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22화 (122/313)

“들어가라.”

“응. 내일은 중간에 어디 들를 데가 있어서 혼자 갈게.”

“그러냐? 알았다.”

“태워줘서 고마워.”

높낮이가 일정한 톤으로 감사인사를 건넨 테츠야가 차에서 내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소 강하게 닫힌 뒷문.

가끔 저러긴 하지만 하필 오늘 같은 짓을 한 게 공교롭다.

사람이 왜 저렇게 찌질할까.

내가 이벤트를 챙겨주지 않았다면 그냥 도태되었을 놈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진다.

짜증이 확 솟구친 나는 창문을 열고 놈을 쏘아붙이려다가, 미유키의 얼굴을 보고 화를 삭이는 척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내 행동에 뒷좌석 문과 집으로 돌아가는 테츠야를 번갈아 쳐다본 미유키가 조심스레 말했다.

“마츠다 군... 너무 화내지 마. 내가 테츠야 군한테 뭐라고 할게.”

“화 안 났어.”

“거짓말... 뒷문 세게 닫아서 화났잖아. 자기 차도 아닌데 저러면 나라도 열 받을 것 같아.”

“아냐. 됐어. 고장 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넘어가야지.”

이런 건 자비롭게 넘어가주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래야 내 평가가 더더욱 오르고, 테츠야가 쌓은 업보가 더 크게 돌아가는 법이다.

“.... 되게 착하네?”

“속으론 몇 대 때렸다.”

농담을 곁들이며 차를 출발시키자, 킥킥거린 미유키가 아날로그식 기어봉을 잡고 있는 내 손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리고는 손등을 살살 긁어주기 시작했다.

“둘이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라니?”

“아니... 차 안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서... 약간 삭막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들었어.”

“그래? 별 일은 없었는데.”

“그럼 다행이구... 근데 마츠다 군... 많이 발전했다...”

“낯간지러운 소리 할래?”

“좋으니까 이러는 거지...”

“좋다고?”

“응. 엄청 좋아.”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뭐가?”

“좋으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글쎄?”

알면서 모르는 척 발뺌을 하는 게 어이가 없다.

여우같아가지고...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나는 미유키의 집 앞에 도착해 차를 세웠다.

그러자 배시시 웃은 미유키가 안전벨트를 풀고 상체를 쭈욱 당기더니 자신의 입술을 들이밀었다.

촉촉하고 도톰한, 그리고 말랑한 살갗 사이에서 빼꼼 튀어나오는 혀.

그것이 내 입술 안쪽을 어루만지듯 살피는 것을 느낀 나는, 미유키의 잘록한 허리를 감싸 안고 끌어왔다.

후우욱 하고 인중을 간지럽히는 미유키의 후끈한 콧바람을 느끼며, 나는 미유키와 짧은 시간동안 격렬한 키스를 해나갔다.

이후 차 안의 공기가 달아오를 때쯤 그녀의 둔부를 토닥였다.

그에 미유키가 몽롱해진 눈빛으로 얼굴을 떼어냈다.

부끄러워선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표정으로 내게 마무리 키스를 해준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챙기며 문을 열었다.

“갈게...”

“그래. 근데 상은 안 주냐?”

“상...?”

“중간고사 14등.”

“.... 잘했다고 칭찬해줬잖아... 합숙훈련 가있는 동안 사진도 보내줬고...”

“그게 뭐가 상이야? 그냥 내가 알아서 받는다?”

“무, 뭘 알아서 받는데? 어떤 식으로...?”

“나중에 말해줄게.”

“.....”

눈을 데굴 굴리는 미유키가 순순히 차에서 내렸다.

내가 또 무슨 장난을 칠까 불안하지만, 기대감 또한 조금이나마 있는지 알려달라며 떼를 쓰지 않는 모습이 귀엽다.

“.... 조심히 들어가.”

“알았어.”

그렇게 미유키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신호를 잘 지키면서 동네로 통하는 골목으로 좌회전을 하려던 나는,

쿵.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묵직한 소리와 동시에, 내 상체가 앞으로 살짝 기울자 숨이 턱 막혀왔다.

“하...”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테츠야가 깝친 날에 사고가 나다니...

고구마를 한가득 처먹은 느낌이다.

신님. 이벤트를 이딴 걸로 갖고 오면 어떡합니까? 지금은 히로인도 없는데.

