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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이잉-!
맨션 앞 자동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부터 신발을 질질 끌며 나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치나미.
시간을 보고 있던 렌카가 그녀를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일어났어? 전화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네에... 죄송해요...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또 한정판 모모님 굿즈를 살펴보고 있었던 거야?”
“아니요... 이런저런 생각을 조금 하느라...”
“그래...? 일단 역으로 가자. 늦겠다.”
“네... 그런데 친우님, 배는 안 고프신가요? 샌드위치 드실래요? 식탁에 있는 것을 조금 갖고 왔어요.”
치나미의 집에서 갖고 온 샌드위치라?
보나마나 복숭아 잼으로 범벅이 되어있을 것이다.
“난 괜찮아. 간단하게 먹고 나왔어.”
“그래요...? 더 드세요.”
잠을 깨려는 듯 눈가를 부비적거린 치나미가 샌드위치를 꺼내 내밀자, 렌카가 한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배불러.”
“간단하게 먹었는데 배가 불러요?”
“아침이니까 부를 수도 있지... 그나저나 어제 아무 일 없었어?”
찔끔한 렌카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제요...? 어제... 어제...”
치나미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같은 단어를 반복하던 그녀의 동공이 일순 화아악 커졌던 것이다.
“후아앗...!? 어제...?”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 마구 흔들리는 눈,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친구의 이상반응을 살핀 렌카가 설마 하는 투로 재차 물었다.
“치나미...? 아무 일 없었냐니까...?”
“어, 어, 어어어없었어요...”
누가 봐도 의심할만한 반응.
이빨을 딱딱거리기까지 하는 치나미의 대답에, 렌카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치나미... 너 설마 마츠다한테...”
“므엣!?”
“.....”
마츠다의 이름이 튀어나오자마자 까무러칠 듯 놀라는 그녀.
어제 무언가 큰일이 있었음을 직감한 렌카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마츠다가 치나미에게 변태 같은 짓을 저질렀구나.
그리 확신한 렌카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서 치나미와 시선을 맞추었다.
“치나미. 자세히 얘기해줄 수 있어? 어제 뭘 했는지?”
“.... 마, 마사지를 받았는데요...”
“어떤 마사지를 받은 건데?”
“오일 마사지요...”
오일 마사지라... 분명 저번에도 똑같은 마사지를 받았다고 했지.
헌데도 지금 저런다는 건, 어제의 마사지에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뜻 같았다.
“그, 그래서 오늘 힘이 없네요...”
이어지는 치나미의 말에, 렌카가 침음을 삼켰다.
자신의 친구를 빤히 쳐다본 그녀는, 치나미의 목소리와 표정에 수줍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음...?’
치나미에게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은 얼굴만을 한 채였다.
가령 한정판 모모님 신상 굿즈 구매에 성공했을 때와 비스무리한... 그런 얼굴.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렌카는, 자신이 혹시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의심해보았다.
자신이 지금 오해를 하고 있나? 과잉보호인가?
아무리 치나미가 순진하다고는 하지만, 마츠다 같은 사람의 세 치 혀에 넘어갈 만큼 바보는 아닌데...
혹시 치나미는 마츠다가 했던 어떠한 무언가를 묵인, 혹은 동의한 건가?
그래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거고?
그러면 대체 뭘 한 거지?
궁금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했던 일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렇고 그런 것이라면... 물어보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친우님... 마츠다 후배님께서는 제게 그 어떠한 강압적인 일도 하지 않으셨어요...”
렌카의 안색을 살핀 치나미의 떨리지만 진중한 어투.
그에 정신을 차린 렌카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정말이야?”
“네... 그저 스승과 제자간의 우애를 다졌을 뿐이에요...”
“우애...? 막 야한 일을 한 건 아니지...?”
“무슨 야한 일이에요...! 친우님께서는 참 걱정도 많으세요.”
“그럼 뭘 했는데 그렇게 얼굴이 빨개져?”
“헛...!”
“이거 봐...! 지금도 마츠다 이야기가 나오니까...”
“흐흠...! 친우님. 친우님이 우려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러면 괜찮은 게 아닐까요...?”
괜찮지 않다.
치나미가 점점 마츠다가 뻗은 마수에 걸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꼬치꼬치 캐물어보고 싶지만 요즘 치나미를 너무 억압하는 느낌이었고, 사생활을 침해한다고 생각할까봐 망설여진다.
‘미치겠네...’
치나미가 말한 우려하는 일, 그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해보였다.
눈을 보면 안다. 치나미는 진실 된 말을 하고 있었다.
그거면 된 것 아니겠는가?
라고 하기엔 마츠다라는 사람이 불안하긴 하지만... 일단은 넘어가자.
마츠다와도 대화를 나눠봐야겠어.
그리 생각한 렌카의 고개가 주억거려졌다.
“알았어...”
그러자 환한 미소를 지은 치나미가 렌카의 등을 팡팡 쳤다.
“그래요. 마츠다 후배님에 대한 의심은 접어두시고, 제가 드리는 이 샌드위치 맛을 좀 보세요.”
“밥 먹었다니까...?”
“어허...!”
엄한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내미는 치나미.
힘없는 웃음을 터뜨린 렌카는, 귀여운 친구의 재촉에 못 이겨 입을 벌렸다.
**
[지금 학교야?]
렌카의 문자가 왔다.
먼저 보내오는 건 처음인데 무슨 일일까?
아마 어제 일 때문이겠지? 치나미가 어디까지 말했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예.]
답장을 보내자마자, 다시 렌카의 문자가 도착했다.
[잠깐 급식실 뒤쪽으로 올 수 있어? 할 말이 있어서.]
명령조가 아닌 부탁조인 걸 보니 화가 나있는 건 아닌가?
