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렌카를 내내 서있게 할 생각이 없었다.
다짜고짜 그 긴 시간동안 가만히 있으라고만 하면 반발심이 더욱 커지는 법이다.
렌카는 이런 식의 플레이를 처음 겪어보기도 하니, 초반엔 적당히 봐주는 편이 좋았다.
‘어? 편의는 봐주네? 그래도 나쁜 새끼긴 하지만.’
이 정도로 생각할 수준이면 된다.
렌카는 지금 30분이 지날 때까지도 아무런 말도 없이 얌전히 서있었다.
TV도 보지 않았다. 그저 바닥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미동도 없었다.
오랜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고역일 텐데, 내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버티고 있는 모양.
그런 렌카를 쳐다본 내가 말했다.
“부장.”
“.... 왜.”
“저기 앉아서 쉬어요.”
방 안에 준비되어있는 자그마한 테이블과 의자를 턱짓하자, 렌카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난 괜찮아.”
“쉬라니까요.”
강한 어조로 재차 말하니, 렌카의 한쪽 주먹이 콱 쥐어졌다.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듯 기다란 콧바람을 내쉬는 그녀.
그녀는 곧 내 말을 듣기로 했는지, 순순히 의자로 가 앉았다.
내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럴 경우 소원의 범위 안에 있다는 핑계로 명령을 내리려고 했는데... 의외다.
내가 소원을 쓰는 시간동안은 말을 들어야한다고 판단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렌카는 노예의 자질을 갖춘 거다.
TV로 눈을 돌리고 5분가량 조용히 있던 나는 다시 렌카를 불렀다.
“부장.”
“왜...”
“화장실 가고 싶으면 가도 됩니다.”
“별로.”
“배고프죠? 주문할 테니까 같이 먹어요.”
“난... 딱히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
“밥 먹고 왔나보네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먹어요.”
막무가내식 권유에, 렌카가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알았어.”
“카레 괜찮죠? 가라아게 들어간 거?”
“.... 괜찮아.”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터치패드로 음식을 주문했고, 조용히 TV를 보았다.
다시금 겸연쩍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한지 20분이 지나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카레 두 그릇을 받아, 렌카의 맞은편에 앉았다.
“드세요.”
“잘... 먹을게.”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플라스틱 수저를 드는 렌카.
거의 매일 포니테일에 도복, 혹은 제복만 입은 모습을 봐와서 그런지 색다른 느낌이다.
렌카가 카레를 한 입 뜰 때까지 기다리던 내가 물었다.
“오늘 뭐하다 왔어요?”
그러자 입가를 가린 채 카레를 꼭꼭 씹어 삼킨 렌카가 대답했다.
“쇼핑 좀 하고 있었어.”
“뭘 쇼핑했는데요?”
“속옷 구경하고 있었어. 이런 것까지 궁금해?”
속옷은 무슨.
애니 캐릭터 관련 굿즈라고 왜 말을 못하니.
그래도 꼬박꼬박 대답은 해줘서 다행이다.
“알겠습니다. 이제 드세요. 방해 안 할 게요.”
“.... 응.”
이어진 식사자리는 서로 식기를 드는 소리밖엔 들려오지 않았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방 안.
소원을 비는 입장인 나로선 상관없지만, 렌카는 조금 짜증이 날 거다.
혹시라도 내가 이상한 부탁을 할 수도 있으니 불안하겠지.
밥을 다 먹은 나는 그릇들을 복도 밖으로 치워놓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후 침대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시간도 아직 한참 남았는데, 저랑 뭐 하나 같이 보죠.”
“.... 알았어.”
조용히 일어난 렌카가 내 옆으로 다가와 TV를 보며 섰다.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한 차례 가벼운 웃음을 내뱉은 나는, TV와 연결된 OTT사이트를 통해 뭘 볼지 고르기 시작했다.
“이건 어때 보여요?”
“글쎄.”
“전쟁영화 좋아해요?”
“상관없어.”
“잔인한 건 잘 보고요?”
“가리지는 않아.”
“야한 건요?”
“.....”
렌카의 남색 동공이 내 쪽으로 돌아가는 게 보인다.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으로 날 빤히 쳐다보던 그녀의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마음대로 해.”
“농담입니다. 애니메이션도 괜찮아요?”
그 말에 렌카의 어깨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보고 싶은 걸 보면 되지, 왜 내 의견을 묻는 건데?”
“서로 흥미가 있는 영화를 보는 게 더 낫지 싶어서요.”
“네가 골라. 난 그냥 볼게.”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애니 목록으로 들어가 작품을 골랐다.
“이건 어떤 것 같아요? 로봇물인데... 극장판인가?”
“.... 딱히 재미는 없어 보이는데...”
“이건요? 추리물처럼 보이네요.”
“장르에 쓰여 있어. 미스터리라고.”
“평점이 낮네요.”
“못 만든 애니메이션이라는 거지.”
게다가 실사영화를 고를 땐 단답형으로만 답하던 렌카가, 애니를 고를 땐 조금이지만 사견을 집어넣고 있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아서 그런가?
숨기는 게 너무 어색하다.
아무 애니메이션을 튼 나는 손깍지를 끼고 뒤통수에 대었다.
다리까지 꼬아 아주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렌카가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어딘가 불편한 사람처럼 몸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애니 오프닝이 나올 때까지 그러고 있던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몇 시야?”
“먼저 말을 걸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 미안해. 잠깐 급한 일이 생각나서 그랬어.”
“그 일이 뭐죠?”
“집안일까지 말해야 돼?”