게다가 쿵이 아니라 콕 정도면 딱 좋았잖아요.

신앙심이 막 사라지려고 하네. 혹시 결혼하셨어요?

아니, 아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원래라면 차가 반파됐을 정도로 심했을 사고를 신님께서 봐주신 거다.

그래도 이곳에 와서 처음 산 차인 만큼 정을 주고는 있었는데... 아픈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입술을 푸르르 털어 심란한 마음을 날려버린 나는 차에서 내렸다.

“조,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날 보자마자 연신 사과를 하는 여자.

중년 미시 특유의 농염함이 드러나는 얼굴이다.

왼손 약지에 낀 결혼반지도 눈에 띠는데, NTR 야동에서 진득하게 나오는 스토리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괜찮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한손을 들어올린 나는 뒷 범퍼를 확인해보았다.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패이긴 했다.

부품을 구하기 쉬운 인기 차종이라, 곧장 정비소로 달려가면 하루 안에 고칠 수 있을 것 같다.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으며 상태를 체크해본 내가 말했다.

“이 정도면 심한 건 아니네요. 근데 왜 사고를... 신호 못 보셨어요?”

“한눈을 팔았습니다. 제 잘못이에요. 정말 죄송해요...”

음음... 삭막한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솔직한 사람이다.

얼굴도 예쁘고... 그러니까 봐준다.

“그냥 넘어가기는 뭣하고, 2만 엔만 주시면 알아서 처리할게요.”

“네...? 교체가 필요해 보이는데... 2만 엔보다 훨씬 더 비싸지 않나요?”

“중고 부품 끼워 맞추면 됩니다.”

“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잠시만요...”

호들갑을 떨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던 여자가 멈칫했다.

그녀의 시선은 내가 입고 있는 제복 와이셔츠에 가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표에 말이다.

“저... 혹시 예보니 아카데미 학생이세요? 제복이...”

이건 예상치 못한 반응인데...

왠지 미담이 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혹시 교장의 딸인가?

“예. 왜요?”

“아, 아니에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기요...”

두 손으로 돈을 내밀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는 여자.

그것을 받아든 내가 말했다.

“그럼 수고하세요. 운전 조심하시고요.”

“아, 네...! 감사합니다...!”

**

“갑자기 왜 역에서 만나자고 해? 그... 상이라는 걸 받을 생각이야?”

다음날 아침, 나와 역 앞에서 만난 미유키의 물음.

혼자 망상에 빠져든 그녀가 웃겼던 나는 피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 차가 정비소에 들어가있어서. 고치려면 하루 걸린대.”

“정비소? 고장이라도 났어?”

“아니. 접촉사고 때문에.”

“뭐어어...?”

미유키의 눈이 부릅떠졌다.

잠시 멍하니 그러고 있던 그녀는, 내 진지한 표정을 보더니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는 내 가슴을 찰싹 때렸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미리 말을 해야지...! 왜 지금 얘기하는데?”

“큰 사고도 아닌데 뭘...”

“왜 이렇게 태평한 소리를 하지...? 마츠다 군은 가끔 보면 이상해... 바보 같아.”

“바보면 14등이나 못하지.”

“그놈의 14등... 기말고사까지 우려먹는 건 아닌가 몰라... 다친 곳은 없어?”

“접촉사고라니까. 경미한 거.”

“그러면 보험처리 한 거야?”

“아니. 자기 잘못이라고 순순히 인정하고 사과하길래, 돈 조금 받고 그냥 보내줬어.”

“아 그래...? 요새 왜이래...? 뭐 잘못 먹었어?”

착한 짓을 해도 칭찬은 못해줄 망정, 뭘 잘못 먹었냐니...

주말에 혼내준다.

“가기나 하자. 늦겠다.”

“응... 진짜 다친데 없지?”

“없다니까.”

손을 휘저어 상황을 넘긴 나는 미유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그녀가 기겁을 하더니 몸을 옆으로 쏙 뺐다.

“뭐하는 거야...!”

“그렇게까지 놀라면서 피할 일이냐? 우리 사이에 어깨동무도 못해?”

“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럼 뭐가 문젠데?”

“.....”

주위를 두리번거린 미유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닿잖아...!”

“뭐가 닿아.”

“마츠다 군 팔이 너무 길어서... 손이 가슴에 닿는다구...”

어깨동무가 창피한 게 아니라, 그것 때문에 부끄러웠던 거구나.

