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38화 (138/313)

“치나미... 여기 있지?”

“네. 물론 있지요. 무슨 일이신가요?”

“아니... 잘 있나 해서.”

“15분 전에 똑같은 말씀을 하셨는데요.”

“미안해. 갈게.”

시답잖은 대화가 끝나자, 렌카가 보관실 문을 닫았다.

저번 사건 이후 오늘 금요일까지 치나미와 내가 다른 곳으로 향하면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을 비추는데, 스토커도 아니고 어이가 없다.

걱정이 되면 그냥 치나미를 데리고 매니저 일을 하든가.

“이번 주의 렌카는 걱정이 많네요. 어제도 그저께도...”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치나미의 혼잣말.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내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왜 저럴까요?”

“저는 알 것 같긴 하지만...”

말끝을 흐린 치나미가 슬쩍 날 돌아보다가, 눈을 마주치고는 흠칫했다.

재빨리 호구를 닦는 척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늘따라 호구 상태가 좋네요... 흠흠... 부원들이 예쁘게 쓴 것 같아요.”

“어제 잘 닦아놨으니까 좋은 게 아닐까요?”

“.... 물론 그 영향도 없잖아 있겠지요. 그나저나 오늘 날씨가 참 좋지 않나요?”

뜬금없이 날씨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는 모습이 귀엽다.

“그러네요. 그런데 스승님.”

“네?”

“왜 계속 같은 부위만 닦고 있어요?”

“제가 언제요? 저는 고루고루 잘 닦고 있었는데요? 후배님은 안과가 절실하신 것 같군요.”

시치미를 뚝 떼는 치나미.

나는 그녀가 삐치기 전에 그러려니 하며 상황을 넘겼다.

“슬슬 부활동도 끝나 가는데, 일을 마무리하러 가보겠습니다.”

“네, 수고해주세요.”

보관실을 나간 나는 빈 생수병과 캔으로 가득 찬 박스를 집어 들었다.

갑자기 날씨가 온화해진데다 간단한 대련이 있는 날이라 그런지 물 소모량이 상당하다.

여기서 렌카가 마신 물이 뭘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야...!”

부실 밖에서 분리수거를 하고 있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약간 소심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낀 채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렌카가 보인다.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내가 대답했다.

“왜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있나 없나 확인해본 그녀가 물었다.

“내일 진짜 부를 거야?”

“예.”

“몇 시에?”

“모릅니다. 아직 안 정했어요.”

“그럼 오늘 중으로 정확한 시간 보내.”

“지금 저한테 명령하는 건가요?”

“.... 그런 뜻은 아니었어.”

렌카의 태도가 아주 약간 공손해졌다.

그날이 다가오니 심한 꼴은 당하기 싫어서, 웬만하면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심산인 듯한데... 속이 훤히 보인다.

“대기하고 있으세요.”

“언제 끝나는지도 몰라?”

“왜요?”

“그냥... 미리 알아야 마음의 준비 같은 걸 하지...”

플라스틱만 남은 박스를 분리수거 통에 뒤집어엎은 나는, 빈 박스를 잘 접어 종이 칸에 던져놓았다.

그리고는 손을 툭툭 털며 렌카를 내려다보았다.

“내일 태도 먼저 보고 결정할게요.”

“그게 무슨 뜻이야? 말 잘 들으면 일찍 보내준다는 거야?”

직접 저런 말도 하고... 아주 많이 발전했다.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말했다.

“아마도요.”

“확실하게 말해주면 좋겠는데... 말장난하지 말고...”

“말 잘 들으면 일찍 보내줄게요. 됐죠?”

그 말에 렌카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알았어. 갈게.”

경계심이 한 끗 모자라네. 언제까지 보내줄 거냐고 물어봤어야지.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말을 잘 듣겠다 한 거야?

나중에 딴 말하면 네 잘못이다?

**

“안녕, 마츠다 군. 엄청 오랜만이네?”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날 맞이해주는 미도리.

그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내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그간 잘 지내셨어요?”

“물론이지. 추운데 얼른 들어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간 나는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자 코를 벌름거렸다.

오늘 요리는 스키야키인가? 냄새가 그쪽 같다.

와타루와도 인사를 나눈 나는 곧장 손을 씻었다.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식탁 위는 진수성찬이었다.

메인은 예상대로 스키야키, 그 주위로 스시부터 시작해서 튀김류까지... 온갖 맛있는 것들이 즐비했다.

저 차림상을 보니 갑자기 어떠한 생각이 머릿속을 확 스쳐지나간다.

자고 일어났을 때, 미유키와 미도리가 부엌에서 날 위한 요리를 만들어주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는 그런 망상 말이다.

이 집이 아닌, 내 집에서 앞치마를 두른 모녀...

그림이 좋잖아. 꼴린다.

“안녕하세요, 누나.”

식탁에 앉은 나는 오랜만에 보는 카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그녀가 말했다.

“안녕.”

눈을 동그랗게 뜬 걸 보아하니, 저번에 내가 모른 척 허리를 만졌던 일을 되새겨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장난기가 든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잘 지냈죠? 요새도 미유키 목소리 흉내 내요?”

“아니? 장난칠 사람이 없어서 못하고 있어.”

의외로 태연하네. 카나답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 집에 있으면 분위기를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캐릭터인데, 혹시 엄마, 동생이랑 같이 요리할 생각은 없니?

그러한 말을 삼킨 나는 상석에 앉은 와타루가 밥을 먹자는 말을 하자 젓가락을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식사자리.

미도리, 와타루와 담소를 나누며 요리를 먹고 있던 나는, 카나가 조신하게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미유키를 보며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자 뭔가 오겠구나 싶었다.

