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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19화 (119/313)

“테츠야 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조수석에 타고 있던 미유키의 질문에, 뒷좌석에 앉아 묵묵히 창밖만 보고 있던 테츠야가 흠칫하더니 대답했다.

“생각할 거리가 조금 많아서...”

“생각할 거리? 뭔데?”

룸미러에서부터, 테츠야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놈의 생각이 훤히 보인다.

나와 관련된 얘기인 만큼 여기서 말하기 곤란하지? 다 안다.

“.... 이것저것. 기말고사 생각도 해야 되고...”

“되게 기특한 생각을 다 하네? 그러면 오늘 내가 영상통화로 공부 가르쳐줄까?”

“어? 그래줄 수 있어?”

“당연하지. 엄마 눈치가 보여서 나가지는 못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럼 부탁할게. 오랜만에 과외 좀 시켜주라.”

표정이 확 풀린 테츠야.

이제는 닿지 못할 미유키가 놀아준다니 좋아라하는 꼴이 가관이다.

테츠야의 집에 도착한 나는, 뻔뻔한 놈의 감사인사를 인자하게 받아주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자 미유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물었다.

“오늘따라 친절하네? 웬일이래?”

“이게 친절한 거냐?”

“마츠다 군치고는 엄청 착한 거지...”

“그런가? 근데 너는 오늘따라 애가 불량하다?”

“왜?”

“1교시 때 기억 안 나?”

미유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 사타구니를 주물럭거렸던 일을 상기한 것이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그녀가 말했다.

“그, 그땐 약 올랐으니까 그런 거지...! 마츠다 군이 자꾸 날 곤란하게 하는데...”

“그래서 되갚아주려고 했다?”

“아니 뭐... 그런 것도 있지만...”

“다음에 또 해줘.”

좋기만 했다는 말을 에둘러 하자, 미유키가 다급히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치기가 어려 돌발행동을 한 자신이 부끄러운 모양.

킥킥거린 나는 조용히 차를 몰아 그녀의 보금자리에 도착했다.

“다 왔어.”

“.....”

말없이 가방을 챙긴 미유키가 조수석 문을 열고 날 돌아보았다.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올만한 피부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들어가 있는 게 정말 예쁘다.

“뭘 보냐?”

퉁명스런 투로 턱을 한 번 까딱거리자, 미유키가 돌연 혀를 빼꼼 내밀어 메롱을 했다.

그러더니 황급히 차에서 내려, 문을 닫자마자 현관문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새침하게 굴 거면 쭉 그러던가, 저런 식으로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을 보니 웃기기만 하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 머리만 밖으로 내민 미유키는, 내 차가 그대로 있자 다시 한 번 혀를 내밀었다.

이번엔 눈까지 질끈 감은 건 덤.

그 귀여운 행동에 킥킥거린 나는 미유키가 한손을 마구 흔들고는 문을 닫자 시내, 정확히 말하자면 치나미에게 콩닥콩닥 마사지를 해주었던 라피아 호텔로 했다.

입구에 주차를 하고 로비로 들어가니, 익숙한 풍경이 날 반겼다.

오로지 키오스크로만 돌아가는 로비의 어두침침한 분위기.

렌카가 들어오면 불안감에 몸을 부르르 떨려나? 궁금해진다.

**

내가 잡은 곳은 일반적인 객실이었다.

그 어떠한 컨셉 플레이용 도구들도 없는 오로지 휴식만을 위한 방.

작지도, 크지도 않은 3성급 호텔의 객실과 비슷한 그곳의 침대에 벌러덩 누운 나는 렌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서너 번 지나고 나니,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에서 렌카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이 시끄러운 것으로 보아 외출을 한 듯한데...

아키하바라에 있겠지? 안 봐도 눈에 훤하다.

“접니다.”

-누구... 아... 마츠다?

곧바로 무뚝뚝한 말투로 변하는데 서운하네.

아니지,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를 알아봐줘서 고마워해야하나?

“예. 제 번호 저장 안 했어요?”

-아니... 하긴 해놨는데, 발신자를 못 보고 받느라 그랬어.

“그렇구나. 지금 어디세요.”

-밖이야.

“밖 어디.”

-밖이 밖이지.

그렇게 알려주기 싫냐?

나중엔 알아서 보고하도록 만들어주마.

