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12화 (112/313)

“으음? 후배님. 눈 밑이 퀭해요.”

다음날 아침,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온 날 향한 치나미의 말이었다.

눈가를 꾸욱 꾹 눌러 마사지를 한 내가 대답했다.

“잠을 잘 못 자서요.”

“왜요?”

왜긴, 테츠야 새끼가 코를 골아댔으니까 그렇지.

안 곤다고 해놓고 방 안에 지진을 일으켜댔는데, 그 새낄 믿은 내가 잘못이 크다.

중간에 나와 휴게실에서라도 불편하게 잠을 자서 다행이었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면 지금 나는 아주 짜증이 난 상태였을 것이다.

“낯선 곳이라서 적응을 못했나봅니다.”

“후배님은 은근히 예민한 구석이 있으시네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님은 잘 잤어요?”

“저는 알람이 울릴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어요. 아마 마사지를 받아서 노곤해졌던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밥 먹을까요?”

“네. 오늘 반찬은 계란말이와 고등어구이인데, 아주머니께 더 달라고 말씀드려서 든든하게 먹도록 하세요. 점심시간 이후의 자율훈련을 대비해야하니까요.”

치나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세를 낮추고, 한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자기 전에 렌카에게 들었는데요... 아마도 렌카가 직접 후배님과 대련을 할 것 같아요.”

다른 선배를 내세우며 나와 붙일 줄 알았는데 직접 해준다?

내가 뭐 손을 쓸 필요도 없구나.

하긴, 자신의 실력에 그만큼 자신이 있고, 날 직접 혼내주고 싶어 했던 만큼 이런 수순은 당연했다.

“그래요?”

“네. 후배님은 재능이 뛰어나긴 하지만 규칙에 대해선 잘 모르시잖아요?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알려줄 필요성이 있대요.”

몸으로 직접 부딪친다니... 말이 너무 야한데.

“저야 뭐 상관은 없습니다만... 훈련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거기까진 렌카가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렇군요. 미우라랑 대련을 하기로 했는데, 할 시간이 있을까요?”

“미우라 후배님과 대련이요? 사전에 합의된 건가요?”

“저희 둘은 합의를 했습니다만... 부장은 모릅니다.”

“어허...! 아직 호구를 착용하는 것도 서툰 초보자끼리 마음대로 대련을 하면 안 돼요...! 감정이 격화될 우려가 있고, 제대로 승부가 났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단 말이에요...!”

모찌 같은 볼을 부풀리며 날 타박하는 치나미.

무안한 듯 옆머리를 긁은 내가 말했다.

“부장이나 스승님이 관리감독을 해줄 거라고 생각해서...”

“이런 중요한 건 저희에게 먼저 여쭤보는 게 먼저인데... 후배님은 참 막무가내시네요.”

“지금 생각해보니 스승님의 말씀이 백번 옳네요. 죄송합니다.”

“흐흠... 그래도 빠르게 잘못을 인정하시는 모습은 보기 좋아요. 대련은... 일단 제가 렌카와 상의를 해보도록 하겠어요.”

“알겠습니다.”

순순한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거린 치나미가 식판을 들고 왔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밥과 반찬을 받고, 부원들과 아침인사를 나누며 테이블로 이동하던 우린, 테츠야와 함께 들어오는 렌카와 마주쳤다.

“앗! 친우님, 어서 오세요. 요즘 미우라 후배님과 자주 다니시는 것 같네요?”

해맑은 치나미의 인사에, 렌카가 자신의 옆에서 히죽거리고 있는 테츠야를 흘깃거렸다.

“그냥 식당으로 오는데 우연히 만난 거야.”

“그러신가요? 그런데 렌카 친우님께서도 눈 밑이 까매요.”

“잠을 잘 못 잤거든.”

“그러고 보니 친우님께서도 낯선 곳에선 잠을 잘 못 주무시지요?”

“응...”

그리 말한 렌카가 치나미를 못 말리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상황을 보아하니 치나미가 잠꼬대 같은 것을 한 모양인데...

아마 잠결에 렌카의 팔을 꼭 붙들었거나, 몸에 다리를 올려놓거나 했겠지.

치나미는 렌카와 잘 일이 있으면 항상 그러니까.

“마츠다 후배님과 똑같은 면이 있으시네요. 후배님께서도 적응을 못했다고 하셨거든요.”

“그래...?”

렌카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의외라는 표정. 그런 그녀에게 어깨를 으쓱여보인 나는 테이블에 앉아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훈련 준비도 하려면 많이 먹어둬야지.

