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가방을 매었음에도 엄청난 속도로 뛰쳐나와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은 미유키는, 테츠야가 아닌 날 올려다보며 양팔을 좌우로 쭉 뻗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 내가 이런 거 엄청 싫어하는 거, 알아? 몰라?”
“때린 게 아니라 건드린 거지. 그리고 저 새끼가 먼저 선을 넘잖아. 야, 미우라. 네가 뭐라고 말했는지 지금 여기서 지껄여봐.”
약간 격앙된 반응을 보여주며 테츠야를 삿대질하자, 미유키가 내 가슴에 손을 대고 버텼다.
“난 그냥 장난으로...”
기세가 팍 죽은 테츠야가 핑계를 대었다.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세상 억울하다는 제스처를 취한 건 덤.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친 내가 말했다.
“그러냐? 그럼 나도 장난 한 번 쳐본 거라고 생각해라?”
상황이 심각해질 거라고 판단했을까?
미유키가 마치 사고를 친 맹견을 달래듯, 내 얼굴 위로 자신의 검지를 들어올렸다.
“마츠다 군...! 진정해!”
“이걸 내가 지금 진정하게...”
“그만! 진짜 화낸다?”
“.....”
정색을 하며 단호하게 말하는 미유키.
나는 불만은 가득하지만 미유키를 봐서 억지로 참고 있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이를 본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테츠야를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정문 밖을 가리켰다.
“테츠야 군은 먼저 가. 자초지종은 나중에 들을게.”
“미유키, 내가...”
“그러니까 이유는 나중에 듣겠다잖아. 먼저 가라구...!”
상당히 높아진 미유키의 언성.
찔끔한 테츠야가 뒤로 물러나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알았어.”
뒤로 물러나던 테츠야는 곧 빠른 걸음으로 아카데미를 나갔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멀어지는 테츠야를 지켜보던 미유키는, 놈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는 날 데리고 경비실로 가더니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경비원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저... 아저씨. 봤죠?”
“음... 봤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남자들이 다 그렇잖아요. 친한 친구끼리 철없는 말장난을 하다가 순간 욱해서 멱살 잡는 거...”
“누가 친한 친군데?”
대화에 끼어든 내 시큰둥한 말투에, 미유키가 한심한 듯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했다.
“이거 보세요. 엄청 유치한 거.”
그에 경비원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다. 위에 보고는 안 하마.”
방금 다퉜던 게 일반 학생들이었다면 경비원은 가차 없이 교무과에 연락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너털웃음만으로 넘어가준다?
내가 봉사시간에 봉사활동을 하며 경비원과 친해졌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는 뜻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츠다 군도 빨리 인사드려.”
내 팔을 잡아끈 미유키의 재촉.
나는 마지못한 척, 아주 뚱해있는 표정으로 경비원에게 목례를 했다.
“고마워요, 아저씨.”
“오냐. 대신 확실하게 화해해야한다?”
“그건 약속 못... 끄윽... 알겠습니다.”
사족을 붙이려고 하던 나는, 미유키가 허리를 아주아주 강하게 꼬집자 다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손이 너무 맵다. 아파 뒤지겠네.
그렇게 공손히 경비원을 입단속 시킨 미유키가 내 손목을 잡아끌고 체육실로 향했다.
날이 어둑해지며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그곳에서, 단단히 팔짱을 낀 미유키가 날 쏘아붙였다.
“마츠다 군은 화가 나면 주먹부터 나가는 철부지야. 하지만...”
“말 서운하게 하지 마라.”
“들어봐. 하지만 요즘 마츠다 군은 다짜고짜 망나니처럼 행동하진 않잖아. 상대방에게 전부 과실이 있는 접촉사고가 났음에도 짜증조차 내지 않고 그냥 보내주는 사람이 손찌검을 했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맞아?”
“짜증내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알았냐? 난 말한 기억이 없는데.”
“교감선생님께서 학생회실에 찾아오셔서, 마츠다 군이 혹시 부활동을 하냐고 물어보셨었어. 그때 내가 무슨 일이냐고 여쭤보면서 알게 된 거야.”
아아... 선업을 통해 돌아오는 좋은 업보... 콧구멍이 절로 벌름거려진다.