콧방귀를 낀 나는 용건을 꺼냈다.

“지금 시간 되죠? 제가 찍어주는 위치로 오세요.”

-무슨... 내가 왜?

“소원권 하나 쓰려고요.”

광고판에서 나오는 것 같은 소리, 주변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만 들려오는 휴대폰.

렌카가 말을 잃어버렸나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렌카가 무척 곤혹스런 투로 물었다.

-소원권을 지금 쓰겠다고...? 합숙에서 돌아온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쓰는 날짜야 제 마음이죠.”

-나 지금 바빠... 미, 미리 언질이라도 줬으면...

그럼 재미없잖아.

나는 다른 일을 하다가 내 명령에 모든 걸 내팽개치고 오는 네가 보고 싶다고.

“중요한 일이라면 봐드리긴 할 텐데, 그럼 소원 1회 추가에요.”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런 얘긴 없었잖아...!

“미리 합의한 걸 제외하면 뭐든 들어준다고 했잖아요. 아니었나요?”

-그, 그렇긴 한데...

“그래서 말을 하지 않았던 건데... 벌써부터 이러니까 곤란하네요. 그냥 봐줄까요? 소원은 없었던 일로 해드려요?”

렌카는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지기 싫어한다.

이렇게 선심을 쓰듯 살살 긁어주기만 해도, 합숙 때 한 차례 자존심이 뭉개졌던 그녀는 더욱 물러서고 싶지 않은 마음에 냅다 미끼를 물 것이다.

-뭘 없었던 일로 해...! 갈게! 가면 되잖아...! 어디로 가면 되는데!?

예상대로, 렌카가 다소 격앙된 대답을 해왔다.

참 알기 쉽다니까. 치나미만큼이나.

나는 휴대폰을 스피커폰으로 돌려놓고 렌카에게 위치를 보냈다.

“문자 한 번 확인해보세요.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리죠?”

-.... 한... 30분 정도면 될 것 같아. 전철이 늦게 오면 10분 정도 더 걸릴 수도 있어.

“그럼 40분이네요. 지금부터 시간 잽니다? 도착해서 연락해요.”

-알았어.

뚝.

그대로 끊긴 전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거리는 렌카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은데 착각일까?

낄낄거린 나는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욕실로 향했다.

@@

‘뭐야...?’

약속시간을 5분 남기고 도착한 렌카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높은 건축물을 올려다보았다.

[호텔 라피아]라는 이름의 건물이 떡하니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자신의 큰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렌카가 휴대폰과 건물을 번갈아 보며 위치를 대조해보았다.

“맞는데...?”

몇 번을 다시 봐도 마츠다가 보낸 장소가 맞다.

고개를 갸웃하며 무언가를 생각해보던 렌카는, 인터넷을 켜고 호텔 라피아를 검색해보았다.

그리고,

[호텔 라피아]

[분류 : 러브호텔]

[평점 : 4.8/5]

떡하니 튀어나온 검색결과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러, 러브호텔...?’

지금 마츠다가 자신을 그... 남녀가 정사를 나누는 곳으로 부른 건가?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있던 렌카의 눈이 스산해졌다.

곧장 마츠다에게 전화를 건 렌카가 신호음이 끊기자마자 말했다.

“뭐하는 짓이지?”

-뭐가요.

“왜 날 러브...”

따지고 들려던 렌카가 다급하게 자신의 입을 가렸다.

언성이 높아져서 주목을 받을까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왜 날 러브호텔로 부른 건데...? 너 설마...”

-저번부터 자꾸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하네요? 그런 거 아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무척이나 침착하고 낙천적인 마츠다의 음색을 들으니, 왠지 자신이 오해를 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울만한 장소인데 말이다.

“내,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아무리 제가 막나간다지만 그 정도로 망나니는 아닙니다. 진심으로 그냥 쉬려고 온 거예요.

“쉬려면 집을 가든가... 아니면...”

-진짜 까다롭네. 키오스크에 503호를 입력하면 카드키가 한 장 나오니까, 오려면 오고 가려면 가세요.

“잠깐만... 마츠...”

뚝.

무어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끊겨버린 전화.

몇 번이고 헛웃음을 친 렌카가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간다, 가.