“아닙니다. 여덟 시 이십 분이에요.”
“그래...? 잠깐 전화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자리 좀 비워도 될까...?”
화장실이 가고 싶나보구나.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걸 보면 로비에 있는 화장실로 갈 생각인 듯하다.
이 정도는 봐주지.
대신 다음부턴 꼭 솔직하게 말하고 허락받아야 된다?
“10분이면 충분하죠?”
“.... 충분해.”
“다녀오세요.”
“알았어.”
카드키를 갖고 방을 나가는 그녀.
걸음걸이가 조금 급박해 보이는데, 어떻게든 제한시간 안에 돌아오려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
잘 키워서 훌륭한 노예로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오늘의 목적은 렌카의 가능성을 확인해보는 것이었다.
피지배에 얼마나 많은 반발심이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까탈스러운 렌카는, 나름 착하게 내 말을 따랐다.
따로 말을 잘 들으라고 조건을 걸지 않았음에도, 앉으라고 했을 때 잠자코 앉았던 일이나,
직접 시간을 봐도 됐을 텐데 내게 물어본 일이나...
그런 렌카의 반응을 되새겨보았을 때, 대단하진 않지만 소질은 있다고 생각되었다.
물론 지배를 받는 기쁨을 느끼게 하려면 힘들긴 하겠으나, 노력하면 뭔들 못할까.
렌카가 포악한 수컷에게 알아서 무릎을 꿇고 가랑이를 벌릴 때까지 열심히 조교하자.
**
“재미있지 않았나요? 특히 액션신이 화려했던 것 같습니다. 끝마무리도 만족스러웠고요.”
올라가고 있는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던 내 평가를, 렌카가 반박했다.
“아니. 왜 평점이 높은지 전혀 모르겠어.”
“그래요?”
“응. 개인적인 평가니까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진심으로 재미가 없었던 건지, 아니면 내 옆이라서 감정을 자제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내 눈으론 재미있긴 했는데...
뭐,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까 상관없지.
휴대폰으로 시간을 체크한 내가 물었다.
“30분 정도 남았네요. 오늘 어땠어요?”
“뭐가?”
“소원을 들어준 소감을 묻는 겁니다. 이런 것도 괜찮지 않아요?”
“진심으로 묻는 거야? 최악이었어.”
“그래요? 그럼 다음 소원은 놀이공원으로 할까요?”
“.....”
나와 단둘이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을까?
렌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뭐든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가긴 가겠지만... 즐겁진 않을 거야.”
“알고 있습니다. 농담이었어요. 제가 왜 부장이랑 그런 데를 갑니까. 분위기만 싸해질 텐데.”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네. 고마워.”
다행이라고? 심지어 고맙다고?
그 말, 오늘부로 담아두마.
네가 나와의 주종관계를 즐기기 시작할 때 어떤 식으로 말할지 보자고.
나는 슬슬 나갈 준비를 했다.
외투를 걸쳐 입고 차키를 챙기자, 렌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소원이 곧 끝날 거라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내 앞에선 애써 표정관리를 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지만, 티가 나서 괜히 빈정이 상한다.
가만히 서있는 렌카에게 다까이 다가간 나는, 그녀의 남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커지는 틈을 타 말했다.
“그렇게 좋아요?”
“무, 뭐가...!”
“소원이 끝나가는 게.”
“나, 나쁘지는 않지... 오늘 내가 받은 굴욕감도 생각해줬으면 좋겠는데?”
“손을 잡아달라거나, 안아달라거나 하는 것보단 나았다고 봅니다.”
“그런 건 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포옹 같은 게 성적인 행위인가요?”
“사, 사람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 너 설마 다음엔 그런 소원을 빌 셈이야...?”
“아뇨.”
단호하기 그지없는 내 말에, 렌카가 가슴에 손을 얹고 안도했다.
저도 모르게 나온 그 행동을 지켜보며 피식한 나는 카드키를 챙겼다.
“나가죠. 태워줄게요.”
“.... 응.”
나름 무던한 1회차 소원을 끝낸 우린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탔다.
렌카에게 주소를 물어 네비에 입력하고 말없이 차를 몬 나는, 낯익은 전통가옥이 보이자 차를 세우고 시간을 보았다.
“11시 20분. 빨리 도착했네요.”
“.... 그러네.”
“아쉬워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아줄래?”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요.”
“그래. 태워다줘서 고마워.”
감사인사는 해주네. 시시비비는 확실하게 가리는 것 같아서 웃기다.
급하게 조수석 문을 열고 내리려는 그녀를 지켜보던 내가 말했다.
“부장.”
“응?”
“조만간 하나 더 쓸게요.”
“뭐를? 소원을?”
“예.”
“너무 빨리 쓰는 거 아니야?”
“걱정해주는 거예요?”
“그럴 리가 있겠어?”
“장난 한 번 쳐봤습니다. 소원의 유효기간은 짧아요. 빨리빨리 소진해버려야죠. 뭘 빌까 고민만 하다가 혹시라도 기간을 놓쳐버리게 되면 아깝잖아.”
“.... 그래. 네 말이 맞네. 나도 곧 하나 쓸 거니까 기대해.”
어떤 거창한 소원이길래 기대하라는 말까지 하는 걸까?
뭐든 당당하게 받아주마.
여유롭게 고개를 주억거리자, 이런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술을 잘근 깨문 렌카가 차 문을 닫았다.
기다란 다리를 쭉쭉 뻗어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렌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그녀가 뒤를 흘끔 돌아보려고 할 때쯤 차를 출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