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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31화 (131/313)

다음날 밤.

미유키와 평범한 커플처럼 데이트를 한 나는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덜컥.

차에서 내린 미유키가 날 향해 입술을 내밀었다.

자신의 집 바로 앞에 차를 세웠음에도 애정표현에 거리낌이 없는데, 이제 연애를 한다는 걸 가족들이 알아도 상관없는 건가?

장족의 발전이다. 뭐, 미유키와 와타루 빼고 나머지 가족들은 다 아는 공공연한 진실이긴 하지만.

미유키와 가벼운 키스를 마친 나는, 그녀가 수줍게 한손을 흔들자 히죽 웃어보였다.

“들어가라.”

“응.”

그렇게 미유키를 보낸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벌러덩 누웠다.

조용한 거실 안에 혼자 있다 보니 어제 생각이 솔솔 났다.

처음 미유키의 속 안에 씨앗을 뿌린 기분... 아주 황홀했다.

그녀와 날 이어주는 실이 더욱 끈끈해진 느낌.

미유키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오늘 데이트를 할 때 아예 착 달라붙어선 떨어지질 않았었다.

굉장히 즐거워하던 미유키의 얼굴을 상상하며 꽤나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던 나는,

우웅-!

충전기에 꽂아둔 휴대폰이 진동을 발하자 그것을 집어들었다.

[저 잘 거예요.]

렌카의 문자가 와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빈 소원의 시작 시점이 자정부터였지.

자는 척을 했어도 됐을 텐데 잊지 않고 보고해줘서 기특하다고 해야 하나?

킥킥거린 나는 답장을 보냈다.

[호칭은요?]

[꼬박꼬박 붙이라는 말은 없었잖아요.]

그저 딱딱한 문자일 뿐임에도 화를 참고 있는 게 느껴진다.

주인님이라고는 곧 죽어도 못하겠나보지?

[보고할 때 호칭을 붙이라고 말하지 않았었나요?]

[그런 말씀 안 하셨어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한데요. 소원 내용에 대해서 상의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아뇨. 저는 제대로 하고 있어요.]

[마음에 안 듭니다. 내일 다시 얘기하죠.]

더 이상 오지 않는 문자.

일부러 씹었겠거니 생각한 나는 알람을 맞춰놓고 잠을 자려다가, 다시 진동이 울리자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육성으로 짧은 웃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주인님, 저 잘게요.]

렌카가 저런 답장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트집을 잡힐 바에야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기로 했나보지?

좋은 마음가짐이다. 이래야 너지.

한 가지 아쉬운 건, 렌카가 부들거리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거다.

문자가 아니라 전화였다면 렌카의 감정을 아주 잘 느낄 수 있을 텐데, 그게 조금 아쉽다.

한 번 전화를 해볼까 고민해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내일이면 마음껏 렌카의 리액션을 볼 수 있으니까 참자.

그래도 문자는 계속 이어나가야지. 조금만 괴롭히고 놓아줘야겠다.

[밥은 먹었어요?]

[아니요.]

[저녁을 굶었다고요?]

[네. 배가 안 고파서요. 저 이제 잘게요.]

[저는 안 졸립니다.]

[그래서요?]

[놀아달라는 얘기죠.]

[싫어요. 저는 졸려요.]

아주 싸가지 없는 노예로다.

냉정한 훈육이 필요하겠어.

[내일 아침에 부실 뒤쪽으로 와요.]

[제가 그래야할 이유는 없어요. 저 진짜로 잘게요.]

[부장도 지금 즐기고 있죠?]

[이상한 소리하지 마세요. 이제 답장 안 할 거예요.]

[저도 이제 잘 건데, 인사 안 해줘요?]

[안녕히 주무ㄴㅇ매ㅑ렁ㄴ매ㅑ러ㅐᅟᅣᆼㅁ너]

화가 났나보다. 저렇게 마구잡이로 쓰고 보내기까지 한 걸 보면.

실없이 끅끅 쪼갠 나는 얌전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이구나, 마츠다.”

살갑게 날 반기는 경비원.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내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오냐. 친구와는 화해했고?”

“친구요? 아...”

테츠야를 말함이었다.

헌데 친구라니...

사악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다가 사라진다.

“화해는 모르겠고, 미안하다고 사과는 했습니다.”

