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나 미유키의 집으로 간 나는 차를 세우자마자 안전벨트를 풀었다.
미유키의 옆에 미도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빨리 차에서 내린 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안녕, 마츠다 군. 오랜만이네?”
미도리는 반쯤 몸에 달라붙는 단색 원피스에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몸의 굴곡이 그대로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드러나는 핏.
안 그래도 큰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골반이 부각되는데, 복장 불량으로 훈육을 해주고 싶은 마음을 참아낸 내가 대답했다.
“예.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우리야 잘 지내지. 그나저나 최근엔 집에 오지도 않고... 조금 서운하네?”
“죄송합니다.”
“농담이야. 언제 시간 나면 같이 밥 먹자. 그리고 이거 가져가.”
손에 들고 있던 세로로 기다란 보따리 두 개를 내미는 미도리.
무심코 그것을 받아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뭔가요?”
“애아빠가 어제 손질된 장어를 좀 많이 사와서 양념구이로 만들어봤어. 오늘 점심에 미유키랑 같이 먹어. 분홍색은 네 거고, 파란색은 테츠야 군 거야.”
이런 걸 만들어주시면 어떡해요.
오늘 밤에 주무시지 말고, 새벽 한두 시쯤 나와서 대기하세요.
뒷좌석 폴딩해놓고 갈 테니까.
“장어구이요? 요새 먹고 싶긴 했는데...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아냐. 귀찮을 텐데 계속 미유키를 데리고 가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힘든 일도 아닌데요.”
“그렇게 말해줘서 더 고맙네? 우리 미유키를 잘 부탁해.”
어딘지 모르게 중의적으로 느껴지는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지은 미유키가 팔꿈치로 미도리의 허리를 콕 찔렀다.
“엄마...!”
“뭐하는 거니 지금?”
“아니이...!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이게 어딜 봐서 이상한 소리야? 얼른 학교나 가.”
“응...”
엄마의 타박을 듣고 몸을 축 늘어뜨린 미유키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미도리와 작별인사를 나눈 내가 차에 타자,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탄 미유키가 문을 닫더니 말했다.
“그거 내가 만들어달라고 안 했어.”
장어구이 도시락을 말함이었다.
하필 미도리가 만든 게 정력에 좋은 음식의 대명사다보니,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할까봐 우려스러운 모양이었다.
도시락 보따리를 뒷좌석에 조심스레 실어놓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뭐래?”
“.... 짜증나.”
“욕한 거야?”
“욕 안 했어어...!”
말끝의 톤을 살짝 올리며 앙탈을 부리는 모습이 귀엽다.
실소를 터뜨린 나는 차를 아주 천천히 출발시키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아주머니도 우리 사이를 어렴풋이 눈치채신 것 같은데, 이제 그냥 우리 집에서 잔다고 해라.”
“뭐래... 엄마는 아직 모르거든?”
“그건 네 생각이지. 직접 물어봤어?”
“몰라... 빨리 가...”
아침부터 새침한 미유키... 나쁘지 않다.
그런데 카나는 벌써 갔나?
저번 사건 이후로 날 보면 당황해할 텐데, 항상 나한테 장난을 치던 그녀의 확 뒤바뀐 태도가 보고 싶긴 하다.
주말에 미유키의 집에 들러서 밥이라도 먹을까 싶다.
**
“야, 빵녀.”
“콜록! 응...?”
“오늘은 무슨 빵이냐?”
“이, 이거... 토마토 파스타 고로케인데...”
“아침부터 튀긴 거 먹으면 안 느끼해?”
“괜찮... 콜록! 괜찮은데...”
여전히 소심한 빵녀와 대화를 나누던 내 등을, 미유키가 다소 강하게 쳤다.
“아! 뭐야?”
엄살을 피우며 미유키를 노려보자, 그녀가 엄한 눈빛으로 날 나무랐다.
“먹고 있는데 방해를 하면 어떡해? 마사코가 힘들어하잖아.”
“그냥 이야기하는 건데?”
“마츠다 군은 얼굴이 너무 험악해서, 말을 거는 것 자체가 방해야.”
“억지 부린다 또.”
“억지가 아니라 사실이야. 이러지 말고 수업 시작 전까지 어제 배웠던 거 복습해.”
“뭔 복습이야... 시험기간도 아닌데.”
“평소에 꾸준히 복습을 해서 머릿속에 집어넣어놔야 기말고사도 잘 보는 법이야. 요새 중간고사 잘 봤다고 자만하는데, 그러다 예전처럼 꼴등한다?”
