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슬쩍 물러나는 그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나보다.
나는 망설이고 있는 그녀에게 나긋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합의한 대로 할 거예요. 걱정하는 일은 없습니다.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노, 놀라게 해준다고...? 뭔데...? 깜짝 놀라는 거야? 귀신의 집 같은 방은 아니지...?”
“설마 러브호텔에 그런 방이 있을까요?”
“.... 혹시 알아...?”
“그런 거 아니니까 쓰기나 해요. 금방 벗게 해줄게요. 아, 그 전에 바람막이부터 벗어요.”
“굳이 벗어야 돼...?”
“예. 안에서 오래 있어야할 텐데, 꽤 더울 겁니다.”
“.... 별 걸 다 시키고 난리야...”
투덜거린 렌카가 바람막이를 벗었다.
그리고 나는, 새하얀 복부가 훤히 드러난 그녀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크롭탑을 입고 있었다.
복부에서부터 명치까지 드러나는, 가슴까지 착 달라붙는 트레이닝 복 말이다.
여기에 더해 검은 레깅스까지... 너무나도 요염해 보인다.
외출할 때 과감하게 입는 건 알고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일찍 부르길 잘한 것 같다.
앞으로는 운동할 때만 호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빤히 쳐다보지 마. 변태냐...?”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렌카의 얼굴이 아주 조금 빨개졌다.
“걸어줄 테니까 주세요. 근데 예쁘네요. 잘 어울려요.”
“칭찬하지 마. 기분 나빠.”
새침하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나는 블루베리 향을 풀풀 풍기는 바람막이를 받아들고 다시 안대를 내밀었다.
“쓰세요.”
“.... 만약 이상한 거면 진짜 죽는다...?”
“알았다니까요.”
자신 있는 대답에 조금 안심했을까?
머뭇머뭇 안대를 받아든 렌카가 그것을 눈에 씌웠다.
은근히 날 믿네? 아니면 남아있는 노예로서의 자각이 명령을 거슬러선 안 된다고 판단한 건가?
뭐가 됐든 내겐 좋은 일이었다. 수월하게 렌카를 유도할 수 있었으니까.
렌카의 얼굴 아래로 손을 흔들어본 나는, 그녀의 시야가 전부 가려진 것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삐빅-!
그리고는 움찔하는 렌카를 친절한 말투로 인도했다.
“천천히 걸어오세요.”
손을 더듬거리며 위태롭게 안으로 들어오는데, 넘어질까 걱정된다.
“손이라도 잡아줄까요?”
“됐어. 말로만 설명해...”
“알겠습니다. 신발 벗고 앞으로 일곱 걸음만 오세요. 그렇지... 이제 왼쪽으로 다섯 걸음...”
안내에 따라 아주 느린 속도로 준비해둔 함정까지 도달한 렌카.
점점 흥분되어가는 마음을 다스린 내가 말했다.
“이제 엎드려요.”
“어, 엎드리라고...? 왜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 건데...?”
“말 들어요.”
“하... 진짜 미치겠네... 이 정도면 돼?”
“자세를 조금만 더 낮춰보세요. 그렇죠. 딱 그 정도면 됩니다. 이제 앞으로 기어가세요.”
“짜증나...”
말은 저렇게 했지만, 렌카는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조심조심 바닥을 더듬으며 전진해가는 렌카를 주시하던 나는, 그녀가 심연의 구렁텅이로 완전히 들어가자 그곳의 입구를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철컹.
“무, 무슨 소리야...?”
그러자 렌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에 놀란 듯했다.
자물쇠가 잘 잠겼나 확인해본 내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안대 벗어도 돼요.”
“벗어...? 지금?”
“예. 지금 벗어요.”
“알았어...”
조심스레 안대를 벗는 렌카.
그녀는 곧 자신이 있는 장소를 둘러보더니,
“무, 뭐야...? 여기 어디야...?”
일순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들어간 곳은 케이지였다.
사방팔방이 철창으로 둘러져있고, 앉은 상태로 허리를 펴면 간신히 머리가 닿을 정도로 높이가 작지만, 면적만큼은 제법 넓은 케이지 말이다.
“마츠다...? 지금 뭐하는 거야...? 물었잖아...! 대답해...!”
슬슬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알아차려가고 있는 렌카의 물음.
그녀가 적응할 수 있도록 10여 초간 텀을 둔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거기서 하루 종일 있으면 됩니다.”
“뭐어어...?”
확 커지는 동공, 그리고 그만큼 벌어지는 입.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 잠깐 입술을 뻐끔거리던 그녀는,
“이...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상황파악을 완전히 끝내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더 심한 욕은 없나? 귀가 가렵지도 않는데.
그녀의 눈앞에서 실실 쪼갠 나는 케이지 앞에 쪼그려 앉아, 현실을 직시하고 굴욕감으로 찌든 얼굴로 변하고 있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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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미사여구가 필요할까.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포즈다.
특히 레깅스 위로 돋보이는 엉덩이가 마음에 든다.
표정까지도 자리와 아주 잘 어울려. 완벽하다.
“그럼 쉬고 계세요.”
일말의 정도 없는 내 말에, 렌카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야!! 이... 이... 이 나쁜 새끼야!!”
렌카의 절규를 듣는 둥 마는 둥 한 나는 손가락으로 철창의 강도를 확인해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말 잘 들으면 일찍 보내준다고 했었죠? 그런 식의 태도가 도움이 될까요?”
“이익...!”
고급져보이는 케이지의 빨간 바닥. 그곳에 손을 대고 있던 렌카가 주먹을 꽈악 쥐었다.
엄청난 굴욕감을 느낀 듯 이빨을 뿌드득 간 그녀는,
“개자식...!”
내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진심이 담겨있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개새끼도 아니고 개자식이라니. 귀엽기만 하다.
렌카의 욕설을 한귀로 흘려버린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비치되어있던 음료수를 꺼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침대로 가서 누워 TV를 켰다.
“이... 변태 같은 새끼...”
침실을 둘러본 렌카의 말이었다.
컨셉이 확실한 룸이라 그런지, 내 취향을 오해한 것 같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오해가 아니지. 이제부터 취미를 붙여볼 건데.
렌카의 악담을 무시한 나는 사놓았던 과자를 먹으며 영화를 틀었다.
장르는 로맨스. BDSM 요소가 있는 R15+ 등급의 영화였다.
소꿉친구인 남녀 주인공이 서서히 BDSM 플레이에 빠져 들어가다가, 처음엔 섹스 파트너로 시작해서 종국엔 주종관계가 섞여있는 커플이 되는... 그러한 스토리였다.
렌카의 상황과 비슷해보여서 채택하긴 했지만 뭐... 그녀는 내게 원망의 시선을 보내느라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겠지.
벽걸이 TV에 큼지막하게 나온 제작사의 로고를 본 나는, 아직까지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렌카를 흘깃거렸다.
“읏...!”
그러자 렌카의 몸이 슬쩍 뒤로 빠졌다.
무감정한 눈빛에 위축이 된 것 같았다.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그런 그녀에게 작은 팝콘 통을 내밀었다.
“팝콘 먹을래요?”
“.....”