“그렇구만.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냐?”

“할 일도 없길래 도와드리려고 왔죠.”

사실은 등교하는 치나미와 렌카를 보기 위해서지만, 겸사겸사 교문을 쓸어주면 평가도 오르고, 경비 아저씨도 편하고 좋잖아.

내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린 경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냐? 그럼 고맙게 도움 받으마.”

“예.”

그렇게 빗자루를 챙기고 교문 앞의 낙엽을 쓸고 있던 나는,

“앗! 후배님!”

멀찍이서 치나미가 발랄하게 손을 흔들자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렌카는... 옆에 있다.

표정이 순식간에 구겨지는데, 벌써부터 저런 반응이라니 미래가 기대되잖아.

총총걸음으로 다가온 치나미와 눈을 맞춘 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스승님. 주말은 잘 보냈나요?”

“저야 항상 똑같았지요. 후배님은요?”

“저는 뭐... 이것저것 하면서 바쁘게 보낸 것 같네요.”

말을 마친 나는 렌카를 쳐다보았다.

나와 치나미를 살며시 피해가려던 그녀의 온몸이 움찔하더니 굳었다.

훅 하고 짧은 콧바람을 내뱉으며 웃은 내가 목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부장.”

“.....”

인사를 받아주지도 않고 입술을 잘근 깨무는 그녀.

평상시대로 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인지 헷갈려하고 있구나.

확실히 부실 안에서를 제외하면 모두 존댓말을 쓰라고 했지.

여기선 반말을 해도 넘어가줬을 텐데, 쓸데없이 디테일하기는... 쯔쯔...

“친우님, 무슨 일인가요? 후배님이 인사를 하셨잖아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렌카를 향한 치나미의 온화한 다그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렌카가 선택한 것은,

“.... 콜록! 커헉!”

기침을 하는 것이었다.

뜬금없는 그녀의 행동에, 치나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으응...? 뭐하세요...?”

“콜록! 콜록! 나 갑자기 목이... 콜록! 먼저... 갈게...! 콜록!”

허접하기 짝이 없는 연기를 펼친 렌카는 몸살이라도 걸린 사람마냥 비틀거리기까지 하며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치나미가 중얼거렸다.

“사레라도 들린 걸까요?”

“글쎄요. 조금 답답해 보이긴 했습니다.”

“흐음... 매점에서 박하사탕이라도 사가야겠네요.”

“우리 스승님은 마음씨가 정말 곱네요? 기특해요.”

“후배님과 대화를 하다보면 기분이 이상해져요. 마치 제가 제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에요.”

“친한 사제지간처럼 생각돼서 나쁘지는 않지 않나요?”

“그것도 그래요. 그런데 봉사활동은 다 끝났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왜 빗자루를 들고 계시는 건가요?”

“1교시까지 시간이 남아서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후배님이야말로 마음씨가 고우시네요. 오늘 부활동 시간에 상을 드려야겠어요.”

보나마나 복숭아 맛 아이스크림이겠지.

노예로서의 자각을 하고 있는 렌카에게 대신 먹으라고 해볼까 싶다.

그저 방긋 웃고만 있던 나는, 얼굴이 약간 불그스름해진 치나미가 가겠다고 말하자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들어가요.”

“네에...”

잰걸음으로 멀어지는데, 신발에 진흙이 다 묻잖아.

우리 치나미는 참 칠칠맞아서 문제에요.

역시 내가 일일이 챙겨주지 않으면 안 돼.

**

“부장.”

움찔.

뒤에서 들려오는 내 목소리에 눈에 띄게 어깨를 달싹이는 렌카.

식수대에서 물을 마시다가 다급하게 입가를 닦아내고, 후다닥 자리를 떠나려는 모습이 웃기다.

“멈추세요.”

낮은 음색으로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자, 제자리에 우뚝 멈춘 렌카가 날 돌아보았다.

“지금 뭐하는...!”

그리고는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려다가, 제 스스로 화들짝 놀라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리 둘 외엔 아무도 없음에 안심한 그녀가 기어들어갈 정도의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하는 거야...!”

“왜 반말을 해요?”

“읏... 무, 뭐하시는 거예요...”

겁을 집어먹은 한 마리의 처량한 새끼강아지 같은, 자존심 강한 여자의 풀죽은 목소리.

