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23화 (123/313)

“미우라?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왜 저기압인 것 같지?”

친절하기 그지없는 렌카의 목소리에, 기계적으로 죽도를 휘두르고 있던 테츠야가 흠칫했다.

오늘 하루 종일 아침에 있었던 일만 생각하면서 얼을 타고 있는데, 계속 그랬다간 네 멘탈만 터질 거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딱히 일은 없었는데요...”

“그럼 다행이고. 타돌 후의 자세가 무너지는데, 집중해서 잡아봐.”

“네, 부장.”

“항상 힘내고. 응원하고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다시금 연습을 시작하는 테츠야의 낯빛은 조금 돌아와 있었다.

렌카의 격려에 힘을 얻은 모양인데... 참 꼴불견이다.

작게 콧방귀를 낀 나는 묵묵히 마른수건을 개다가,

“마츠다.”

쩍쩍거리는 죽도의 타격음 사이로 렌카의 부름이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이리 와봐.”

부실 구석에서 내게 손짓을 하는 렌카.

수건을 마저 개고 그녀에게 다가간 내가 물었다.

“왜요?”

“토요일에 시간 돼? 소원 쓰려고 하는데.”

하필이면 토요일이냐.

전날 미유키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편히 쉬어야하는데...

여기서 곤란하다고 해버리면 물러나는 것처럼 보일 테니 어쩔 수 없지.

“됩니다.”

“무슨 소원인지는 안 물어봐?”

“어련히 잘 알려주겠죠.”

“.... 좋아. 금요일에 시간이랑 위치 찍어줄 테니까 다음날 그쪽으로 와. 기름 값은 당연히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름 값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먼 곳인 듯했다.

아니면 내게 사소한 빚조차 지는 게 싫어서, 짧은 거리지만 그냥 준다고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알겠습니다.”

“복장은 운동복, 아니면 활동하기 편한 거면 돼.”

농사라도 짓게 할 심산인가?

중노동을 시켜서 혼을 쏙 빼놓는다... 뭐 이런 올드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소중한 소원권을 그런 곳에 사용하겠냐 싶지만...

나와의 관계에 거리가 있는 지금, 딱히 쓸 만한 소원이 없는 상태에 유효기간이 한 달이라 빨리 써야하기도 해서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예. 말씀은 다 끝났어요?”

“.... 끝났어.”

“그럼 일하러 갈게요?”

“그래.”

그렇게 남은 일을 처리하던 나는 부실 문이 열리며 6, 7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땀을 흘리며 수련을 하고 있는 부원들을 쳐다보며 어물쩡거리던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렌카가 다가가자 그녀와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더니 함께 감독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덜컥.

“마츠다!”

감독실 문이 힘차게 열리며 고로가 튀어나오더니 날 찾았다.

**

따사로운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그의 앞에서 쩔쩔매는 고로, 그리고 열중쉬어 자세로 서있는 렌카.

감독실에 있는 세 사람을 둘러본 나는, 어찌된 일인지 대충 촉이 왔다.

‘어제 일 때문이구나.’

접촉사고를 낸 여자가 제복을 알아보고 이름표를 유심히 봤었는데, 그와 관련된 일이 분명했다.

“교감 선생님이시다. 인사드려라.”

날 부를 때와는 달리 온화한 말투로 남자를 소개하는 고로.

교장의 딸이 아니라 교감의 딸이었구나.

누구 딸이면 뭐 어때. 나이답지 않게 젊어 보이고 예쁘면 됐지.

“안녕하세요. 마츠다 켄입니다. 혹시 제가 무슨 사고를 쳤나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자, 백색 수염을 풍성하게 기른 교감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런 게 아니다. 혹시 어제 네리마구로 통하는 골목에서 접촉사고를 당하지 않았니?”

“예. 어떻게 아셨어요?”

“그 접촉사고를 낸 장본인이 내 딸이라서 말이야.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찾아왔단다.”

아쉽다.

차라리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교실로 찾아오든가 하지, 하필 검도부에서 감사를 표하다니.

그래도 뭐... 이런 미담은 누구의 앞에서든 쌓이면 좋은 거니까 넘어가자.

“아... 어제 뵀던 그분이 따님 되시는 분인가요?”

“그래. 돌아와서 우리 아카데미의 마츠다 켄이라는 학생이 너그럽게 넘어가줬다며 좋아하더구나. 이름을 들어보고 내가 아는 마츠다 켄인가 긴가민가했는데 사실이었다니 놀랐다.”

교무 쪽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인 이상, 내 소문을 들어보지 않았을 수가 없겠지.

무안한 듯 머리를 벅벅 긁은 내가 말했다.

“제가 좀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하긴 합니다.”

“예전엔 그랬지. 지금은 아니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개과천선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가 좋더구나. 그런데... 혹시 어제 딸에게 돈을 받은 이유를 알 수 있겠니?”

굳이 안 받아도 되는 돈을 받았다며 책을 잡으려는 건 아닌 듯하고, 내가 당시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냥 넘어가면 안일하게 생각해서, 또 그런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훌륭하구나.”

“과찬이십니다.”

“차는 괜찮고? 수리비가 많이 나온다면 내가 고쳐주마.”

“아닙니다. 문제는 전혀 없어요.”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눈 교감은, 마지막으로 내게 정중한 감사를 표하며 감독실을 나갔다.

그때까지 입꼬리를 씰룩거리고 있던 고로가 내 어깨를 강하게 쳤다.

“잘했다, 마츠다. 아주 좋은 일을 해줬어.”

“우연히 이런 일도 일어나네요.”