가봐야 알겠지.
미유키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교실을 나와 렌카가 말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렌카가 팔짱을 낀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평온하게 걸어오는 날 발견한 그녀는,
“어제 뭐했어?”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저런 물음을 던져왔다.
“스승님이랑 있었죠.”
“그러니까 치나미랑 뭘 했냐고.”
치나미한테 어디까지 들은 걸까?
서로 비밀이 없는 두 사람이긴 하지만, 절정했다는 사실마저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애매모호하게 말해주면서, 지금 저 렌카의 공격적인 기세를 눌러놔야겠다.
“마사지요.”
“정말 마사지가 끝이었어?”
“예. 마사지를 했고, 그 다음엔 집까지 데려다줬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렸길래 현관문까지 바래다준 게 끝이에요.”
“.... 그래...?”
“그렇다니까요. 근데 부장은 스승님의 엄마라도 돼요?”
“뭐...?”
“왜 자꾸 스승님을 옥죄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요?”
“야...! 옥죄다니...! 너도 알다시피 치나미는 착하고 순해. 너 같은... 아니, 그... 음... 주변에 이상하고 음란한 기운이 맴돌면 그 누구라도 불안하지 않겠어?”
저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심지어는 저번에 렌카에게 취향이 한껏 담긴 소원을 빌기도 했으니, 저런 태도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더 심하게 말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할 판이다.
그나저나 방금 렌카가 말을 흐렸는데, ‘너 같은 사람이랑 붙여놓으면 그 누구라도 불안하지 않겠어?’ 라고 하려 했던 것 같다.
조교를 좀 해주니 알아서 순해지네. 우리 노예... 기특하다.
그래도 아직 말버릇이 험악해. 혼쭐을 내줘야겠다.
“그래서, 내가 그런 기운을 퍼뜨리는 사람이다 이 말인가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렌카를 압박하자, 그녀의 기세가 슬쩍 죽었다.
“왜, 왜...? 혹시 찔려...? 좋다고 할 수는 없잖아... 사람을 그렇게 심하게 밀어붙여놓고...”
저번 소원이 참 인상깊었나보다. 말이 길어지는 것을 보면.
아직 무의식적으로 확립해둔 주종관계가 남아있는 것도 지금 렌카가 보여주는 반응에 한몫했겠지.
“제가 누굴 밀어붙였는데요? 부장을?”
“그, 그래...! 막 이상한 취향을 강요하면서...”
“소원이었잖아요.”
“아무리 소원이라고 해도... 지켜야할 선이 있다고는 생각 안 해?”
“부장은 선을 지켜서 절 무일푼으로 노동시킨 건가요?”
“그건...! 네가 받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일을 열심히 했으니까 삼촌들이 주려고 한 거지, 원래 부장은 저한테 일당을 줄 생각이 없었잖아요.”
“내가 주려고 했는지 안 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누가 네 삼촌인데...? 우리가 무슨 사촌지간이야...?”
음... 사촌지간의 뒤틀린 사랑... 그것도 조금... 아주 조금 꼴리는데.
나중에 코스프레를 시켰을 때 그런 상황극을 넣어볼까 싶다.
바락바락 대드는 렌카를 향해 실소를 터뜨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삼촌들은 좋아하던데.”
“.....”
할 말 없지? 쌍둥이가 날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
천연덕스러운 태도를 보여주는 내가 얄미웠는지, 렌카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예쁜 입술에 상처라도 나면 어떡해. 쫍쫍 빨아주고 싶다.
“왜? 기분 나빠요?”
“당연하지...!”
“서운하네... 근데 부장.”
“왜...!”
“오늘 예쁘네요.”
“무, 뭐어...?”
그냥 던진 칭찬에 기겁을 넘어 경악까지 가는데, 그렇게나 싫었냐?
진짜로 서운하게 하네.
주위를 두리번거리기까지 하며 싫음을 온몸으로 표현한 렌카가 인상을 팍 구겼다.
“미쳤어...? 머리라도 다친 거야...?”
그래도 합숙훈련 때와 비교해보면, 우리 사이가 꽤나 많이 발전했음을 느낀다.
조금 다른 방향의 발전인데다, 삭막함에 상쾌함을 겨우 한 스푼 넣은 정도겠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머리를 다쳤냐니... 실망이네요.”
“실망은 무슨 실망...! 날 갖고 놀려고 하지 마...!”
어느새 대화의 주체가 우리 둘로 바뀌어버렸다.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입니까?”
“.... 너, 너 지금 또 협박하려는 거지...!?”
“왜 그렇게 생각하죠?”
“모, 목소리가 더 낮아졌잖아...! 살기가 느껴져...!”
“목소리만으로 살기를 감지할 수 있다니... 대단한데요. 만화 주인공이신가?”
“읏...!”
음음... 저 짜증, 곤란, 분노가 섞여있는 표정을 보니 발기가 되려고 한다.
마지막 소원은 언제 써줄까?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조교하고 싶으니까... 상황을 한 번 봐야겠다.
렌카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한 노예로서의 자각이 사라져버리기 전에 불러야지.
“할 말 다 했으면 가 봐도 될까요? 수업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이어지는 내 말에 흠칫한 렌카가 휴대폰 시간을 보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푸욱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가. 나중에 얘기해.”
“문자로 해도 됩니다.”
“.... 빨리 가버려.”
“부장도 조심히 가세요.”
“난 조심히 가라고 한 적 없어.”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수고해요.”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인 나는 어이없어하는 렌카에게서 멀어졌다.
치나미를 속여먹지 말라고 경고를 날리고 싶었나본데, 내게 휘둘리기만 하다가 본전도 못 찾게 돼버렸네?
우리 렌카도 은근히 순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