“오늘은 마츠다 군 얘기는 안 하네?”

능글맞은 말투로 미유키를 놀리듯 말하는 카나.

미유키가 눈에 띄게 어깨를 달싹이며 인상을 구겼다.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마츠다 군 얘기를 했다구...”

“왜 당황해? 맨날 마츠다 군이랑 뭘 했냐느니 하면서 자랑했잖아.”

“자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밥이나 먹어...!”

신경질적으로 계란초밥을 집은 미유키가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우걱우걱 씹을 만도 한데 내 눈치가 보여 애써 숙녀 같은 모습을 보이려는 게 웃기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미도리와 카나는 물론이고 하물며 와타루까지 미유키와 내 사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미유키 혼자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상태고 말이다.

아니, 알고 있는데 쑥스러워서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카나의 장난이라는 자그마한 사건이 지나가고, 나는 미도리가 준비해준 과일을 들고 미유키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방은 여전했다. 진한 자두 향이 풍겼고 잘 정돈되어있었다.

몇 번 와본 곳임에도 항상 신선하다.

그리고 거슬린다. 아직 많이 남아있는 테츠야의 흔적들이.

마치 완벽한 방에 개새끼가 똥을 싸질러놓은 것 같잖아.

과일이 담긴 그릇을 미유키의 책상 위에 놓아둔 나는, 공부를 하자며 날 재촉하는 미유키에게 천장을 가리켜보였다.

“저거 있는 거 좀 떼자.”

그에 천장에 붙어있는 야광 스티커를 본 미유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미우라가 널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아.”

“.....”

황당함에 벙 찐 미유키가 이내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내가 질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게 말이 돼...? 저기에 카메라라도 있다는 거야?”

“아무튼 떼자. 내가 다 할게.”

“왜 고집을 피우고 그래... 10년 넘게 있었던 거라서 정들었고, 떼면 천장 도배지가 찢어질 수도 있어.”

“조심조심 떼어내면 돼. 그리고 더 좋은 걸로 붙이자.”

“뭘로 붙일 건데?”

“나중에 같이 고르면 되지.”

“음... 생각해볼게.”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여주는 미유키에게 성큼 다가간 나는,

“벌써부터 왜 이래... 일단 공부부터 해...”

스킨십을 할 거라고 생각했나? 갑자기 저런 말을 하네.

그나저나 일단 공부부터 하라니... 하고 나면 해도 된다는 것처럼 들린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고 해.”

“.... 왜 이렇게 집착해... 그렇게 중요한 거야...?”

“어. 중요한 거야.”

“아 알았어...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 그러니까 얼른 앉아...”

등살에 못 이겨 내가 원하는 답을 한 미유키가 빈 의자의 좌판을 톡톡 쳤다.

저 스티커만 떼어내는 게 아니라, 아예 도배를 새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리 생각한 나는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놀러가겠다는 미유키와 짧게 통화를 하고 러브호텔로 차를 몰았다.

이후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사들고, 호텔 안으로 들어가 며칠 예약을 걸어두었던 룸으로 향했다.

거기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실 선반에 올라가있는 수갑이었다.

그 옆엔 BDSM 플레이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바이브레이터는 물론이고, 가운데에 볼이 있는 재갈, 얇은 가죽이 수십 갈래로 갈라진 체벌용 채찍인 플로거도 있었다.

심지어는 전신 구속구와 팔다리를 고정시킬 수 있는 스프레더 바까지...

있을 건 다 있긴 한데, 렌카가 본다면 엄청 부담스러워할 것 같다.

난 소프트한 룸을 원했는데... 이쪽 세계는 이 정도가 기본인 건가? 뭔가 새로 눈이 뜨이는 기분이다.

감옥 컨셉으로 된 침실로 들어간 나는 감탄을 하며 방을 둘러보다가, 커다란 퀸 사이즈 침대 옆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딱 알맞은 크기로 준비해놨구나. 아주 만족스럽다.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든 나는 곧바로 렌카에게 연락을 했다.

-하아... 여보세요.

저번과는 달리, 이번엔 빠르게 전화를 받는 그녀.

숨이 꽤 차있는 소리로 보아 운동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어디세요.”

-밖이야.

“지금 위치 보내줄 테니까 바로 오세요.”

-지금...? 나 운동 중인데...?

성실하네. 일곱 시 반인데 운동도 하고.

“그래서요?”

-.... 운동만 끝내고 갈게.

“아뇨. 지금 오세요. 위치는 저번이랑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다시 보낼게요.”

-또... 그 호텔이야...?

“예. 5층입니다.”

-저, 저번이랑 다른 층이네?

저번에 왔던 호수까지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렌카... 내게 관심이 많았구나.

“맞습니다. 얼마나 걸리죠?”

-.... 진짜 지금 가?

“예.”

-20... 분이면 될 것 같아...

자포자기했구나.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막 발기가 되려고 한다.

그래, 말을 잘 들어야 일찍 보내주지.

“알겠습니다. 입구에서 기다릴게요.”

-알았어...

전화를 끊은 나는 로비에서 렌카를 기다리려다가, 선반 위의 안대를 보고 눈을 빛냈다.

써먹기 딱 좋네.

그렇게 안대를 가지고 로비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며 시간을 때우던 나는,

우우웅.

자동문이 조용히 열리며 바람막이를 입은 렌카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어요?”

“.....”

말없이 로비를 둘러본 렌카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가 장소라 긴장한 모양.

피식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오면 괜한 오해를 할까 우려한 렌카의 빨리 가자는 재촉에, 그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후 룸 앞에서 렌카를 돌아보며 안대를 내밀었다.

“이거 쓰세요.”

“.... 이거 안대잖아...?”

“예.”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