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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15화 (115/313)

고요한 호수 같다.

면금 사이로 보이는 렌카의 눈을 살핀 내 감상이었다.

그녀는 나와의 대련 외엔 다른 잡생각은 하지 않는 듯했다.

벌써부터 고고한 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은 기분.

쉽지 않을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점수를 따려면 상상이상으로 험난할 거라는 확신이 선다.

“기검체일치 판정은 호흡만 제외하면 하지 않으려고 해. 중요한 건 잔심과 유효격자야. 그것만 생각하면서 대련에 임해줬으면 좋겠어.”

기검체일치가 없다면 내게는 좋은 일이다.

날 위한 배려인가?

아니, 판수가 많은 만큼, 서로의 체력을 최대한 안배하려는 것 같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렌카는 객관적으로 판정을 내릴 것이다.

그녀의 성격 상, 판정에 사심을 섞는다면 자존심이 상할 테지.

난 그저 내 모든 것을 내보이기만 하면 된다.

“판정이 끝나면 실선에 앉지 말고 서있어.”

한 판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판을 시작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만.

화끈하시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기다란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다시 눈꺼풀을 올렸다.

“준비됐습니다.”

“.....”

내 진중한 눈빛을 바라본 렌카가 잠깐 뜸을 들였다.

긴장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놀란 건가.

얼굴 대부분이 면금으로 가려져있어 표정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네가 자세를 잡고 5초가 지나면 준비가 됐다고 판단할게. 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면 시작 신호라고 생각해.”

“예.”

“그럼... 시작할까?”

“한 수 부탁드립니다.”

오후 때와는 다른, 정중함이 섞여있는 말투.

목례까지 곁들이며 렌카에게 예를 차린 나는 상단세를 취했다.

그러자 놀란 낯을 하고 있던 렌카가 눈을 가라앉히더니,

끄덕.

시작 신호를 알려왔다.

나는 렌카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즉시 발을 구르며 죽도를 내리쳤다.

그 순간,

따악-! 쩌억!

내 죽도가 위로 약간 튕겨지더니, 허리에 찬 갑에서 묵직한 감각이 일었다.

“한판이야.”

“.....”

중단세를 취한 채 날 주시하며 판정을 끝내는 렌카.

순식간에 받아허리를 당한 나는 벙 찔 수밖에 없었다.

수를 써보기도 전에 점수를 내줬다.

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측했다고 해도,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르다.

거리, 힘, 속도와 동작마저도 완벽했다.

‘이거...’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방심하지 않은 렌카가 이리도 매서웠나?

이러다간 3점은커녕 1점이라도 딸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이를 악 문 나는 렌카를 똑바로 응시하며 자세를 잡았다.

집중하자, 집중.

@@

그나저나 언제 봐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체구다.

거기다 공격일변도의 상단세까지... 예전에도 생각했었지만, 정말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뿐. 기초가 제대로 다져지지도 않은 그는 아직 자신의 상대가 아니다.

쩌억-!

“한판.”

탁! 쩍-!

“한판.”

쩌어억-!

“한판이야.”

마츠다가 자신에게 일곱 판을 내리 졌을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카각-!

‘윽...!’

8회전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렌카는 처음으로 돌진해오는 마츠다를 막지 못했다.

설마 그가 먼저 코등이싸움을 걸어올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서로가 앞으로 내민 발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마츠다의 눈을 본 렌카는, 그가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시선은 근육의 섬세한 움직임마저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날카로웠으며, 미세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듯 흉흉했다.

그리고 저런 마츠다의 눈빛은 허울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에게 유효타를 먹이는 시간이 점점 힘들어졌던 것이다.

마츠다의 실력이 실시간으로 성장하는 게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기력하게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발을 내딛거나 몸을 비틀어 유효격자에서 벗어났고, 그런 와중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아 자신을 곤란하게 했다.

끼이익...!

‘윽...!’

현재는 남녀의 선천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속절없이 눌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겁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신체조건을 활용하는 건 어느 스포츠에서나 당연한 일이었고, 더군다나 마츠다는 대련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순수하게, 진심을 다해 자신을 이기려 들고 있다는 뜻이다.

비난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을 해줘야 마땅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렌카는, 발을 옆으로 굴리며 자신을 내리누르는 마츠다에게서 벗어났다.

그러면서 그의 허리를 향해 죽도를 내뻗었다.

그때,

따닥-!

하나의 소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에, 자신과 마츠다의 신체에서 타격음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손목에서부터 올라오는 묵직한 감각.

마츠다의 공격에 당한 렌카가 경악했다.

‘마, 말도 안 돼...’

저 각도에서 반격을 노린다면 머리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목이라니...

저러면 손이 상할 텐데... 집착이 대단하다.

게다가 타돌이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고, 서로의 격자부가 유효격자에 제대로 닿았다.

양자의 타돌이 동시에 성공했을 때를 상격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한판을 따낼 수 있는 공격임에도, 점수는 무효처리가 된다.

상격은 실전에서도 보기 드문데, 그게 지금 대련에서 일어났다.

‘큰일이 날 뻔했어...’

자신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공격이 조금만 빨랐어도 점수를 내어주었을 테니까.

마츠다가 내지른 회심의 일격에 침을 꼴깍 삼킨 렌카가 말했다.

“.... 상격이야.”

“아쉽네요.”

아쉬워하지도 않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저리 말하는데, 등골이 싸늘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점수를 꽤 많이 내어줄 것 같은 기분이다.

끄덕.

쩌적-!

상격으로 인해 무효가 된 8회전을 다시 시작하는 신호를 주자마자 이루어진 공수교환.

마츠다의 공격에 담긴 강맹함이 죽도를 타고 팔로 전해져온다.