“재수 없는 소릴 하고 있어...”
투덜거리면서도 말은 곧 잘 듣는 내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앞자리에 앉아있던 빵녀와 부반장이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나중에 나한테 박히게 되면 앙앙거릴 텐데, 많이들 쪼개둬라.
“미유키, 어제 영상통화로 가르쳐줬던 풀이가 헷갈려서 그런데... 좀 알려줄래?”
화기애애한 우리 쪽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수학책을 한손에 든 테츠야가 의자를 끌고 다가와 미유키의 바로 뒤에 앉았다.
그에 미유키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이야. 뭐가 궁금해?”
“이거.”
“아... 거기? 어제 많이 어려워하긴 하더라. 일단 처음엔...”
꼼꼼하게 과외를 해주기 시작하는 미유키.
테츠야의 미유키를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적극적으로 변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냥 바퀴벌레 같은 존재가 저러니 같잖기만 하다.
“이해했어?”
어느새 자세한 풀이를 끝낸 미유키의 물음에, 테츠야가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비듬 떨어지겠다 씨발아.
“대충 이해한 것 같아.”
“그러면 여기서는 혼자 풀어보구, 정 이해가 안 되면 그때 다시 물어봐.”
“알았어.”
“다른 건 안 궁금해?”
“음... 일단 이것밖에 없어. 고마워.”
자리에서 일어난 테츠야가 방긋 웃어보이더니, 내 눈치를 흘끗 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 미유키한테 시원한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하는 게 티가 났는데...
왜 저런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는 거지?
혹시 어제 영상통화로 수업을 하다가 이상형 이야기라도 나왔나?
미유키가 미소가 멋진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저런 식으로 구는 건가?
뭐가 됐든 날 계속 의식하는 모습도 한두 번이어야지, 계속 저러니까 파리가 왱왱거리는 듯해서 거슬린다.
죽통이라도 갈기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지 싶은데, 기회가 없으려나?
**
“아... 그래서 이럴 땐 아래로 쳐내는 거군요.”
“응. 다시 자세를 잡기가 쉽지 않지?”
“예. 오늘도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아냐. 네 태도가 좋으니까 가르치는 맛도 나네? 앞으로도 열심히 하자.”
“물론입니다, 부장.”
훈훈한 덕담을 주고받는 렌카와 테츠야.
생수통을 옮기며 그런 두 사람을 쳐다보던 나는, 렌카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목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부장.”
어제 있었던 일을 상기한 듯 몸을 부르르 떠는 그녀.
여기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와 렌카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상한 망상을 했는지 약간 심각한 낯짝으로 변하는 테츠야까지...
아주 마음에 드는 장면이다.
“.... 안녕.”
마지못해 인사를 받아주는 렌카를 보며 히죽 웃어보인 나는 일을 마무리했고, 치나미가 있는 보관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므아? 오혀혀요?”
입을 열심히 우물거리고 있던 치나미가 날 반겼다.
잔뜩 부푼 볼을 보니 큼지막한 무언가를 집어넣은 모양인데...
미간을 좁힌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혼자 뭘 먹고 있었던 거죠?”
“헉.”
“뭐라고요?”
“헉.”
“떡?”
고개를 끄덕끄덕 위아래로 움직이는 치나미에게서 아주 강한 복숭아 향이 풍겨왔다.
고작 떡을 먹은 건데 왜 뺨이 빵빵하지?
크기가 좀 큰가?
“힘흐어요.”
“힘들어요?”
“녜...”
그래 보이긴 하네.
나는 보관실에 있는 티슈를 두 장 뽑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겹쳤다.
이후 치나미의 입가에 손을 내밀었다.
“뱉어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데, 아까워하는 것 같다.
“안 뱉으면 턱이 사각형으로 변해버리고 말 걸요?”
“녜에에...?”
농담을 곁들인 말에 경악한 치나미가 티슈를 쏙 빼앗아 가져가더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안간힘을 쓰며 입 안을 꽉 채운 떡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므에엑...”
괴이한 소리를 내고는 티슈로 떡을 감싼 치나미가 그것을 쓰레기통으로 쏘옥 집어넣었다.
“후아...! 힘든 사투였어요... 물론 제가 자처한 일이긴 했지만요.”
“무슨 떡을 먹었는데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있었던 겁니까?”
“이거예요.”