하긴, 미유키의 큰 윗가슴에 내 손이 올라가있으면 주목을 받을 것 같긴 하다.

“어, 어깨동무는 안 돼. 손만 잡아...”

이어지는 미유키의 말에 씨익 웃은 내가 물었다.

“손은 잡아도 돼? 벌점 받을 텐데?”

“그건 일탈행위를 했을 때만 받는 거지...!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아까 어깨동무도 벌점 감이야... 손이나 내놔.”

그리 말한 미유키가 내 손을 마치 물건 빼앗듯 잡아채더니 깍지를 껴왔다.

홍조 띤 얼굴로 겹쳐진 손과 나를 번갈아보던 그녀는, 이내 자신이 앞장서서 역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엔 예보니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더러 있는데... 이 정도 스킨십은 이젠 대놓고 해도 상관없는 건가?

다정한 커플이 사이좋게 등교하는 클리셰... 나쁘지 않네.

테츠야가 이 자리에 없는 게 천추의 한이다.

**

출근, 등교 시간이라 사람이 많은 전철 안.

미유키를 구석에 두고 몸으로 앞을 막은 나는, 그녀의 앞머리에 묻어있는 흰색의 무언가를 떼어내 주며 조용히 장난을 쳤다.

“비듬 묻었다.”

그러자 여전히 나와 손깍지를 낀 채 밀착하다시피 붙어있던 미유키가, 자신의 자유로운 한손으로 내 복부를 가볍게 때렸다.

“이게 뭐가 비듬이야... 유치한 장난 좀 치지 마... 재밌어?”

“어.”

“반응을 해주지 말든가 해야지...”

말끝을 흐린 그녀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내 새끼손가락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깍지 낀 손을 끌어올려 손등에 입술을 꾸욱 누르기도 하며 풋풋한 애정을 드러내는 그녀.

야한 짓을 하는 것보다 훨씬 달콤했기에, 살웃음을 지은 나는 얌전히 미유키의 애교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아카데미와 가까운 역에 도착한 나는 미유키를 데리고 전철에서 내렸다.

이후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일을 보고 밖으로 나오니, 역 계단 앞에서 미유키와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남자는 오늘 어디 들를 데가 있다면서 혼자 가겠다던 테츠야였다.

“이거 그거네? 내가 좋아하는 노트.”

“응. 저번에 같이 샀던 거. 마침 나도 다 쓴 상황이라서, 문구점에 들려서 샀어. 물론 네 것도.”

“아 진짜? 그러면 내가 교실에 들어가서 돈 줄게.”

“아냐. 이번엔 내가 살 테니까 다음엔 네가 사. 근데 웬일로 전철을 타고 와? 마츠다는 어디 가고?”

대화내용을 들어보니 대충 윤곽이 잡힌다.

내가 미유키에게 사주었던 노트와 필기구를 그녀가 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교체하려고 했던 거구나.

음습함 하나만큼은 나보다 더 뛰어난 놈이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 꼴을 보니 눈살이 찌푸려져.

미유키와 우연히 마주친 모양인데... 순간 머릿속에 어떠한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혹시 신님께선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바를 실천하라는 뜻에서 어제 접촉사고를 일으키신 게 아닐까?

아마 그런 것 같다.

그래, 찌질한 테츠야에게서 히로인들을 빼앗아야하는 사명을 가진 내가 도키아카의 주인공인 이상, 이런 이벤트가 없으면 안 되지.

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미유키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나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태연스레 인사를 건넸다.

“미우라네? 언제 왔냐?”

“어...?”

자신의 소꿉친구의 어깨에 둘러진 우람한 팔과 윗가슴에 살짝 닿는 큼지막한 손.

그것을 본 테츠야가 입을 쩌억 벌렸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인데, 도발이 아주 잘 먹혀들어간 듯하다.

“마츠다 군...! 내가 이거 하지 말랬잖아...!”

“미안, 미안.”

미유키에게서 떨어진 나는 그녀를 피해 역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씩씩거리던 미유키는, 테츠야에게 얼른 가자고 말하며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짓궂은 장난을 친 주인공을 타박하려는 히로인.

개구쟁이 같은 남자가 주인공인 러브 코미디물의 필수 클리셰다.

지금 상황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떨거지가 한 마리 있어서 약간의 NTL 느낌을 풍기게 되었다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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