오르가즘이 장난 아니다. 무발기사정도 가능할 것 같아.
이래서 착한 사람들이 공덕을 쌓는 것이로구나.
“어쨌든 어디 한 번 설명해봐. 테츠야 군을 때릴 정도로 열 받은 이유가 뭐야?”
이어지는 미유키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겸연쩍은 듯 입맛을 다셨다.
“아니... 이걸 꼭 말해야하냐...? 고자질하는 것 같아서 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가감 없이 얘기해.”
도끼눈을 치켜뜨는 모습이 은근히 섹시하다.
“아니 뭐...”
뒷머리를 긁적인 나는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아이스크림 이야기가 나오자 테츠야가 강제를 운운한 것부터, 미유키의 약점을 빌미로 협박을 한 건 아니냐고, 다 장난으로 말하는 거라고 했던 것까지.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긴 설명을 하진 않았다.
그저 간단하게, 3자 입장에서 말하려고 노력했다.
“.... 정말 테츠야 군이 그런 말을 했어?”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그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날숨으로 답답함을 드러낸 나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약하게 찼다.
“안 믿을 줄 알았다.”
“누가 안 믿는대? 믿어, 믿는다구.”
“그럼 왜 되물어본 건데?”
“아니... 내가 알던 테츠야 군이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아서 그랬던 것뿐이야. 음...”
미유키는 무언가 생각할 거리가 있는 듯 검지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고뇌에 잠긴 미유키... 너무 예쁘다.
지금 체육실에 들어가서 한 판 하면 안 되나?
한참동안 도톰한 입술을 닫고 있던 그녀가 날 올려다보았다.
“알았어. 마츠다 군이 화난 건 이해했어.”
“그러냐?”
“응. 하지만 폭력은 너무했다고 봐. 물론 마츠다 군 입장에선 테츠야 군이 먼저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화가 난 거라고는 하지만...”
여기서 이걸 걸고 넘어지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테츠야가 열등감에 절어져있는 이상, 나는 화는 나지만 꾹 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게 나았다.
미유키는 분명히 교차검증을 하기 위해 테츠야를 호출할 것이다.
그때 놈이 알아서 자책골을 집어넣을 텐데, 내가 굳이 폭력을 쓴 이유에 대해서 설파할 필요는 없지.
입술을 푸르르 떨며 한숨을 내쉰 나는, 미유키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미우라 태우면서 사과할게.”
그 말에 미유키의 냉랭한 얼굴이 상당히 풀렸다.
“반성하고는 있어?”
“별로.”
“마츠다 군.”
“아니... 솔직히 지금은 반성이 안 되는데 어떡하냐? 그래도 폭력을 쓴 건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있으니까, 그것만큼은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러면서 반성도 할 거지?”
“.... 노력은 할게.”
“응. 이제 돌아가자.”
“화 안 났냐? 그럼 잠깐 체육실에...”
“화났고, 그 말을 들으니까 더 나려고 해.”
“알았다. 미안.”
얌전히 아가리를 닫은 나는 미유키와 함께 아카데미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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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자마자 나가는 거야?”
부엌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휴대폰을 손에 든 미유키가 말했다.
“잠깐 테츠야 군 좀 만나고 오려구.”
“그래? 오랜만에 만나는 거 같네? 너무 늦지 않게 와.”
“알았어.”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을 연 미유키는, 자신과 테츠야가 자주 만났던 자그마한 놀이터로 향했다.
그네에 앉아 테츠야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츠다 생각이 솔솔 났다.
예전... 그러니까 마츠다가 자신을 구해주고 과외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가 이 놀이터의 그네에 혼자 앉아있던 것이 아른거렸다.
당시 마츠다가 와타나베 타카시를 만나려고 했었지 아마?
‘하아...’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오늘의 사건이었다.
예전에 마츠다가 그랬었다. 테츠야가 굉장히 음흉하다고.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마츠다가 테츠야를 껄끄러워했던 것 같은데... 혹시 예전에도 오늘처럼 비슷한 말을 들었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미유키는,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뱉으며 놀이터로 달려온 테츠야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왔어?”
“응... 미안. 조금 늦었어.”