보관실 구석에 있는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 무언가를 꺼낸 치나미가 내게 그것을 내밀었다.
그건 크기가 무척 큰 살구색 떡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종류. 건드려보니 심지어 딱딱하기까지 했다.
신기한 눈으로 떡을 살펴보고 있는데, 자신의 턱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치나미가 이게 뭔지 설명을 해주었다.
“초등학생 조카가 학교에서 만든 떡이에요. 절 위해서 복숭아 맛으로 만들었대요.”
“.... 그래요? 그럼 조금씩 뜯어 먹으면 되지, 왜 굳이 한 번에 넣었죠?”
“조카가 떡을 한입에 먹는 제가 보고 싶다고 해서... 입에 넣고 사진을 찍은 다음 다시 뱉어내려고 했는데 빠지질 않았어요. 씹어서 없애려고 했는데 너무 딱딱하더라구요.”
조카가 장난꾸러기구나.
하긴, 초등학생들이 다 그렇지.
“매번 말하지만 우리 스승님은 순진해서 탈입니다.”
“탈이 날 정도인가요? 그것 참 큰일이로군요. 앞으로는 악독해지도록 노력해볼게요.”
넌 악독한 짓을 해도 깜찍하게 보일 텐데?
음모를 꾸미지만 매번 실패하는 악당 같은 느낌이라서, 오히려 더 어울릴 것도 같아.
“응원하겠습니다. 혹시 모레 시간 돼요?”
“콩닥콩닥 마사지를 해주시는 거라면 돼요.”
“그건 다음에 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렇군요... 내일은 뭘 하시려는 건가요?”
“미유키랑 같이 셋이서 아이스크림이나 먹을까 해서요.”
“하나자와 후배님이랑요? 저야 아주 좋지요!”
손뼉까지 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데,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것 자체가 좋나보다.
“약속한 겁니다?”
“네! 내일 하나자와 후배님과 모모님에 관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어봐야겠네요.”
“모모님은 왜요?”
“그야 당연히 하나자와 후배님을 모모단 멤버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지요. 음음... 아주 바람직한 일이에요.”
미유키를 타락시키겠다니, 포부가 크구나.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다.
“응원할게요. 그럼 모레는 부활동이 끝나면 저랑 같이 돌아가죠.”
“알겠어요.”
**
“마츠다.”
주차장에서 미유키를 기다리고 있던 나를 부르는 테츠야.
목소리가 가라앉아있는 것이, 무언가 하고자 하는 말이 있는 듯했다.
“왜.”
“부장이랑 무슨 일 있었어?”
뭔가 온다.
테츠야가 똥볼을 찰 거라는 느낌이, 놈의 열등감이 터질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와.
차에 기대어 휴대폰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똑바로 서서 놈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라니?”
“아까 네가 인사했을 때, 부장 눈빛이 심상치 않길래... 부장은 별 일 없다고 하셨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서.”
“그러냐? 넌 눈빛만 봐도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나보다?”
“그럴 리가 있겠어? 그냥 느낌이지.”
“아무 일 없었어. 별 시답잖은 걱정을 다 하네.”
“그럼 다행이고. 점심에 먹은 장어구이... 맛있었지?”
“어. 맛있더라.”
“장어구이는 미유키네 어머니가 잘 해주시는 음식이 아닌데, 오늘 운이 좋았어.”
자신은 미유키의 어머니가 해준 음식을 자주 먹는 사람이라고 은근슬쩍 돌려 말하고 있다.
나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가보네.”
“그나저나 의외다.”
“네가 미유키랑 그렇게까지 친하게 지낼 줄은 몰랐어. 미유키는 한 번 싫어하게 된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호불호가 확실한 앤데...”
호불호가 확실하다고?
미유키가 나와 그렇고 그런 일을 할 때 얼마나 우유부단한지 알면 그런 말 못할 걸?
“날 죽을 만큼 싫어하지는 않았나보지.”
“에이... 그건 아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손사래를 치는 테츠야.
슬슬 신경을 긁고 있는데, 흥미롭다.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 나는 놈의 어깨를 툭 쳤다.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냐?”
“아니 뭐... 저기 미유키 온다. 다음에 이야기하자.”
내 어깨너머를 본 테츠야의 말.
뒤를 보니 과연 놈의 말마따나 미유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놈의 뺨따구를 갈길 명분이 생길 것 같았는데... 아깝다.
아쉬운 마음을 달랜 나는 운전석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