐 걷는 게 어떨까요?”
“앗...! 아주 좋은 생각이지만... 훈련이 고될 수도 있으니 상황을 봐서 결정하도록 해요.”
“오늘 훈련은 정도가 심하진 않다고 했잖아요.”
“감독님의 기준에서 정도가 심하지 않은 것이지, 저희 기준에선 아주 힘들 거예요.”
하긴, 고로의 성격상 아주 빡세게 훈련을 시키겠지.
“그렇다면 몸이 녹초가 되겠네요?”
“음... 아마도요?”
마사지를 받고 자면 딱이겠네.
마침 외부에선 들어올 수 없는 좋은 장소도 알고 있겠다, 산책을 하면서 치나미를 살살 구슬려야겠다.
**
아카데미에서 급식을 자주 먹었음에도, 이번 단체식사는 꽤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렌카와 치나미가 함께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떨거지 같은 테츠야도.
“마츠다.”
맞은편에서 조용히 밥을 먹던 렌카의 부름에, 입 안에 들어가 있는 음식물을 씹어 삼킨 내가 고개를 들었다.
“예?”
“내일 점심에 시간 비워놓을 수 있지?”
“왜요?”
“요새 치나미한테만 배웠잖아. 중단을 위주로 쓰는 여러 사람한테 가르침을 받아야 파훼법도 다양하게 익힐 수 있는 법이야.”
“그래서 알려주겠다?”
“맞아. 넌 노력하겠다고 했고, 난 도와준다고 했잖아. 저번에 말했듯이 네가 원하는 대련도 하게 해줄 거야. 대신, 훈련을 군말 없이 잘 따라오겠다고 하면.”
수작을 부리는구나.
상황을 보아하니 정신수련 명목으로 한참 굴리려나 싶다.
게다가 말투에 자신감이 있는 걸 보면, 내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 같다.
대련은 직접 하려나?
아니면 실력이 좋은 다른 부원을 내세우려나?
전자로 확실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부장, 저는요? 저도 부장한테 배우고 싶습니다.”
“물론 너도 가르쳐줄 거야.”
“감사합니다. 열심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짧은 시간동안 온갖 생각을 하던 나는, 눈치없이 대화에 끼어든 테츠야를 보았다.
마침 좋은 이용거리가 있잖아.
내게 열등감이 생기기 시작한 놈이 스스로 잡아 잡숴달라고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데, 써먹지 않으면 도리가 아니지.
“렌카 친우님께서 맞는 말씀을 하셨어요. 저는 중단을 기본만 할 줄 아는 수준이라서, 렌카 친우님께 배우면 후배님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저번에 약속했죠? 상단을 위주로 배워도 되지만 중단 또한 소홀히 하지 않겠다구요.”
옆에서 렌카를 거드는 치나미를 쳐다본 나는, 다시 렌카에게로 눈을 돌렸다.
“얼마나 할 건데요?”
“네 근성에 따라 다르겠지.”
같잖은 도발이로다.
승부를 받아주도록 하마.
밥과 반찬을 입 안으로 퍼넣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해요.”
“잘 생각했어. 내일 점심 먹고, 소화시킨 뒤에 바로 시작할 거니까 알아둬.”
“그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