찌릿한 느낌을 참아낸 렌카는 반격을 하려다가,

쐐애액!

마츠다의 죽도가 굉장한 속도로 목을 노려오자 팔을 휘두르려고 했다.

‘쳐내고 손목을...’

쩌어어억-!

그러다가 자신의 호면 위쪽 정중앙에서 경쾌한 소리가 울리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

방금... 당했다.

마츠다의 동물적인 반사신경에 머리를 내어주었다.

힘조절, 거리, 동작... 삼박자가 조화를 이룬, 오후에 테츠야의 목을 노렸을 때보다 훨씬 발전된 완벽한 일격에, 손 쓸 틈도 없이 한 방 먹었다.

분명히 모든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는데, 찰나의 순간을 놓쳐버렸다.

고작 8회전 만에 1점을 내줬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일단 판정부터 하자.

인정할 건 인정해야한다.

“.... 한판이야... 네가 1점 얻었어.”

“예.”

기뻐할 만도 한데 무덤덤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실선에 서는 마츠다.

오싹.

감정을 완전히 죽인 채 집중하고 있는 마츠다를 보며, 렌카는 왜인지 모를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괴물처럼 보이는데, 착각인가?

스윽...

실선에 선 마츠다의 팔이 머리 위로 번쩍 들리는 것을 본 렌카는 모든 잡념을 지웠다.

그는 이미 지나간 일 따윈 생각지도 않고 오직 현재만을 보고 있었다.

자신도 저렇게 해야 했다. 딴생각을 할 여유 따윈 없었다.

지금은 모든 것을 다 보여주어야 할 때.

그가 더 이상 엇나가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성장해서 자신을 잡아먹으려 하기 전에, 여기서 기를 죽여놓아야 한다.

**

쩌억-!

왼쪽 손목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고통.

미간을 좁힌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렌카가 죽도를 회수하더니 말했다.

“허억... 허억... 한판이야...”

“.... 졌습니다.”

30전 3승 27패.

대련이 끝났을 때의 내 전적이었다.

내가 딱 목표로 삼은 3점을 얻었다.

기뻐해야할 일이다. 허나 슬픔이 더욱 컸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져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패배하는 것 자체가 짜증났다.

그것도 스물일곱 번이나 말이다.

남들 몰래 정말 열심히 수련해왔는데, 역시 경험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건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난 검도를 배운지 얼마 안 됐다.

그런 상황에서 엄청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한평생 검도만 판 렌카에게서 3승이나 가져왔는데... 만족해야 맞지.

욕심이 너무 많으면 화를 입는 법.

원하는 건 얻었으니까, 이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자.

창문 앞에서 호면을 벗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 전체를 감싸며 땀을 식힌다.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다.

체력과 정신력 소모가 너무 큰데... 씻지도 않고 자고 싶어진다.

땀으로 얼룩진 도복의 깃을 한 차례 턴 나는, 훈련실 벽에 기댄 채로 호흡을 고르고 있는 렌카에게 다가가 목례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

머리카락이 죄다 젖어 피부에 달라붙어있는데, 너무나도 섹시해 보인다.

성격 같은 건 다 떠나서, 얼굴에 그냥 색기가 흐른다.

평소보다 강한 블루베리 향이 코를 찌르는 것도 아찔하고.

렌카를 당장 덮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내가 말을 이었다.

“완패에요. 3판 전부 운으로 점수를 딴 것 같네요.”

설마 이렇게 겸손한 말을 할 줄은 몰랐을까?

렌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지 멍하니 날 올려다보던 그녀는, 지친 몸을 가누더니 내 등을 툭 쳤다.

“운이 아니야. 네 실력으로 딴 거지. 많이 노력한 게 보였어. 치나미랑 열심히 했네.”

“빈말인가요?”

“진심이야. 솔직히... 예상 외였어. 최소한 전승, 져도 운 없이 딱 한 판 정도만 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렌카의 표정이 별로 안 좋다.

날 제대로 눌러주려고 했는데, 3승이나 빼앗겨서 기분이 꿀꿀한 건가?

“이번 대련으로 느낀 점이 있을까?”

이어지는 렌카의 물음.

옆에 놓인 수건을 가져와 얼굴을 닦아낸 내가 대답했다.

“예. 제가 상대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알겠습니다.”

“이유는?”

“27패의 대부분은 무기력한 패배였어요. 그럴 때마다 자존심이 막 상하더라고요. 부장이 무심한 눈으로 절 쳐다본 것도 조금 화났고요. 이걸 역지사지라고 했죠 아마?”

“뭐... 비슷하지.”

“아니면 거울치료인가? 어쨌든 앞으로는 상대가 어떻게 느낄지도 생각하면서 대련하려고 해요.”

“.... 그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렌카의 분위기가 꽤 누그러졌다.

내일이면 다시 원래 사이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대련이 끝난 직후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게 된 지금만큼은 이 분위기를 즐겨도 될 듯하다.

“부장이 대단한 사람인 것도 알았습니다.”

“사탕발린 말은 그만둬. 약속대로 1의 자리는 버릴게.”

소원에 대한 주제를 언급하는 렌카.

능글맞게 웃은 내가 말했다.

“부장은 2회네요? 원하는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하세요.”

“.... 넌... 언제 쓸 거야?”

“저는 뭐... 상황 보고요.”

“그... 유효기간을 안 정한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정해야 맞지 않을까?”

아까도 허용범위를 물어보더니... 참 까탈스럽네.

그렇게나 불안하냐?

“한 달로 할까요?”

“한 달...? 알았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린 렌카가 물을 마시러 정수기로 향했다.

오늘 그녀와 대련을 하면서 많이 배웠다.

고마울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소원은 소원이지.

봐주는 건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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