**

산장에 마련된 훈련실 안.

어제보다 강도가 더 높은 훈련을 거친 부원들은 힘든 와중에도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제부터 말만 자율훈련인 자유시간이 시작되기 때문.

계곡에 갈 생각으로 가득 차있는 부원들이 모두 떠난 훈련실 안엔 네 사람만이 남았다.

나와 테츠야, 그리고 렌카와 치나미였다.

우린 훈련이 끝난 실내를 대충 정리해놓은 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한자리에 모였다.

렌카와 치나미가 가까이 있어 그런지 콧속으로 블루베리와 복숭아 향이 솔솔 풍겨온다.

문제는 그 안에 테츠야의 퀴퀴한 냄새가 섞여있다는 점.

꽃밭에 똥을 뿌리는 놈을 보니 갑자기 성질이 확 뻗친다.

“지금부터는 각자 스타일에 맞는 수련을 가르쳐주려고 해.”

진지 모드로 들어간 렌카는 꽤 섹시했다.

특히 땀으로 인해 기다란 목에 윤기가 흐르는데, 빨고 싶은 충동이 확 일어난다.

“이제부터 미우라는...”

렌카가 본격적으로 개인교습을 진행하려고 할 때,

“저... 친우님.”

치나미가 조심스레 렌카를 불렀다.

“응?”

“잠깐 말씀드릴 이야기가 있어요.”

“얘기해.”

“잠시 이쪽으로 오세요.”

렌카를 훈련실 구석으로 데려간 치나미가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아마 테츠야와 내 대련에 관한 주제겠지.

그리고 렌카는, 치나미의 말이 이어질수록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치나미와의 짧은 대화를 마친 렌카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나와 테츠야에게 다가오더니 팔짱을 꼈다.

“너희들, 앞으로는 상급자 없이 멋대로 대련을 하자며 정하지 마. 초심자들끼리 대체 뭐하는 짓이야?”

화가 난 듯한 렌카의 나무람에, 테츠야가 찔끔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굳이 해야겠어? 얻어갈 게 별로 없어 보이는데?”

“저는... 꼭 하고 싶습니다.”

“마츠다, 너는?”

미덥지 못한 눈으로 날 보는 렌카.

쓰읍 하며 혀를 찬 내가 대답했다.

“저도 뭐... 미우라만 좋다면 하고 싶네요.”

“그래...?”

렌카의 시선이 나와 테츠야를 번갈아 살폈다.

실력 차이를 가늠해보는 것 같은 모습.

그를 눈치챈 테츠야가 간절한 표정으로 렌카를 쳐다보았다.

“부탁드립니다, 부장. 방금 감독님의 지도 아래에서 약식대련을 할 때도 보셨잖아요.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물론 네 발전속도가 빠른 건 인정하지만... 초심자끼리 붙으면...”

“부장과 나나세 선배께서 심판을 봐주실 거잖아요.”

“너 원래 그렇게 고집이 셌니?”

“아, 아닙니다. 죄송해요.”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의외여서 그래. 승부욕이 있는 건 보기 좋은데...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기다려.”

“예, 부장.”

군기가 꽉 잡힌 테츠야의 대답에 더 이상 뭐라 할 수가 없었을까?

우릴 흘겨본 렌카가 치나미에게로 가더니 무어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런 렌카를 바라보던 테츠야가 내게 조용히 물었다.

“너 우리가 대련한다고 말했어?”

“말해야지. 설마 우리끼리만 치고받으려고 했냐? 심판도 없는데?”

“그건 아니지만... 나랑 같이 있을 때 말하면 좋았잖아. 순간 당황했네...”

“나도 당황했다.”

“왜?”

“나도 네가 부장한테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오늘 식당에 같이 왔길래 부장도 아는 줄 알았지. 너희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었어?”

“그,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당황해선 말을 더듬는 테츠야.

렌카가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낄낄거리며 웃은 내가 말했다.

“농담이야 새꺄.”

“무슨 그런 농담을 하고 그러냐...”

“근데 부장 예쁘지?”

“야...!”

“우리끼리만 하는 얘긴데 뭐 어때서 그래?”

“아니... 예쁘시긴 한데...”

이거 봐. 살살 구슬려주니까 문어발 본색이 드러나는구만.

너 따위에겐 그림의 떡이니까, 그냥 보기만 해라.

놈의 등을 툭 친 나는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봐. 응원한다.”