“나도 방금 왔어. 옆에 앉아볼래?”
호흡을 고르더니 옆 그네에 앉는 테츠야.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미유키가 물었다.
“오늘 왜 마츠다 군이 테츠야 군을 때린 거야?”
“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이어지는 테츠야의 말은 시점만 바뀌었지 똑같았다.
자신을 만나러 정문으로 가는 도중 아이스크림 얘기가 나왔고, 나나세 선배와 자신, 그리고 마츠다가 셋이서 먹으러 간다는 대목에서 테츠야가 장난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협박을 운운.
마츠다가 했던 설명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다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마츠다와는 달리, 테츠야의 말 속엔 은근히 자기 자신을 변호하려는 듯한 기색이 있다는 게 차이점일까.
“.... 이렇게 된 거야... 마츠다한테도 얘기 들었어?”
“응.”
“마츠다는 뭐라고 했어? 자기 자신한테 유리한 말만 하지 않았어? 사실을 곡해한다거나...”
미유키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설명을 끝내자마자 마츠다를 깎아내리려는 테츠야의 행동이 좋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혀 그러지 않았어.”
“그래...? 의외네. 어, 어쨌든 장난이었어.”
지금만 보면 테츠야가 먼저 잘못을 저지른 건 명백했다.
그럼에도 마츠다는 테츠야에게 먼저 사과를 하겠다고 나섰다.
물론 자신의 얼굴을 봐서 억지로 하려는 감이 조금 있긴 했지만, 어쨌든 한 발 물러났다.
심지어는 싸운 직후임에도 테츠야를 평소처럼 태워다주기까지 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헌데 테츠야의 지금 이 반응은 무어란 말인가?
변명을 하기에 급급한 태도라니.
맞았다는 것을 감안해도 약간... 속이 좁아보였다.
마츠다는 자신을 만난 이후부터 정말 착... 해진 건 아니고, 얌전해졌다.
욕은 완전히 고쳐지지 않았지만, 미유키 자신이 물리적인 폭력을 무척 싫어한다는 걸 알아서 주먹을 드는 일만큼은 일절 없었다.
그럼에도 분에 못 이겨 주먹을 휘두를 정도라?
오늘 사건 외에도 무언가 곪았던 것들이 있는 듯했다.
테츠야가 자꾸 차 문을 세게 닫아서 그런가?
아니, 이건 아닐 것이다.
불평을 터뜨리긴 했지만, 고작 이걸로 성질을 부릴 만큼 마츠다는 쪼잔한 사람이 아니니까.
‘이건 마츠다 군한테 물어봐야겠어.’
테츠야에게 직접 묻기엔, 그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반응이 탐탁찮았다.
테츠야를 믿기는 하지만, 오늘 객관적인 태도를 보여주려고 했던 마츠다에게 답을 얻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츠다는 뒷담화를 하는 것 같다며 말하기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꼬치꼬치 캐묻다보면 알려줄 것이다.
그나저나 평소의 테츠야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혹시 주변에 무슨 일이 있었나?
그넷줄을 잡고 땅을 차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유키가 말했다.
“테츠야 군, 요새 걱정거리가 많아?”
“걱정거리...?”
“응. 혹시 무슨 일 있어?”
“없어. 무슨 일이 있다면 가장 먼저 너한테 말했을 거야. 나 알잖아.”
“그래... 그렇긴 하지.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왜 마츠다 군한테 그런 얘길 한 거야? 심하다는 생각은 못해봤어?”
“아니... 넌 마츠다를 싫어하잖아. 그...”
미유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테츠야의 말을 끊었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싫어했지. 지금은 전혀 아니야.”
“.... 전혀 아니라고?”
“응. 지금은 마츠다 군을 좋아해. 그런데 싫어하는 거랑 테츠야 군이 마츠다 군한테 그런 말을 한 거랑 무슨 관련... 아앗!?”
미유키가 자신의 입가를 가리며 비명을 터뜨렸다.
그네를 살살 타며 미유키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테츠야가 돌연 뒤쪽으로 벌러덩 넘어졌기 때문이었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집에서 쉬고 있던 나는, 막 잠자리에 들려던 시간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귀를 쫑긋했다.
‘미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