“그러게 말이다. 우리 검도부엔 아주 경사스러운 사건이지. 내년엔 예산이 조금 늘어날 수도 있겠어.”

교감의 이미지를 보면 공과 사는 구분하는 것 같던데, 과연 그렇게 해주려나?

차라리 나한테 개인적인 보상을 줬으면 좋았을 텐데... 딸의 몸 같은...

“그럼 내년 합숙은 온천으로 가나요?”

“내년까지 네가 남아있다면 고려해보마.”

나와 간단한 농담을 주고받은 고로는 부원들의 훈련을 봐주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 조용히, 의외라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던 렌카가 말했다.

“놀랍네.”

“뭐가요?”

“아냐. 잘했다고.”

“부장에게 듣는 칭찬이라... 기분이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네요?”

“.... 너는 칭찬을 해줘도...”

“농담입니다.”

“하아... 내가 미쳤지... 나가자.”

자조적인 투로 그리 말한 렌카가 감독실 문을 열었다.

날 향한 렌카의 평가가 조금이나마 오른 건가?

그래봐야 조교할 때 다 까먹겠지만... 좋은 평가로 나쁜 평가를 상쇄한다고 생각하면 나쁜 일은 아니다.

**

“드디어 내일이로군요.”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마냥 전의를 다지는 치나미.

갈아입은 제복 와이셔츠를 대충 툭툭 털어낸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내일이네요. 근데 왜 긴장을 하고 있어요?”

“어허...! 긴장이 아니라 기대감이에요. 하나자와 후배님께서도 내일을 고대하고 계시겠죠?”

“물론 그럴 겁니다.”

“후후... 좋아요. 내일은 제가 아이스크림을 사도록 할게요.”

“굳이 그러실 필요까진 없다고 봅니다만...”

“새로운 인연이 될 후배님을 만나는 기념비적인 날인데, 선배가 되어서 얻어먹을 수는 없지요. 그렇게 알고 계세요.”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더욱 앙증맞아 보인다는 걸 너는 알까?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내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치나미! 빨리 와!”

오붓한 대화를 나누는 도중 들려오는 렌카의 목소리.

고개를 돌린 치나미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갈게요! 그럼... 후배님, 내일 뵈어요.”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발랄하게 한손을 마구 흔든 그녀는 곧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렌카에게 다가가는 걸 보니 깨물어주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치나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아빠미소를 짓고 있던 나는,

“마츠다. 가자.”

방해꾼 한 마리의 거슬리는 음색을 듣고 몸을 돌렸다.

“놔두고 온 거 없냐?”

“없어. 네 차는 오늘 찾아가는 거야?”

“어.”

“뒷범퍼가 나간 거면 돈 많이 들지 않아?”

“별로 안 들더라.”

“다행이네. 걱정했다.”

걱정은 개뿔... 가식을 떠는 꼴을 보아하니 혐오감이 충전되려고 한다.

그렇게 테츠야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며 정문으로 가던 도중,

“아까 나나세 선배께서 미유키를 언급하신 것 같았는데... 맞아?”

땅바닥을 쳐다본 채 걸음을 옮기고 있던 테츠야가 본론을 꺼냈다.

손깍지를 끼고 뒤통수에 갖다 대며 하품을 한 내가 대답했다.

“아... 그거? 맞아.”

“무슨 얘기했어?”

“아이스크림 얘기. 내일 먹기로 했거든.”

“아이스크림? 둘이 아이스크림을 먹어?”

“나 포함 셋이서.”

그 말에 테츠야의 입이 순간 꾹 다물렸다.

짜증이 나는 건지, 질투가 나는 건지 제대로 분간이 안 되는데...

둘 다여서 저딴 못생긴 표정이 나타나는 거겠지?

“.... 미유키도 동의한 거야?”

“당연히 했지.”

“네가 뭐 강제로 가자고 한 건 아니고?”

이건 무슨 망상이래?

“강제는 무슨 강제야. 내가 가자고 했다고 미유키가 순순히 갈 애냐?”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해. 네가 미유키의 약점을 빌미로 협박 같은 거라도 했다면 모를까... 아, 이거 장난인 거 알지? 기분 나빠하지 마.”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발을 멈추고 테츠야를 정면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놈의 뺨을 가볍게, 그저 따끔함 정도만 느낄 정도로 쳤다.

툭.

“억!?”

짤막한 비명을 터뜨리며 자신의 뺨에 손을 가져가는 테츠야.

설마 내게 맞을 줄은 몰랐는지 눈알이 두 배는 더 커져있는데, 상당히 놀란 것 같다.

“야, 돌았냐?”

“무, 뭐...?”

“사람 속을 박박 긁어놓고 장난이라고 하면 내가 그냥 넘어가줘야 되나?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건 그냥 도발 아닌가?”

“난 그럴 생각으로 말한 게 아니라...”

그럴 생각이 아니긴 무슨... 다분히 진심이 담겨있는 말이었구만.

넌 진짜 추함의 끝을 보여주는구나. 대단하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기어올랐던 건 칭찬해줘야 하나?

“예전엔 속이 깊은 놈인 줄 알았는데, 왜 요즘 들어 자꾸 선을 넘는 것 같지?”

툭, 툭.

손으로 가려져있는 테츠야의 뺨을 두어 번 더 치자, 놈이 뒷걸음질을 치며 당황해했다.

그런 놈을 따라가며 어깨를 민 내가 계속해서 쏘아붙이려고 할 때,

“마츠다 군! 지금 뭐해!?”

저 멀리서부터 미유키의 큼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니, 경악을 한 미유키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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