“자, 잘해보긴 뭘 잘해봐... 그리고 조용히 좀 해. 부장께서 들으시면 어떡하려고...”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치나미와의 대화를 끝낸 렌카가 다시 우리에게로 다가오더니,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호구가 놓인 임시 보관대를 가리켰다.

“장비 착용해.”

그 말에 테츠야의 얼굴이 환해졌다.

상체를 꾸벅 숙인 그가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부장.”

“3판 2선승, 이렇게 딱 한 경기만 하는 거야. 그 이상은 안 돼.”

“알겠습니다!”

보기보단 마음이 약하네.

쳐발릴 예정인 테츠야도 신경을 써주고.

아니면 놈이 나와 조금이라도 맞상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럼 조금 실망인데.

**

“우리 옹고집 후배님께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셨군요.”

호구 착용을 도와주던 치나미의 애정 어린 타박.

그녀가 호면 끈을 꽉 묶어줄 때까지 기다린 내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죠.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봐요. 한 가지 팁을 드릴 건데 경청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물론이죠. 말씀하세요.”

“첫 경기는 렌카가 시작 신호를 주자마자 공격을 하도록 하세요. 성공하면 좋고, 실패한다 해도 미우라 후배님께서 당황하실 텐데, 그 이후엔 활로를 찾기가 쉬울 거예요. 아시겠나요?”

“명심할게요.”

“기합은 짧고 크게, 기검체일치의 기를 중시하세요. 그래야 심판을 보는 렌카에게도 어필할 수 있어요.”

“예, 스승님.”

“자, 이제 일어나보세요.”

치나미의 말을 순순히 따라 무릎을 펴자, 그녀가 내 등을 토닥였다.

“파이팅이에요. 이왕 이렇게 되어버린 것, 무조건 이기도록 하세요. 만에 하나 1점이라도 빼앗긴다면 오늘 밤새도록 특훈을 진행하겠어요.”

우리 스승님은 열정이 너무 과해.

그래서 좋아.

첫 경기는 치나미의 말대로 단숨에 끝내자.

그 다음부터는 살살 능욕해주면, 벽을 느낀 테츠야가 반응을 보일 거다.

“격자부위가 아닌 곳에 타돌한다면 반칙으로 간주하겠어. 명심해.”

준비를 마친 나와 테츠야를 향한 렌카의 당부.

날 의식해서 주의를 주는 게 웃기다.

마음만 같아선 와사바리를 걸어 쓰러진 놈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다.

하지만 이건 경찰 대회에서나 허용하는 기술.

일반적인 시합에서는 금지되어있다.

그러니 사용하지 말자. 어디까지나 정당하게 이기는 거다.

테츠야가 핑계거리를 댈 수 없도록.

“알겠습니다.”

“준비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렌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테츠야와 마주보며 앉아 목례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나 시작 신호를 기다렸다.

잠을 자지 못해 정신 일부가 가출해있다.

집중이 제대로 안 되는데, 이 정도는 되어야 시련이라고 할 수 있지.

원래 주인공에겐 역경이 다가오는 법이다. 핸디캡이라고 생각하자.

“.....”

호면 사이에서 보이는 테츠야의 눈깔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것만 같다.

아까부터 열등감을 솔솔 내뿜던데, 가소롭기 짝이 없다.

눈을 한 차례 질끈 감았다 뜬 나는, 흐트러지려는 집중력을 한데 모아 렌카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그럼... 시작!”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던 렌카가 큰소리를 치며 뒤로 빠지는 순간,

“흡!”

발을 크게 구르며 죽도를 앞으로 뻗었다.

콰악-!

“컥!”

동시에 내게 짓쳐들려던 테츠야가 짧은 비명을 터뜨렸다.

상단의 취약점 중 하나인 목찌름.

그것을 내가 먼저 시도한 것이다.

놈의 대가리가 뒤로 튕겨져 나갔다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니, 제대로 먹혀든 것 같다.

“.... 한판.”

이마에 손을 짚은 렌카의 선언.

치나미가 내게 조언을 해준 것처럼, 렌카도 테츠야에게 첫 타격을 조심하라고 말해줬을 텐데... 그대로 당해버리니 허탈한 듯했다.

순식간에 1점을 따낸 나는, 바닥에 그어진 실선에 쪼그려 앉아 테츠야가 정신을 차리길 기다렸다.

히죽거리며 도발을 하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이런 식으로 별 것 아니라는 듯 무덤덤하게만 행동해줘도, 테츠야는 감정이 요동칠 거다.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