아아... 이게 듣고 싶었다. 아래가 순식간에 빳빳해진다.

“뭘 하냐니, 무슨 말이죠?”

“왜 날... 아니, 절 따라다니는 건데요...”

억지로 존대를 하는 렌카의 표정엔 굴욕감이 가득했다.

주먹까지 꽉 쥐고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그대로 넘어뜨린 다음 덮치고 싶을 정도다.

“우연히 마주친 겁니다.”

“거짓말하지 마... 세요... 여긴 사람들이 거의 없는 장소인데...”

“저도 물을 마시려고 왔다가 부장을 발견한 거예요.”

“아, 아니잖아... 요...”

네 말이 맞아. 사실 네가 급식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바로 뒤따라간 거야.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식수대에서 간단하게 물을 마신 나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래바닥에서부터 신발이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렌카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친 것이다.

“오지 마...”

이를 악 문 그녀의 경고.

나는 다시 크게 한걸음을 내딛으며 미간을 좁혔다.

“또 반말하네?”

“미, 미안해요... 오지 마세요...”

툭.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던 렌카의 등이 급식실 창고 벽에 닿았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활로를 찾는 그녀.

나는 그런 그녀에게 거의 몸이 닿을 정도로 아주 가까이 붙었다.

“흐윽...!?”

그러자 딸꾹질을 하듯 숨을 삼키는데, 위압감을 느끼기라도 한 듯 동공이 무척 빠르게 떨리는 것이 보인다.

이토록 당황한 렌카는 처음 보는데... 재미있다.

사실 렌카가 이렇게까지 기죽을 필요는 없었다.

이건 그냥 그녀 스스로 나와의 위계질서를 재정립한 거다.

아마 ‘주인님’이라고 부르라 했을 때부터,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주종관계를 확립시킨 것 같은데... 역시 렌카에겐 훌륭한 노예가 될 자질이 있다.

“꺼져... 꺼져요...!”

그래도 여전히 앙칼지긴 하네. 욕까지 하고.

하긴, 존대만 하라고 했지, 욕을 하지 말라고는 안 했지.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눈썹만을 꿈틀한 채 렌카를 내려다보았다.

그에 내 그림자로 그늘져있는 그녀의 얼굴에 낭패감이 깃들었다.

“시, 실언이었어요...”

황급히 말을 정정하는 렌카.

내뱉고 나니 뒷감당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제대로 사과해요. 똑바로.”

“죄송... 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호칭은?”

“.....”

렌카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오므리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얼굴을 마주보고 주인님이라 부르기엔 정말 싫은 듯한 표정이다.

여기선 살짝 봐줘야지. 계속 채찍만 갈겨대면 반발심이 생기는 법이니까.

생각을 마친 나는 다소 부드러운 투로 화제를 돌렸다.

“1교시부터 점심시간까지 휴대폰이 조용하던데, 왜 가만히 있었죠?”

“.... 수업시간까지 보고를 해야 되나요...?”

“모든 것들이라고 말했잖습니까.”

“버, 범위가 너무 헷갈려요... 다음부터는 할게요...”

“이번만 넘어가드리겠습니다. 나나세 선배는 어디 있나요?”

“아이스크림을 사러 매점에 가겠다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

“.....”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급식실 앞의 널따란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린 렌카가 조심스레 물었다.

“가 봐도 될까요...?”

“예. 아니, 잠깐만요.”

주머니를 뒤적거린 나는 주전부리 용도로 사놓은 딸기 맛 캐러멜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렌카가 무심코 그것을 받아들더니, 얼굴이 확 붉어졌다.

두 손으로 공손히 물건을 받는 자신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익...!”

자존심이 상했는지 인상을 팍 찌푸리는 그녀.

한쪽 입꼬리를 올린 내가 말했다.

“맛있게 먹을 거죠?”

“.... 네...”

“가보세요.”

바깥쪽을 턱짓한 나는, 렌카가 자신의 포니테일을 휘날리며 내게서 도망치자 피식하고 말았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그저 걷고 있는 것뿐인데 거리가 쭉쭉 멀어진다.

오늘 보여주는 반응이 너무 좋아서 마지막 소원도 이걸로 써버릴까 하는 유혹이 마구 솟구치는데, 참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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