가서 당당하게 마츠다의 소원을 들어주고 나오는 거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들면, 거시기를 차주면 되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달랜 렌카는 잠깐 멈칫하다가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두컴컴한 조명의 로비가 자신을 반긴다.

왜인지 모르게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싸구려 방향제 냄새가 안에 가득하다.

괜히 싱숭생숭해진 렌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마츠다가 말한 키오스크를 발견했다.

낯선 기계를 어찌 조작해 방 번호를 입력하자, 틱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래에 카드키가 나왔다.

‘보안이 왜 이렇게 허술해...?’

감시카메라로 다 지켜보고 있기야 하겠지만 사람이 한 명도 상주하지 않는 건 너무하지 않나?

러브호텔이라고는 해도 명색이 호텔인데... 혹시 반투명한 유리로 가려진 곳에 직원이 있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탄 렌카는, 애써 긴장한 기색을 숨기며 5층 버튼을 눌렀다.

이후 복도 가운데에 있는 호수가 표기된 간판을 보며 503호를 찾아,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카드키를 대었다.

삐빅.

기계음을 내며 열리는 문.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어둑한 복도와는 달리 밝은 빛이 새어나왔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방 안을 쳐다보며 일순 머뭇거리던 렌카는, 화장실 벽으로 가려진 코너 부근에서 마츠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를 꽉 물었다.

“왔어요? 들어오세요. 슬리퍼 있으니까 신발은 벗고.”

“.....”

순순히 슬리퍼로 갈아 신은 렌카가 자신의 길쭉한 다리를 움직였다.

성큼성큼 걸어가 방 안으로 진입한 그녀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막 샤워를 하고 나온 듯한 젖은 머리를 베개에 베고 태평하게 누워있는 마츠다였다.

기가 차지만 내색하지 말자.

그리 생각한 렌카가 입을 열었다.

“제약을 하나 더 추가해야겠어.”

“갑자기 뭔 소리에요? 그 얘긴 어제 다 끝내놨잖아요.”

“아니... 그러면 나는 계속 네가 언제 부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불안감에 떨라는 거야? 이번엔 내가 급한 일이 없어서 다행이지만... 그리고 입장 바꿔서 생각해봐. 네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상황에서 내가 호출을 해버리면 어떨 것 같아?”

그 말에 마츠다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음... 확실히 곤란할 것 같긴 하네요.”

“그것 봐...! 내가 바라는 건 사소해. 다음부터는 뜬금없이 부르지 말고, 이때 어디로 오라고 미리 말해달라는 거야. 나도 이런 소원을 빌게 되면 네 입장을 생각해줄게. 이러면 서로 형평성도 맞고 좋잖아. 그치?”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억지를 부릴 줄 알았는데 다행히 말이 통한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렌카가 물었다.

“그래서... 소원이 뭔데?”

“빌기 전에 그 전에 하나 물어볼 게 있습니다.”

“말해.”

“언제까지 돌아가야 돼요?”

“어딜?”

“집이요.”

“여기서 열 시엔 출발해야 돼.”

“내가 태워다준다고 하면?”

“.... 그러면 11시 30분까지는 가능할 것 같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거기 있으세요.”

고개를 주억거린 마츠다가 TV 리모컨을 조작하더니 예능 채널을 틀었다.

이후 아주 편안한 자세로 누워 감상을 하기 시작했다.

저놈이 대체 뭘 하는 건가 싶었던 렌카가 말했다.

“뭐해...? 소원 빌어.”

“빌었잖아요.”

“언제?”

“방금요. 거기 있으라고 소원 빌었잖아.”

“.....”

렌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자신이 그냥 가만히 서있는 게 소원이라고?

뭐 이런 소박한 소원이 다 있지?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마츠다의 행각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해보려던 찰나, 휴대폰 화면을 켜고 시간을 본 그가 말을 이었다.

“제가 말을 걸기 전까진 먼저 입을 열면 안 됩니다. 지금 시간이 일곱 시니까... 대충 네 시간 반 동안 서있으면 되겠네요.”

“.... 뭐? 그게 대체...”

벙 쪄있던 렌카가 숨을 헉 삼켰다.

마츠다가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대고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렌카를 지그시 올려다보던 마츠다는, 그녀의 입이 순간적으로 꾹 다물어지자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더니 다시 TV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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